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 가슴에 품고, 조선의 르네상스 꿈꾸다
다산 정약용 삶의 현장(맨위부터 시계 방향) 수원 화성 창룡문 , 남양주 여유당 현판, 남양주 다산 생가, 강진 다산초당 차부뚜막, 강진 다산 초당
《 유배생활의 시련 속에서도 실학을 집대성하고 19세기 초 조선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다산은 정치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인이었으며 뜨거운 애민정신과 비판정신으로 늘 역사와 백성을 생각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과 업적이 21세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짚어보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한다. 첫 회에선 다산 유적지와 문화재를 중심으로 그의 흔적을 만난다. 》
다산 정약용을 연구해온 종교철학자 금장태 전 서울대 교수는 다산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다산은 조선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학문은 출발부터 권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험이었다.… 다산의 평생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22세 때인 1784년 이벽을 만나 천주교신앙과 서양과학에 빠져들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의 벽을 깨뜨리고 아득하게 넓고 눈부시게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게 된 점이다. 또 하나는 39세 때인 1801년부터 18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실이다.” 금 교수의 말대로 다산의 흔적은 깊고 아름답다. 우리 국토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 남양주, 아름다운 시작과 끝
다산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 인근이다. 다산은 자신의 집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정조와 새 시대를 꿈꾸었으나 정조의 승하와 함께 다산은 시련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여유당이란 당호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수원 화성, 다산과 정조의 꿈
1789년 27세에 벼슬을 시작한 다산은 1795년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그에 대한 신임이 각별했던 정조는 다산과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하나가 수원 화성 축조였다. 다산은 1792년 화성을 설계했다.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해 성의 높이나 거리 등을 측량함으로써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도록 했다. 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꾼들이 힘겹게 돌을 지고 나르는 것을 목격한 다산은 2년 뒤 거중기를 만들었다. 많은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고 싶지 않았던 다산과 정조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과학자였다. 천문 기상 의학 수학 기하학 농학지리 물리 화학 등 그의 관심사엔 한계가 없었다. 1789년 27세 때 설계한 한강 배다리는 배 60여 척을 강물에 띄우고 2000장이 넘는 널빤지를 깔아 만들었다. 배로 건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화성시 현륭원에 갈 때 이용했다. 이 모습은 화원들이 정조의 화성 행차 모습을 그린 ‘화성능행도’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 포항에서 강진으로, 유배의 시절
정조가 승하하자 정치는 급변했다. 외척이 발호하고 정치적 복수와 음모가 난무했다. 1801년 10월, 포항에 유배돼 있던 정약용이 서울 의금부로 압송됐다. ‘또 누가 나를 죽이려는가.’ 가장 큰 걱정은 폐족(廢族)이었다. 그의 편지글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 일곱 달 전 신유교옥에 연루돼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이 처형당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유배 중인데 또 무슨 일이었을까. 의금부 옥사에는 이미 정약전이 압송돼 있었다. 이른바 황사영백서사건.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실상을 비단에 적어 중국의 프랑스인 주교에게 보내려다 적발된 사건이다. 사건과 무관함이 밝혀져 죽음을 면했지만 형제는 다시 유배길에 올랐다.
○ 강진,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
강진에서 처음 자리 잡은 집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이고 4년 동안 지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을 마땅히 바르게 하는 방’이라는 뜻. 마음을 다잡고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희망의 끈으로 삼았다. 큰아들 학연에게도 편지를 썼다. “폐족일수록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느니라.”
1808년 봄 만덕산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으로 불렸다. 이 산이 좋아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정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 스님, 초의 선사와 함께 차를 즐겼다. 다산이 오갔던 길,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엔 지금도 동백나무숲과 차밭이 있다. 다산은 초당에서 1818년 해배(解配)되기까지 10년을 보냈다. 1500권의 책을 쌓아놓고 치열하게 읽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썼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등 그의 책 500여 권은 대부분 다산초당에서 태어났다. 제자 18명을 길렀고 이들과 초당에 정원을 꾸몄다.
다산초당에 가면 ‘다산동암(茶山東庵)’ 등 다산의 친필 현판을 만날 수 있다. 다산동암 건물엔 추사의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도 걸려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여긴다’는 뜻으로 그에 대한 추사의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1813년 여름, 부인 홍 씨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다. 다산은 그 비단 치마폭 위에 그리움을 흠뻑 담아 그림을 그렸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다산은 한 편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어 넣었다. ‘부인이 해진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바로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다. 매화와 참새는 그 모습이 맑으면서 처연하다. 먼 데를 바라보는 참새의 모습이 안쓰럽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이다. 다산에게 강진 유배 18년은 그리움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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