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번지, 임진강 北岸에 있는 城을 호로고루(瓠蘆古壘)라 한다.
그리고 對岸인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長佐里) 임진강南岸에도 성(보루)터가 있다.
장좌리 마을의 북단(임진강 南岸)에 호소습지 장자못(장자울, 장좌울)이 있고 그 못 우측 동서로 이어져 있는 야산(해발53m)에 이잔미성(보루)터가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어렵고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찾기가 어려운데 그 성을 南호로고루 또는 이잔미성(二殘眉城)이라고 부른다.
왜 二殘眉城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많은 자료를 찾아봐도 명칭의 유래는 물론 이잔미성의 한자표기도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가까스로 딱 한곳의 자료에서 한자표기가 二殘眉城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이제 임진강줄기 중 이 지역을 지칭하는 호로하의 北城인 호로고루와 南城인 이잔미성의 명칭유래를 탐색하고자 한다.
[호로하(瓠瀘河 / 江)의 유래]
호로고루는 임진강 북쪽 기슭의 현무암 단애(斷崖)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재미산(財尾山) 또는 재미성(財尾城)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성터 부근의 임진강을 과천·호로강(瓠瀘江)·표강(瓢江)으로 일컬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이 지역이 임진강 하류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으로서, 육로를 통해 개성 지역에서 서울 지역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三國史記나 長湍誌 등의 문헌기록을 종합해 보면 호로하(瓠瀘河), 호로탄(瓠蘆灘), 표하(瓢河), 표천(瓢川) 과천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했으며 모두 표주박이나 조롱박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니 강의 흐름이 조롱박의 목처럼 좁아지며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한자화한 이름이라는 설명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호로고루(瓠蘆古壘/城)의 유래]
삼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7세기까지 고구려와 신라는 16차례, 고구려와 백제는 31차례(혹은 33차례), 백제와 신라는 29차례에 걸쳐 피 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던 임진강 유역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 · 장수왕(재위 413~491년)대 부터 고구려 영역으로 바뀐다. 고구려는 남하루트에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비롯해 당포성, 은대리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보루를 축조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에서 파주 적성면의 칠중하(七重河)는 강 이름과 함께 칠중성(七重城)이라는 城의 이름이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투기록에서 호로하(江)라는 강 이름은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호로고루(城)라는 성 이름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현재의 호로고루(성)를 지칭하는 말로 ‘호로하(瓠瀘河) 岸上에 진을 치고...’와 같은 형태로 아래와 같이 기록했을 뿐 이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던 662년(문무왕 11년)의 삼국사기 기록에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 죽은 병사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강 언덕(岸上)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적(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백제·고구려를 제압한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맞선다. 673년, 당군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아홉 번 싸워 이겨 2,000여명을 목 베었고, 호로(瓠瀘)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城의 이름으로 호로고루가 나타날까? 문화재청의 유적설명을 보자,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 이며 이 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되어 있다. 그 후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호로고루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던 城이름이 아님은 분명하다.
삼국시대 이래로 호로고루(城)라는 특정된 이름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나당연합군과 신라의 전쟁 시기에 치열한 전투지역이였으므로 그저 호로하(瓠瀘河)의 언덕 위(岸上)정도로 지칭(指稱)해 오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이 지역에서 남북 간의 치열한 전쟁도 없었으니 이 지역이 부각될 리가 없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와 전국의 행정과 지리를 기술할 때 임진강 호로하 언덕위에 ‘고구려성’으로 전해지는 옛 보루가 있으니, 보이는 대로 그 地域名을 더해 '호로(瓠瀘)河의 언덕위에 있는 옛 보루(古壘)'라는 뜻으로 호로고루라 이름 한 것으로 생각된다.
皇城에 있는 옛터가 황성옛터요, 은대리에 있는 옛 성을 은대리성이라 명명하듯, 호로(江岸)에 오래된 성(古壘)이 있으니 호로 고루(瓠蘆 古壘)라 명명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강 유역의 성(城)이라는 의미로 쓰인 여진족 말인 ‘홀고루’가 시간이 흐르면서 ‘호로고루’가 되었을 거라는 의견은 당치않다.
[호로고루의 다른 이름]
장단면홈페이지에 호로고루(瓠蘆古壘)의 다른 이름으로 강안성(江岸城), 자미성(紫嵋城), 재미산(財尾山)이 있는데 강안성(江岸城)은 임진강 즉 호로탄(瓠蘆灘)언덕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자미성(紫嵋城) 재미산(財尾山)은 城의 고어 '잣'과 산의 고어인 ‘뫼’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산처럼 보이므로 우리 말로 '잣뫼'라 불렀으나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여러가지 한자로 표기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잔미성(二殘眉城)의 명칭유래]
증보문헌비고는 1770년(영조 46)에 왕명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로 편찬하였고 1782년(정조 6)왕명으로 이를 보편(補編)하여 최종적으로 <증보문헌비고>라 이름 붙여 1908년(융희 2)에 간행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호로 고루(瓠蘆 古壘)】:동쪽 32리의 호로탄(瓠蘆灘)위에 있는데,〔적성(積城)과의 경계이다.〕2루(壘)가 강(江)을 격(隔)하여 서로 마주보고 있고, 석벽(石壁)으로 인하여 견고하게 되었다. 세속(世俗)에서 전하기를, 삼국 시대(三國時代) 때의 고루(古壘)라고 나온다.
호로탄 남북 언덕에 각각 하나씩 두개의 고루가 있다는 말이다. 기록대로 해서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1)번 北호로고루 2)번 南호로고루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언제 누가 어떠한 연유로 붙였는지 모르지만 남쪽의 호로고루를 이잔미성(二殘眉城)이라 했다.
위에서 호로고루와는 다른 계통의 이름인 자미성(紫嵋城)등의 어원이 우리리 말 잣뫼(성산)라고 밝혔다. 신라 서라벌의 옛 지명표기에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듯 잣뫼(城으로 된 山)라는 우리말, 그 소리를 한자로 표기할 때 자미(紫嵋城), 재미(財尾山)로 적었지만 다른 글자를 얼마든지 차용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잔미(殘眉)는 잣뫼의 또 다른 한자표기임에 틀림없다.
앞에 붙은 이(二)는 무슨 의미일까? 한자대로 해석하자면 ‘두(二)개의 잔미성’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첫째, 둘째,... 城에서 두 번째의 성을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초소 2초...라 부르듯 1번 호로고루 2번 호로고루라고 불러도, 그렇다고 1번 잔미성 2번잔미성으로 불러도 구별하기가 어려우므로 편의상 北岸에 있는 1번 城을 호로고루로, 그리고 南岸에 있는 성은 2번째 '잔미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이(二)를 앞에 붙여 이잔미성(二 殘眉城)이라고 이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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