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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보는 시각

백수.白水 2012. 1. 10. 15:38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파주 주월리 육계토성(上,下)

 

폭우로 고대사가 꿈처럼 펼쳐지다

 

“온조는 한수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溫祚都河南慰禮城)~.”(삼국사기 온조왕 즉위조·기원전 18년)

“‘낙랑과 말갈이 영토를 침략하므로~도읍을 옮겨야겠다(必將遷國). 한수 남쪽의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해야겠다’. 이듬해 정월 천도했다.”(삼국사기 온조왕 13·14년조·기원전 7·6년)


우리 고대사에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남하한 온조세력의 첫 도읍지다. 온조는 첫 도읍지를 도대체 어디에 세웠을까. 즉위연조에는 곧바로 한수 남쪽 위례성에 세웠다고 했지만, 13년·14년조에는 천도사실을 언급한 뒤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전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렇다면 하남위례성 이전에 (하북) 위례성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고대사의 수수께끼 ‘하북위례성


그런데 하남위례성의 위치논쟁은 한강변 ‘풍납토성’으로 사실상 결론이 난 상태다. 1997년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발견을 계기로 풍납토성이 본격조사된 덕분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8~기원전 6년까지 백제의 첫 도읍지였을지도 모르는 (하북)위례성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북위례성의 존재조차도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고 비정했다.(여유당전서 ‘강역고’) 이후 대다수 학자들은 다산이 말한 ‘삼각산 동쪽기슭’이라는 표현을 중시,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짚어갔다. 그들은 중랑천변, 즉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일대를 주목했다. 중랑천변을 따라 내려가면 한강과 만나고 그 한강 건너편에 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있으니 그런대로 일리있는 추론이었다. 게다가 이 중랑천변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토루(土壘)의 흔적이 뚜렷했다. 중곡동 일대에서는 백제시대 석실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뚜렷하게 입증시킬 만한 기록도,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93년 윤무병 당시 원광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성곽’이라는 글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슬쩍 얹어놓는다.

“풍납동토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유적이 1곳 있는데 경기 연천 적성읍 서북방에 해당되는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존재가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000 지도에는 육계토성지(六溪土城址)라고 표기되고 있다.”

전체 18쪽의 논문 가운데 반쪽도 안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강 북쪽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임진강 유역에 풍납토성과 비슷한 성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사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육계성은 주위가 7692척인 성~”이라고 언급돼 있다. 어쨌든 윤무병 교수의 언급 이후 육계토성은 서서히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육계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꿈에서도 못할 일이었으리라.


꿈처럼 펼쳐진 고대사의 세계

 

그런데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지 2014년이 흐른 1996년 여름. 이상기후에 따른 집중호우가 한반도, 특히 임진강 유역을 덮쳤다. 7월26일(340㎜)부터 시작된 집중호우는 27일(557.7㎜)과 28일(598.7㎜) 사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부었다. 3일간 내린 강우량은 연평균 강우량의 50%에 달했다.

재앙이 닥친 뒤 한달가량 흐른 8월24일 아침. 당시 향토사학자였던 이우형씨가 행장을 꾸렸다.

“범람한 물이 빠지고, 어느 정도 뒷정리가 끝나면서 혼자 임진강을 따라 나섰습니다. 맨처음 백제적석총이 있는 삼거리(연천)를 찾았는데요. 거기서 홍수로 무너져버린 사구(沙丘) 단면에서 빗살무늬 토기 같은 선사시대 유물들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후 4시쯤 육계토성을 들렀는데….”

눈 앞에 고대사의 세계가 꿈처럼 펼쳐져 있었다.

“홍수가 휩쓸고간 토성 내부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수마가 깊이 1m나 되는 땅표면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엄청난 토기편들과 철제유물들이 노출돼 있었습니다. 홍수가 마치 체질하듯 흙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유물과 유구들이 햇빛에 노출된 것이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우형씨는 급한 대로 구획을 설정한 뒤 곧바로 파주시청에 보고했다. 경기도박물관이 조사에 나섰다. 일단 조사에 앞서 ‘토기 밭’으로 일컬어질 만큼 유물이 널려있는 표토층 수습작업에 나섰다.

그러던 10월12일, 당시 답사차 현장을 들렀던 김기태씨(현 기전문화재연구원 4팀장)가 급한 목소리로 경기도박물관에 연락했다.

“우연히 주민들이 유실된 경작지를 중장비로 복토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유적이 훼손되고 있었어요.”

다급해진 경기도박물관측은 즉각 공사중지를 명령한 뒤 더 이상의 유적 파괴를 막기 위한 긴급 수습조사를 벌였다.

“빨리 조사를 진행하라”는 주민들의 민원 속에 조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파면 팔수록 유구와 유물이 쏟아지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홍수로 마구 떠내려온 지뢰가 유적 전체에 나뒹굴어 있었다. 지뢰는 널려있고, 조사면적은 넓고, 시간은 없고….

한양대박물관까지 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작지를 복구해야 수해에 따른 보상문제가 해결되는 미묘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어느 여성조사원의 ‘유적사수’


그해 발굴조사가 막바지로 치닫던 12월초, 한양대박물관이 조사를 맡았던 구역에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나타났다.

“지금 복토하지 않으면 내년 농사 망친다”는 게 주민들의 항변이었다. 당시 한양대구역의 발굴을 책임졌던 황소희 연구원(현 한양대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나섰다. 막 복토를 위한 흙을 쏟아부으려던 덤프트럭을 몸으로 막아선 것이었다.

황소희씨는 ‘차라리 나를 묻으라’는 듯 트럭 뒤에 앉아버렸다.

“방형, 여(呂)자형 주거지 바닥면이 잘 남아있는 곳이었는데 흙을 가득 싣고 온 덤프트럭이 막 쏟아부을 참이었어요. 여차하면 흙더미에 깔렸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유적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지정리반도 황소희씨 등 여성 조사원들의 죽음을 무릅쓴 ‘유적사수’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장면에서 ‘풍납토성과 육계토성이 비슷하다’고 쓴 윤무병 교수의 언급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풍납토성 발굴 때도 주민들과의 충돌로 유적일부가 훼손당하는 비운을 겪지 않았던가. 아니 풍납토성도 1925년 을축대홍수로 휩쓸려 나갔고, 일부 유구와 유물이 드러났는데, 육계토성도 96년 홍수로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았나.

 

 


임진강이 휘돌아치는 2007년 4월 말. 기자는 11년전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 고대사의 흔적들이 홀연히 펼쳐진 바로 그곳, 육계토성(파주 주월리)을 찾았다.

첫 느낌은? 실망 그 자체였다. 농사를 짓느라 땅을 갈아엎은 경작지, 그리고 성인지 둑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현장. ‘어디가 성벽안가’ 겨우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구조물(물탱크)에 올라서서 성 전체를 조망했지만 어사무사했다. 그러나 찰라의 실망감도 잠시.


데자뷰


토성 건너편 임진강을 보자 순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데자뷰라고 하던가.

그랬다. 몇 년 전 보았던 풍납토성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정말 비슷하군요.”

감탄사를 연발했다. 육계토성을 발굴한 김성태 기전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이나 백종오 경기도박물관 학예사(현 충주대 교수) 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북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강안을 따라 축조된 평지성인 풍납토성. 그리고 역시 북서쪽으로 임진강이 굽이 돌아가는 강안을 따라 축조된 평지성인 육계토성. 둘레 3.5㎞인 풍납토성과 그것의 절반 규모인 1.858㎞인 육계토성. 한강변 풍납토성은 이미 온조가 기원전 6년 천도했던 하남위례성으로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그렇다면 임진강변에 방치된 채 서 있는, 풍납토성의 아우뻘 되는 이 육계토성은…. 혹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내려와 처음으로 세운 나라(백제)의 첫 도읍지, 즉 하북위례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육계토성은 삼국사기에 나온, 13년간 이어진 백제의 도읍지?


이제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발굴단을 이끌었던 김성태씨와 백종오씨의 논문과 해설이다.

김성태씨는 육계토성 인근의 임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학곡리 적석총 등 일의대수로 이어진 백제적석총을 발굴한 주역. 그는 기원전후~1세기 적석총으로 보이는 학곡리 적석총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쓰면서 ‘하북위례성’이란 항목을 삽입했다. 한마디로 하북위례성은 임진강변에 있었을 것이며, 그 위치로 바로 ‘육계토성’일 수밖에 없다고 지목한 것이다.


5가지 이유


그는 하북위례성=육계토성일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댄다. 우선 두 성 모두 하중도(河中島)에 입지하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풍납토성의 경우 지금은 강 반대편은 평지로 돼있지만 일제시대 지도를 보면 자연 해자(垓字)처럼 돼 있다. 마치 섬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육계토성도 물길을 따라 성을 수축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두 성 모두 도강이 가장 유리한 교통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 그리고 평지성인 토성이면서 청야수성을 위한 산성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점도 꼽힌다.


알다시피 온조는 고구려계다. 그런데 고구려의 청야전술은 유명하다. 적이 쳐들어오면 주변에 적의 보급품이 될 만한 것들을 없앤 뒤 모든 백성이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적을 지치고 굶주리게 하는 전술이다.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모두 이 청야전술 덕분이었다. 지안의 국내성이 바로 그렇고, 풍납토성이 그렇다. 평지성인 풍납토성의 배후엔 남한산성이, 육계토성의 뒤에는 칠중성이 서있는 것이다.


“낙랑·말갈 때문에 천도”


또한 두 성 모두의 인접지역에 백제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도 꼽힌다. 육계토성 인근 임진강변에는 학곡리 적석총을 비롯, 삼곶리·삼거리 등 모두 7기의 백제적석총이 확인됐다. 그런데 풍납토성 인근에도 그 유명한 석촌동 고분군이 밀집돼있다. 마지막으로 토성 안에 대규모 취락지가 확인된다는 점도 같다. 풍납토성 안과 마찬가지로 육계토성 내에는 발굴단이 온몸으로 지킨 취락유적이 확인됐다는 점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육계토성 일대의 공간배치 구조는 고구려 왕도의 수법이 반영되었고, 13년후 하남위례성을 건설할 때의 모범이 되었다는 게 김성태씨의 단언인 것이다. 다른 증거들은 없을까.


온조왕은 기원전 13년 (하남)위례성 천도 불가피론을 밝히면서 “말갈과 낙랑의 위협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6년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말갈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는 등의 말갈 침입 기사가 도처에 깔려있다.

견디다못한 온조왕은 마수성이란 성을 쌓고, 목책을 세웠다. 그러자 낙랑태수가 사자를 보내 협박했다.

“혹시 우리 땅(낙랑)을 야금야금 침범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그런 협박에 굴복할 온조왕이 아니었다.

“요새를 설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정 너희들이 쳐들어 온다면 우리도 좌시하지 않겠다.”

낙랑은 말갈과 연합, 백제를 끈질기게 쳐들어왔다. 결국 낙랑과 말갈의 위협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 천도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김성태·백종오씨 등 발굴자들은 여기에도 착안점을 둔다. 한국사에서 천도라는 것은 특정의 대하천 유역에서 다른 대하천 유역권으로 공간적인 이동을 해온 게 일반적이다.


백제탄생의 비밀 담긴 곳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 이후 많은 학자들이 지목했던 한강이북(하북위례성)→한강이남(풍납토성)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 한다. 당시 백제와 낙랑의 접경이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면 자연 백제의 배후 중심지는 임진강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또한 육계토성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북방·남방세력의 침공로로 중요시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아직까지 육계토성=하북위례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육계토성은 2000년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한국고대사의 진실, 즉 백제 탄생의 비밀을 밝혀줄 열쇠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방치, 그 자체다. 얼마전 육계토성은 ‘경기도문화재’ 지정이 결정됐다. 당연히 ‘국가사적’으로 지정돼야 했지만 ‘도지정 문화재’로 격하된 것이다. 만약 육계토성이 요즘 트렌드인 ‘고구려 유적’으로 지정신청되었다면 어땠을까. 백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격하되고 있는 것인가.

 

〈경향신문 / 이기환 선임기자/ 2007-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