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편으로부터 장파리 금파리 늘로리 덕천리 식현리가 보이고 멀리 자작리가 흐릿하게보이는 Wide Angle 랜즈로 찍은 사진입니다.
<원본사진출처; http://cafe.daum.net/yongyeun10/CO4b/282?docid=627193316&q=%B4%AD%B7%CE%B8%AE&re=1>
파주시 파평면에 ‘늘노리(訥老里)’라는 특이한 이름의 마을이 있다.
한자로는 訥老里(눌노리)라 표기하는데 사람들은 이 마을을 ‘늘노리’라고도 하고 ‘눌노리’라고도 한다.
‘늘’이라는 한자가 있었다면 그 한자로 표기를 했겠지만, ‘늘’자가없으니 발음이 비슷한 눌(訥; 말더듬을 눌)자를 끌어다 붙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로부터전해 내려오는 이 마을의 이름은 ‘늘로리’일 수밖에 없다.
충남 아산시 염티읍(鹽峙邑)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한자로 ‘티’자가 없으니 발음이 비슷한 치(峙: 우뚝 할 치, 언덕 치)자를 끌어다가 표기한 것이다. 예전 시골마을 이름에는 ‘고리티, 증티, 갈티 ...’와 같이 ‘티’를 많이 붙였다. 우리말 ‘티’는 ‘터, 마을’을 말한다. ‘골마을, 징마을, 갈마을’인 것이다.
‘눌노리’를 풀어서 ‘말더듬이 노인’으로 지명유래를 찾을 수는 없다. 거론되고 있는 지명유래는 『늪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늠노리, 늠느리’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이 마을에 오랫동안 고을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라고 하는데 선뜻 감겨들지가 않는다.
이보다는 최근에 ‘늘노리’를 음운학적으로 풀어낸 "슭마노르"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요약하자면 『‘늘노’는 ‘너르다’는 뜻의 순우리말 [놀/nor]을 2번 중첩한 말이다. 쉽게 말해 [놀+놀] 즉[넓+ 넓]이라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원 글 내용 전부보기 ☞
http://blog.naver.com/burkurtar/70165371332
경기도 파주 늘노리의 [놀/nor]
파주문화원이 전하는 눌노리(訥老里) 유래의 전설.
『삼한강역고(三韓彊域考)에 의하면 파평면 눌노리 이 지역은 삼한시대(辰韓·馬韓·弁韓)에 마한의 영역권에 있었으며 당시 52지국중 고리국(古離國)의 고궁터로써 궁궐이 있던 곳은 궁갓, 감옥이 있던 곳은 옥담밭 등으로 지금까지 불려 내려오고 있다. 고구려 개창후에는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조에 영평현(鈴平縣), 파평현(坡平縣) 등의 고을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조 개국 후 태조 2년(1398) 서원군과 파평현이 통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 되니 폐철하게 된 지역으로 윤관장군의 애첩 현웅녀(玄熊女)가 윤관장군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낙화암(落花岩)아래 수십길 되는 연못에서 투신자살하게 되자 그 후 이 연못을 웅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부락을 웅담리로 명칭하게 되었다. 이 맑은 물이 샘내를 거쳐 눌노천을 연하여 소개울(牛津)이 임진강으로 합류되는 유서 깊은 고장이며 「오랫동안 고을이 머물러 있었다」하여 눌노리라고 명칭이 붙어졌다 한다.
파평산 서북맥 내령 끝머리 용연에서 파평윤시 시조 윤신달(尹莘達)이 탄생하여 고려 개국공신으로 활약을 하였으며 그의 손자 윤금강(尹金剛)스님은 파평산상에 금강사(金剛寺)를 건립 시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기도 추모하였으며 지금은 미타사로 개칭 16나한전에 모셔져 있다. 또한 서기 1198년 최충헌, 최충수 형제간에 정치다툼으로 아우 최충수를 죽인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고손 윤관장군은 서기 1107년(예종 2)에 도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 9개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던 무서운 장수로서 파평산상에서 윤신달이 소시절 군마훈련을 하였다는 치마대(馳馬台)가 있다.
조광조의 문인인 청송(成守琛 )선생은 중종 9년(1514) 22세 당시 부친상으로 당하여 파주 향양리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아우 절효(成字琮)와 같이 하였으며 아우 성수영이 적성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중종 39년(1544) 9월에 처가가 있는 우계연변에 집을 짓고 죽우당(竹雨堂)이라하고 지금 파산서원터에서 훈학을 하면서 파산청은(坡山淸隱) 도는 우계한민(牛溪閒民)이라는 자호를 가졌으며 여러 벼슬을 하명하여도 모두 사은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 명성이 높아 사방의 명사들이 그의 집을 찾았으나 겸손하였다 한다. 사후 문정의 시호와 우의정에 증직된 후 율곡선생의 주선으로 청송서원(廳松書院)을 건립 후 파산서원(坡山書院)으로 개칭 사액(賜額)을 받았다.
인조6년(1628)에 우계(成渾)선생은 좌참찬에 비국당상을 겸하여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유명한 학자로서 파산서당에서 64세로 돌아가시니 문간공의 시호와 좌의정에 증직 숙종 8년(1682)에 율곡선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이시다. 이러한 파산서원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 이어 전국적으로 세번째 건립된 유일한 서원으로 조선조 말엽 고종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여운영 조소항 등 고명한 정치가를 조현규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지도 배출하였던 유일한 서원이다. 또한 휴암선생의 사위 옥천(趙堪)과 옥천의 사위이며 우계선생의 아들 창랑(成文瑢), 창랑의 사위 화당을 모신 경현단(景賢壇)이 우측에 있어 매년 음력 2월 중정일에 파산서원과 병행 향사를 지내고 있다.』
늘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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