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임진강 유역의 고구려요새
<http://www.paperling.net/dview/의 레포트 발췌>
Ⅰ. 머리말
한강 북안에서 임진강에 이르는 지역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서해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이러한 자연지리적 환경은 선사시대 이래로 생산과 교역 및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삼국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게 되는데, 삼국 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이후, 475년 웅진으로 천도할 때까지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 후 고구려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475년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나제 연합군이 재탈환하게 되는 551년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의 관할 하에 있었다. 백제는 551년 한강하류지역을 수복하였으나 2년 후 신라의 공격으로 이 지역을 빼앗기게 되고 삼국통일전쟁을 통하여 완전히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경기북부지역에서 고구려유적이 조사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구의동유적을 시작으로 아차산(峨嵯山) 일대와 연천군 일대의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당포성(當浦城), 은대리성(隱垈里城), 양주군, 파주시 등지에서 고구려유적이 확인되어 남한지역에 많은 고구려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고구려의 기와편과 군량미창고, 탄화미,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연천 호로고루에서는 지상구조물인 동벽은 체성벽과 치를 갖춘 고구려성벽 바깥쪽에 신라성벽이 다시 구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수 만점에 달하는 고구려기와가 출토되어 고구려기와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Ⅱ. 분포와 규모
대부분의 고구려유적은 한강유역을 포함한 경기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교통로를 따라 다시 세 개의 군(群)을 이루며 집중되어 있다.
1)몽촌토성에서 상계동보루까지 19개의 유적이 아차산을 중심으로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으며,
2)사패산1보루에서 독바위보루까지 8개의 보루가 천보산맥과 불곡산․도락산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군을 이루고, 3)아미성에서 전곡리토성까지 11개의 보루가 한탄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다른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분포양상은 보루의 배치가 교통로 장악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토적인 지배를 위해서는 성 하나 하나가 일정한 공간범위를 통제할 수 있도록 방사상(放射狀)으로 위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고구려 보루는 100~500m 간격으로 아차산 일대에서 의정부를 지나 임진강유역에 이르는 간선도로 변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구축하는 산성들이 대략 5km 정도 거리를 두고 둘레 1km 정도의 성이 구축되고 그 사이사이에 여러 개의 보루를 배치한 것과 대비가 된다. 다시 말해 고구려보루들은 평양지역으로부터 한강에 이르는 최단거리의 교통로 확보를 위하여 최소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주요 거점별 집중 배치가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 이르러서는 종적 집중도가 떨어지는 반면 횡적으로 강을 따라 가면서 주요 도강(渡江)지점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있다.
유적의 입지여건을 보면 남쪽방면의 조망이 양호하고 접근성이 좋은 곳에 구축되었다. 지정학적인 여건상 주변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고지확보를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만 비교적 높이가 높은 곳에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의 간선도로를 조망할 수 있고, 남쪽으로 넓게 시계가 확보되는 곳에 구축되었다.
또한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소규모인데, 이것들은 백제토성을 재활용한 것으로서 고구려에 의하여 구축된 남한지역의 고구려보루는 대략 200m 이하의 규모로 축조되었으며,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임진강일대의 몇몇 평지성들만 둘레 400m 이상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구조와 기능
다음으로 보루의 구조적인 측면을 보면 여러 가지 공통적인 구성요소가 있다. 구릉의 정상부에 석축으로 구축된 보루에는 치가 구축되며, 내부에 건물지와 온돌구조, 배수로, 집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붕은 갈대나 짚 같은 것으로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기와는 왕궁이나 사찰, 학교, 관청 등에만 사용되었음을 고려하면, 기능적으로 주변의 보루들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와가 출토되는 유적은 아미성과 무등리1․2보루, 두루봉 보루, 당포성, 호로고루 등 6개의 유적에 달한다. 그중 호로고루는 주변유적에 비하여 입지가 가장 양호하고, 성내에서 출토되는 고구려기와의 양이 다른 유적에 비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호로고루의 상대적인 위계가 다른 성들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된 고구려 보루중 중 호로고루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유역 일대의 고구려보루를 통제하는 전략사령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의 운영방법은 구의동유적에서 출토된 다수의 철제 농기구를 보면 추정해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곳에 주둔한 고구려 병사들이 일정기간 둔전(屯田)형태로 주변의 농경지를 경작하며 거주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들이다. 보루마다 발견되는 온돌시설과 곡식을 저장할 수 있는 대형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이 유적이 일시적인 거점 확보를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동절기를 포함한 장기적인 주둔에 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보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Ⅳ.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고구려요새
1. 고구려의 남진정책
고구려의 한강유역진출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도면2 참조) 첫 번째 단계는 4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로 고국원왕대에서 광개토대왕 즉위까지에 이르는 기간이다. 이 시기 이전부터 고구려는 낙랑․대방을 축출하는 등의 남진을 시도했으나 백제와의 교전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특히 371년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의 고전을 겪고 있다. 이시기의 접전지는 치양(雉壤: 황해도 백천)에서 수곡성(水谷城: 신계)을 잇는 패하(浿河: 예성강)선으로 백제도 청목령(靑木嶺: 개성부근)을 중심으로 관방을 설치하여 대치하였다. 이시기의 양국의 국경은 대동강에서 예성강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한강유역진출의 두 번째 단계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로, 약 1세기 동안의 기간에 양국은 예성강과 임진강유역에서 접전을 벌인다. 392년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석현성(石峴城) 등 10성을 빼앗고 임진강 하구의 관미성(關彌城: 경기도 파주)을 함락시켰다. 이후 대부분의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장수왕 67년(475)에는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고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후 한강유역은 나․제(羅․濟)연합군이 재탈환하게 되는 551년까지 76년간 고구려가 점유하였다.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장수왕 67년(475)에는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고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후 한강유역은 나․제(羅․濟)연합군이 재탈환하게 되는 551년까지 76년간 고구려가 점유하였다.
2. 한강-임진강유역의 고구려요새(堡壘)
한강과 임진강 유역 중 특히 임진강은 고구려 국경 방어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한강유역을 나제연합군에 빼앗긴 이후에도 고구려 멸망시점까지 거의 100여 년 이상 고구려가 경영하였다. 그런데도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 역시 대부분 소규모의 보루 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대규모의 성들이 대부분 예성강과 멸악산 이북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영토적인 주 방어선은 예성강 이북지역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여하튼 임진강과 한강유역의 고구려 성들이 작은 보루형태로 구축되었다고 하는 것은 신라나 백제와의 전투에 더 이상 큰 성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이 지역에 대한 항구적 영토지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보루가 배치되는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의 규모가 클 경우 축성하는데도 많은 인력과 경제적인 소모가 있어야 하지만 소규모의 인력으로 거점을 확보하면서 유사시 기마병에 의한 신속한 공수(攻守)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보루위주의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보루들은 장기간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로 확보가 목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 남북으로 연결된 보루들은 개개의 규모 면에서는 작지만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방어기지의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적은 노동력으로 축조가 가능하고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아주 능률적인 관방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고구려의 한강유역 남하 경로를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호로하(瓠蘆河)나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적성(積城)을 통하여 양주를 지나 중랑천이나 왕숙천을 끼고 남하하는 경로를 들 수 있다. 실제 이 경로와 관련하여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강을 건너기 쉬우며, 동서로 가로막힌 지형적 장애물이 없는 등 지형상의 잇점 때문에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둘째는 개성에서 바로 남하하여 임진강하구를 도하하여 파주를 지나 서울로 바로 남하하는 경로를 들 수 있다. 이 경로는 개성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라는 장점이 있지만, 임진강 하구를 도하하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는 점과 현재 이 경로와 관련하여 조사된 유적이 거의 없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앞으로의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4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이 주로 관미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경로로 생각 된다.
세 번째는 철원에서 포천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경로로 이에 대해서는 직접 고구려군의 남하 경로라기보다는 부용세력인 말갈의 남하경로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관방유적의 형태구분
-.평지성(平地城); 평지에 구축된 성
-.산성(山城); 산지나 구릉에 구축된 성
-. 포곡식(包谷式);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包容)한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山陵)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
-. 테뫼식; 테뫼식 산성(머리띠 산성)은 산의 정상부근에 머리띠를 두른 듯이 쌓은 것으로써,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른 모습이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이 해당
<표 1> 경기북부지역 삼국시대 관방유적 일람표
번호 |
명 칭 |
형태(평면형태) |
해발고도 (m) |
규 모 (둘레:m) |
축 성 재 료 |
시 대 |
비 고 |
1 |
국사봉보루 |
- |
338 |
- |
- |
삼국 |
붕괴 |
2 |
보개산성 |
포곡식(타원형) |
426 |
4,000 |
石 |
신라 |
일명 궁예성 |
3 |
고성산보루 |
테뫼식(원형) |
150 |
30 |
石 |
고구려 |
|
4 |
삼거리산성 |
테뫼식(타원형) |
110 |
360 |
石 |
삼국 |
|
5 |
무등리1보루 |
테뫼식(타원형) |
100 |
168 |
石 |
고구려 |
|
6 |
무등리2보루 |
테뫼식(원형) |
100 |
244 |
石 |
고구려 |
|
7 |
우정리성지 |
테뫼식(타원형) |
89 |
250 |
土․石 |
삼국 |
|
8 |
성동리산성 |
테뫼식(원형) |
181 |
368 |
石 |
삼국 |
일명 태봉산성 |
9 |
할미성 |
테뫼식(원형) |
80 |
87 |
石 |
삼국 |
주원리산성,소고산성 |
10 |
대전리산성 |
테뫼식(타원형) |
136 |
700 |
土․石 |
삼국 |
買肖城으로비정 |
11 |
초성리토성 |
평지성(방형) |
30 |
570 |
土 |
삼국 |
|
12 |
초성리산성 |
테뫼식(타원형) |
140 |
164 |
土․石 |
삼국 |
|
13 |
은대리성 |
평지성(삼각형) |
30 |
952 |
土 |
고구려 |
|
14 |
당 포 성 |
평지성(삼각형) |
20 |
450 |
土․石 |
고구려 |
|
15 |
수철성 |
테뫼식(타원형) |
397 |
173 |
石 |
삼국 |
일명 무수성 |
16 |
아미성 |
테뫼식(타원형) |
260 |
290 |
石 |
삼국 |
일명 할미성 |
17 |
육계토성 |
평지성(타원형) |
20 |
700 |
土 |
삼국 |
이중 토성 |
18 |
호로고루(남) |
테뫼식(원형) |
30 |
300 |
石 |
삼국 |
|
19 |
호로고루(북) |
평지성(삼각형) |
20 |
401 |
土․石 |
고구려 |
|
20 |
두루봉보루 |
테뫼식(원형) |
70 |
40 |
石 |
고구려 |
|
21 |
칠중성 |
테뫼식(타원형) |
149 |
800 |
石 |
삼국 |
|
22 |
감악산보루 |
테뫼식(원형) |
670 |
116 |
土․石 |
삼국 |
|
23 |
반월산성 |
테뫼식(타원형) |
286 |
1,080 |
石 |
삼국 |
발굴조사 |
24 |
덕진산성 |
테뫼식(타원형) |
65 |
600 |
石 |
고구려 |
일명 덕진고성 |
25 |
고모리산성 |
테뫼식(타원형) |
380 |
822 |
土․石 |
삼국 |
|
26 |
회암리보루 |
테뫼식(원형) |
190 |
22 |
土․石 |
삼국 |
|
27 |
눌목리보루 |
? |
410 |
30 |
石 |
고구려 |
|
28 |
독바위보루 |
테뫼식(원형) |
181 |
120 |
土․石 |
고구려 |
|
29 |
고장산1보루 |
테뫼식(원형) |
200 |
21 |
石 |
삼국 |
|
30 |
고장산2보루 |
테뫼식(원형) |
200 |
500 |
土 |
삼국 |
|
31 |
큰테미산보루 |
테뫼식(원형) |
219 |
550 |
- |
삼국 |
|
32 |
작은테미산보루 |
테뫼식(원형) |
158 |
105 |
石 |
삼국 |
|
33 |
천보산1보루 |
테뫼식(원형) |
229 |
40 |
石 |
삼국 |
|
34 |
천보산2보루 |
테뫼식(타원형) |
337 |
25 |
土․石 |
고구려 |
|
35 |
천보산3보루 |
테뫼식(원형) |
282 |
88 |
土․石 |
삼국 |
|
36 |
천보산4보루 |
테뫼식(원형) |
343 |
46 |
石 |
삼국 |
|
37 |
천보산5보루 |
테뫼식(타원형) |
423 |
120 |
石 |
삼국 |
|
38 |
비석거리토성 |
? |
40 |
- |
土 |
삼국 |
|
39 |
양주대모산성 |
테뫼식(원형) |
212 |
1,400 |
石 |
신라 |
발굴조사 |
40 |
불곡산1보루 |
테뫼식(타원형) |
240 |
175 |
石 |
삼국 |
|
번호 |
명 칭 |
형태(평면형태) |
해발고도 (m) |
규 모 (둘레:m) |
축성재료 |
시 대 |
비 고 | ||
41 |
불곡산2보루 |
테뫼식(원형) |
289 |
76 |
石 |
고구려 |
| ||
42 |
불곡산3보루 |
테뫼식(타원형) |
274 |
98 |
石 |
삼국 |
| ||
43 |
불곡산4보루 |
테뫼식(타원형) |
300 |
105 |
石 |
삼국 |
| ||
44 |
불곡산5보루 |
테뫼식(타원형) |
443 |
105 |
石 |
삼국 |
| ||
45 |
불곡산6보루 |
테뫼식(타원형) |
469 |
220 |
石 |
삼국 |
| ||
46 |
불곡산7보루 |
테뫼식(타원형) |
426 |
110 |
石 |
삼국 |
| ||
47 |
불곡산8보루 |
테뫼식(타원형) |
445 |
140 |
石 |
삼국 |
| ||
48 |
도락산1보루 |
테뫼식(원형) |
327 |
33 |
土․石 |
삼국 |
| ||
49 |
도락산2보루 |
테뫼식(원형) |
426 |
170 |
石 |
고구려 |
| ||
50 |
도락산3보루 |
테뫼식(원형) |
440 |
20 |
石 |
삼국 |
| ||
51 |
노고산보루 |
테뫼식(원형) |
441 |
25 |
石 |
삼국 |
| ||
52 |
봉서산성 |
테뫼식(타원형) |
214 |
1,000 |
石 |
삼국 |
| ||
53 |
월롱산성 |
테뫼식(타원형) |
119 |
1,000 |
石 |
삼국 |
| ||
54 |
오두산성 |
테뫼식(타원형) |
105 |
1,200 |
石 |
삼국 |
발굴조사 | ||
55 |
기산리보루 |
테뫼식(원형) |
553 |
64 |
石 |
삼국 |
| ||
56 |
용미리성지 |
테뫼식(원형) |
245 |
460 |
土․石 |
? |
| ||
57 |
동성산성 |
|
113 |
441 |
石 |
삼국 |
| ||
58 |
광전리산성 |
|
370 |
500 |
石 |
? |
| ||
59 |
상계동보루 |
테뫼식 |
192 |
150 |
石 |
? |
| ||
60 |
불암산성지 |
|
420 |
480 |
石 |
삼국 |
| ||
61 |
망산보루 |
테뫼식 |
32 |
- |
石 |
? |
| ||
62 |
수석리성지 |
|
82 |
141 |
土 |
? |
| ||
63 |
망우리1보루 |
테뫼식 |
280 |
35 |
石 |
고구려 |
| ||
64 |
망우리2보루 |
테뫼식 |
282 |
120 |
石 |
고구려 |
| ||
65 |
망우리3보루 |
테뫼식 |
260 |
250 |
石 |
고구려 |
| ||
66 |
망우리4보루 |
테뫼식 |
260 |
- |
石 |
고구려 |
| ||
67 |
홍련봉1보루 |
테뫼식(타원형) |
116 |
147 |
石 |
고구려 |
| ||
68 |
홍련봉2보루 |
테뫼식(타원형) |
117 |
169 |
石 |
고구려 |
| ||
69 |
아차산1보루 |
테뫼식(타원형) |
268 |
91 |
石 |
고구려 |
| ||
70 |
아차산2보루 |
테뫼식(원형) |
276 |
47 |
石 |
고구려 |
| ||
71 |
아차산3보루 |
테뫼식(타원형) |
297 |
110 |
石 |
고구려 |
| ||
72 |
아차산4보루 |
테뫼식(타원형) |
285 |
300 |
石 |
고구려 |
발굴조사 | ||
73 |
아차산성 |
포곡식(육각형) |
203 |
1,038 |
石 |
신라 |
| ||
74 |
용마산1보루 |
테뫼식(타원형) |
183 |
16 |
石 |
고구려 |
| ||
75 |
용마산2보루 |
테뫼식(원형) |
225 |
60 |
石 |
고구려 |
| ||
76 |
용마산3보루 |
테뫼식(원형) |
310 |
- |
石 |
고구려 |
| ||
77 |
용마산4보루 |
테뫼식 |
310 |
- |
石 |
고구려 |
| ||
78 |
구의동보루 |
테뫼식(원형) |
53 |
47 |
石 |
고구려 |
| ||
79 |
봉화산보루 |
테뫼식(원형) |
160 |
- |
石 |
고구려 |
| ||
80 |
시루봉보루 |
테뫼식(타원형) |
202 |
200 |
石 |
고구려 |
발굴조사중 | ||
81 |
풍납토성 |
평지성(장방형) |
15 |
3,470 |
土 |
백제 |
발굴조사 | ||
82 |
몽촌토성 |
평지성(마름모) |
43 |
2,800 |
土 |
백제/고구려 |
발굴조사 | ||
83 |
이성산성 |
포곡식 |
210 |
1,924 |
石 |
신라 |
발굴조사 | ||
84 |
행주산성 |
테뫼식 |
125 |
1,000 |
土․石 |
신라 |
시굴조사 | ||
85 |
계양산성 |
|
203 |
1,160 |
石 |
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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