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인간의 성희(性戱)를 높이기 위한 행위와 상상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인도의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부조물에 새겨진 수많은 서로 다른 군상의 모습에서 성의 신비를 느낀다. 세기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의 카마수트라에 나오는 자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자세나 체위는 현대에 사는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성교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애무를 즐긴다. 뛰어난 상상력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렇게 많은 자세들을 그려 내지 못했을 것이다.
춘화는 어떤 동기에서 그려졌을까? 카마수트라에는 성애의 기교, 소녀와의 관계, 아내의 의무, 남의 아내와의 통정, 유흥가 여인과의 성행위 등에 관해 쓰여져 있다. 저자는 일반 시민을 성 지식의 결여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쓰인 목적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과거 출판물이 귀할 때는 춘화도는 고급 선물이었다고 한다. 하나하나 화공의 손에 의해 고급 화선지에 그려진 춘화도는 점잖은 선비조차도 침을 흘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용이 내용이니만치 대 놓고 그리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아주 친하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상대에게 보여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이런 춘화도는 성교육 구실을 하기도 했다. 별다른 성애를 가르칠 사람이 없다 보니 능히 교과서로서 소임을 다했을 만하다.
춘화를 단순히 포로노물이라고 죄악시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옛 조상들의 성문화를 엿보는 역사자료로 여 穗발상의 전환도 한 번쯤 시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혜원의 낙관이 찍혀 있는 (건곤일회도첩)은 총12면으로 되어 잇었지만,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첩 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그 반은 성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성풍속적인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외설적인 면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천박하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신첩)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전체적으로 섬약한 느낌이 들고, 인물 묘사도 갸름하게 되어 있어 혜원 풍속화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화첩은 단원의 화첩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실내에서의 성애 장면이나 성풍속적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단원의 ‘월하연인(月下戀人)’-->달 밝은 밤에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돗자리를 깔고 방사(房事)가 아닌 야외 정사를 치르고 있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 그림은 춘화라기보다는 운치 있는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실제 손으로 벌거벗은 두 남녀를 가리고 보면 아름다운 밤 풍경일밖에 전혀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배경의 정물들도 이 그림의 주제인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남녀에게로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배려돼 있다. 전체적으로 담채와 수묵이 어우러져 담담한 느낌을 준다. 당장 한 편의 시가 읊어질 듯한 서정적인 자연경관을 성희 장면과 결합시킨 그림이다.
현재 발견된 단원의 도인이 찍혀 있는 (운우도첩)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고 분첩되어 일부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 양식은 당시의 풍속화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자연 경물을 함께 묘사함으로써 소경산수 인물의 전통을 가미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물에 성적인 성격을 부여하여 인간과 자연의 생성원리가 하나라는 동양적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점은 이 화첩의 가장 큰 특징이자 우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적 유희물 이상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모든 춘화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단원 김홍도의 도장이 있는 춘화첩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자연 경물에 음양적 성격을 부여해놓고 있다. 이러한 도상적 특징은 한국 춘화에서만 발견되는 유일한 예이며, 그것은 바로 도교적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춘화의 배경으로 실내나 정원이 등장하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산수를 배경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마도 조선후기 춘화에서만 볼수 있는 현상이며, 이 그림에서 인물의 모습을 바꾸면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다. 계곡으로 피서 나온 두 남녀의 애정 행각을 다루고있는 이 그림은 나 의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최음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산수와 자연을 즐기면서 사랑을 나누는 옛 사람들의 풍류를 묘사한 풍속도처럼 보인다. 이처럼 조선시대 춘화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사상적 기반과 소경산수 인물화, 그리고 18세기에 유행한 풍속화의 양식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사회는 계층사회여서 양반과 돈 많은 거상 등을 제외하면 서민들의 인간적인 삶이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일반 서민들이 여유롭게 춘화도를 보면서 희희덕거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고, 따라서 춘화도를 감상하는 것도 양반 계층에게 국한된 풍속이 아닐까 생각된다.
휘장이 쳐진 방 안을 배경으로 중년남자와 여인이 정사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표현된 그림으로서, 마루에 놓여있는 매화나무 분재와 수선화 그리고 문방구와 책 등으로 보아 이곳은 사대부가의 사랑방이다. 이 그림은 조선후기 양반집의 실내 정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18세기 말에는 각종 분재를 재배하는 새로운 호사취미가 유행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자료이다.
지붕선과 문들의 묘사 등 사선을 많이 사용함으로서 화면에 동적인 분위기와 깊이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주인공들의 격렬한 동작과 은밀한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노골적인 광경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도색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작가의 예술적 완숙함으로 인해 장르 그림으로서의 격조를 잃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춘화는 애초에 무사의 액땜용 부적이나 여성의 성교육용등으로 쓰였고 악령을 쫓고 복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무사들이 무기를 놓아두는 곳에 춘화를 함께넣어 놓으면 무기를 꺼내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게 되어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해서 춘화를 와라이에(笑繪)라고 부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에도시대에 들어와 유행한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는 반이상이 춘화였는데 이로인해 춘화도 주술적인 용도에서 상업적인 용도가 파생되었다. 우키유에는 육필과 판화의 두가지 양식이 있으나 서민층에게 널리 퍼진 것은 판화였다.
우키요에 판화는 대부분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는 다색판화였으며 상인자본의 영향력아래에서 분업화되어 대량생산되었다. 우키요에의 특성중 하나인 극단적인 과장법과 생생한 묘사또한 춘화에도 영향을 끼쳐서 이상할 정도로 크게 묘사된 성기묘사와 과장되고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이후 서양의 미술을 받아들인 일본인들은 우키요에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게 되지만 유럽으로 대량 유출된 우키요에는 인상파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후에 자국에서 재평가받게 됬다. 또한 우키요에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을 소재로 풍자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어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시대성과 해학을 가지고 있다.
춘화는 사내와 여인의 성희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름에서부터 은유적이고도 동양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 수준있는 동양의 춘화는 잡다한 도색물과는 느낌부터 다르다. 남녀간의 交合(교합)을 그린 그림으로 雲雨圖(운우도)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春宮畵(춘궁화)라고도 했는데 그 모습이 심히 노골적이고 선정적이어서 주로 催淫(최음)의 목적으로 그렸다. 일설에 의하면 黃帝(황제)가 素女(소녀)로 부터 房中術(방중술)을 터득한 뒤부터 출현했다고 하며 호색문화가 넘쳤던 명나라 때에 크게 성행했다. 당시 仇英(구영)은 春宮畵로 유명했다.
한편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는데 그림뿐만 아니라 상아조각도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강한 유교적 윤리관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만큼 성행하지는 않았다. 춘화를 단순히 포로노물이라고 죄악시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옛 조상들의 성문화를 엿보는 역사자료로 여 穗발상의 전환도 한 번쯤 시도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모든 춘화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단원 김홍도의 도장이 있는 춘화첩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자연 경물에 음양적 성격을 부여해놓고 있다. 이러한 도상적 특징은 한국 춘화에서만 발견되는 유일한 예이며, 그것은 바로 도교적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