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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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온 글

내려놓자. 주저함 없이 겸허하게….

백수.白水 2011. 4. 19. 19:13

 

2006년 12월에 신문에 실렸던 [정진홍의소프트파워] 12월은 `내려놓는 달` 이다.

그 때부터 출력해서 문서화일에 끼워놓고 가끔씩 읽어 보는 글이다.

일년이 다 지나가는 12월에 한번 들여다 본다면 버스 떠난 후 손드는 격.

수시로 읽오보고 새겨야 할 귀한 말이다.

 

일 년 중 가장 짧은 달은 2월이지만,

가장 빨리 지나가는 달은 12월이 아닐까 싶다. 새해를 맞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별반 해놓은 일도 없이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가는가 싶어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송년 분위기에 휩쓸려 이런저런 만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12월은 휑하니 바람소리만 내며 지나치는 무정차 버스처럼 되기 십상이다.

자칫 실속 없이 마음만 바쁜 달이 되기 쉬운 12월을 어떻게 하면

그래도 잘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얻은 작은 다짐이 하나 있다.

12월 한 달을 '내려놓는 달'로 정하고 한 해를 지내며

해묵혀 온 미움과 무관심.오기.원망.분노.다툼.시기.자만.과욕,

그리고 별다른 노력 없이 막연히 부풀려 온 기대까지 고스란히 내려놓기로 했다.

양손에 미움을 들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껴안을 수 없다.

내려놔야 한다. 한껏 포옹하고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미움을 내려놓자.

아예 마음 씀 자체가 없는 무관심은 미움보다 더 무섭다.

마음은 쓰라고 있는 것인데 무관심은 아예 마음을 쓰질 않아 마음을 죽인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마음의 독이 바로 무관심이다.

그 무관심의 안경을 쓴 삶은 결코 건강할 수 없다.

무관심의 안경을 벗어 내려놔야 한다.

우리 삶에서 오기만큼 백해무익한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것을 신념이라고 호도하며 잔뜩 쥐고 있기 일쑤다.

긴 말 필요 없이 내려놔야 한다.

얼마 전 "임기를 다 못 채우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노무현 대통령이

진정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대통령의 자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오기다.

원망을 너무 오래 들고 서 있으면 '한(恨)'이 돼 버린다.

그러니 원망이 한으로 변질돼 삶을 비틀고 대물림되기 전에 내려놔야 한다.

분노는 총구가 자신을 향해 있는 총과 같다.

그래서 분노의 방아쇠를 당기면 분노의 총알이 자신을 향한다.

 결국 분노는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그러니 분노의 총을 내려놔야 한다.

다툼은 칼자루가 아닌 칼날을 쥐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다툴수록 피를 보고 상처입게 마련이다.

그러니 쥐고 있는 칼날을 놓아 버리듯 다툼을 내려놔야 한다.

시기는 태고적부터 무리지어 살아온 인간들에게 운명처럼 들러붙은 관계의 악성 바이러스다.

시기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경쟁이 죽는다.

경쟁은 나름의 결실을 잉태하지만 시기는 그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는 불임이다.

그러니 시기를 내려놔야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일궈낸 성취가 큰 사람은 자칫 자만하기 쉽다.

하지만 나무가 지난여름의 무성했던 잎들을 낙엽으로 떨구고 그 열매를 땅 위에 내려놓듯

성취가 컸던 사람은 감격과 흥분으로 덧씌워진 자만을 떨구듯 내려놔야 한다.

그래야 내년에 다시 나무가 새 움을 틔우고 새순과 새 열매를 키워내듯

더 크고 알찬 성취의 길로 도전하며 나아갈 수 있다.

부질없는 욕심도 내려놔야 한다.

과욕의 숟가락은 자신을 냄새 나는 비곗덩어리로 만들 뿐이다.

별다른 노력 없이 거품처럼 부풀려 오기만 한 막연한 기대도 내려놔야 한다.

그래야 정직한 땀과 노력에 깃든 알찬 희망을 새롭게 들어올릴 수 있다.

이처럼 내려놓는 것은 용기다.

결단이다. 겸손에의 의지요, 또 다른 희망의 증거다.

내려놓는 것은 결코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도전의 의지요, 더 나은 것을 들겠다는 무언의 바람이다.

그릇을 비워내야 다시 채울 수 있듯이 내려놓아야 새로 들 수 있다.

결국 2006년의 마지막 한 달 동안 내려놓는 사람이

2007년 새해에 더 알차게 들 수 있다.

그러니 내려놓자. 주저함 없이 겸허하게….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