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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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길을

인간적 숫자는 2가 아니라 3이다.

백수.白水 2012. 8. 23. 16:16

삼라만상은 대칭적 구조로 이뤄졌다. 사람만 놓고 보더라도 좌우와 앞뒤의 대칭적 구조로 이뤄져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은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하다. 동양의 음양사상이나 서양의 선악의 윤리학은 그런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이다.

언어학자 소쉬르나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자 라캉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이항대립(二項對立)의 사고방식이라고 불렀다.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정신과 육체, 문명과 야만의 개념은 서로 짝을 이룰 때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이 자유의지가 아니라 이렇게 우리 체내에 설정된 시스템의 산물이란 점을 집중 규명했다.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은 ‘생각하는 나’로서 주체의 이성이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언어와 무의식 같은 구조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롭게도 구조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정련하는 과정에서 다시 이러한 이항대립의 개념쌍을 무수히 생산해 냈다. 소쉬르의 랑그(보편언어)와 파롤(구체적으로 발화되는 말), 시그니피에(의미)와 시그니피앙(기호), 레비스트로스의 ‘날것’(자연)과 ‘익힌 것’(문명)이나 ‘차가운 사회’(역사인식이 약한 사회)와 ‘뜨거운 사회’(역사인식이 강한 사회) 같은 개념쌍들 말이다.

같은 구조주의자로 분류되지만 라캉은 달랐다. 라캉 이론의 핵심은 상상계(The Imagery) 상징계(The Symbolic) 실재계(The Real)라는 3개의 개념쌍으로 구성된다. 상상계는 거울 속 자신에게 품는 환상으로 이뤄진다. 상징계는 언어와 법질서를 내면화한 사람들의 사회적 현실이다.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다. 이는 프로이트가 창안한 의식과 무의식의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풀어 낼 수 없었던 많은 숙제를 풀어 냈다.

우리 인간은 확실히 구조의 산물이다. 나르시시즘이 초래하는 거짓 환상(상상계)에 농락당하거나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억압하는 상징질서(상징계)에 세뇌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 구조는 열린 구조다. 상상계와 상징계에 가끔 출몰하면서 그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뒤흔드는 ‘미지의 X’, 실재계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 작동할 공간이 확보된다. 인간의 위대함도 바로 여기서 우러나온다.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속된 말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구조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추는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미지의 X를 향해 온몸을 던진 윤리적 전회(轉回)를 펼쳐 냈다.

그 첫걸음은 운명 또는 구조가 쳐 놓은 이항대립의 그물망을 찢고 나가는 것이다. 그물에 잡히지 않는 바람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지금 좌우와 진보 보수의 이분법에 사로잡힌 채 도돌이표 정치를 반복하고 있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이러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빨강과 파랑으로 구성된 이태극(二太極)의 닫힌 세계관에서 벗어나 빨강 파랑 노랑의 삼태극(三太極)으로 구성된 열린 세계관을 염원했던 우리 조상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노자는 이를 간파하고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만물로 비약하기 위한 도약의 숫자는 2가 아니라 3이다.  
< 동아 / 권재현 문화부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