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分水合과(산분수합)과 山自分水嶺(산자분수령)
산과 물(溪, 川, 江)은 늘 같이 붙어 있으니 山水요,
고운 산과 맑은 물이 아우러져 山紫水明(산자수명)한 것이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이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으니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의 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한 것이다.<최연>’
산줄기는 갈라져 지역의 경계를 나누고, 물은 크게 모여 사람과 물자가 서로 만나니
이를 山分水合(산분수합)이라고도 한다.
실학자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산경표(山經表)에서 山自分水嶺(산자분수령)이라 했으니,
이는 곧 산 스스로가 분수령이 된다는 말이요,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명제인 것이다.
흐른다. 산도 흐르고 물도 흘러내린다.
물은 흘러내리다가 앞산에 막히면 돌아나가지만, 산이 물에 막히면 흐름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우뚝 솟은 적성(積城)땅 감악산(紺嶽山, 675m)은 높은 만큼이나 멀리 사방으로 그 줄기를 흘러내린다.
그중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지맥하나가 양주땅에서 다시 불끈 솟아올랐으니 바로 마차산(磨叉山, 587m)이다.
흐른다. 감악산도 흐르고 마차산도 흘렀다.
감악산의 동쪽자락과 마차산의 서쪽자락이 서로 만나 경계를 만들고 지역을 갈랐다.
마차산자락은 양주땅이 된 것이다.
양주(楊州)는 본래 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인 漢陽郡을 고려 태조 때 양주로 개칭한 것에서 유래란 것이다.
임진강 남쪽과 한강이북, 한성부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전곡읍, 청산면) 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탑동 제외), 구리시, 남양주시, 서울의 광진구·노원구·도봉구·중랑구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땅이었다.
마차산자락은 양주목(楊洲牧)의 가장북쪽에 치우친 변방이 되어 양주군 영근면(嶺斤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양쪽 산자락이 받아낸 물이 갈라진 틈(경계)으로 모여드니 이름이 간파천(干坡川)이다.
간파고개를 출발한 계곡물은 조그마한 지천의 물을 받아들이면서 간파리 - 늘목리 - 적암리로 北流하다가,
아마니고개 삼거리(37번국도에서 375번 지방도가 갈림)를 만나면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어유지리 앞을 直流하여 임진강으로 합류하는데 이곳이 토막포다.
물은 모여서 다시 큰물이 되고, 이곳을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면서 물길이 열리게 된다.
옛날에는 지리적여건상 물길을 따라서 교통로를 개척하는 것이 가장 용이했을 것이다.
따라서 간파천을 따라서 간파천협곡길이 만들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山自分水嶺(산자분수령)이지만,
물을 주체로 본다면 거꾸로 水自分山溪(수자분산계)의 역상(逆像)관계이기도 하다.
때로는 내와 강이 이쪽 산과 저쪽 산, 이 땅과 저 땅을 가르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임진강은 古來로 남과 북의 세력이 대치하면서 북진과 남침의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경계며 서로의 변방이었다.
따라서 이쪽에서 만들어놓은 교통로와 성곽이 때로는 적군의 공격로와 공격거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지도]
임진강유역의 고구려요새(堡壘)
한강과 임진강 유역 중 특히 임진강은 고구려 국경 방어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한강유역을 나제연합군에 빼앗긴 이후에도 고구려 멸망시점까지 거의 100여 년 이상 고구려가 경영하였다.
그런데도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 역시 대부분 소규모의 보루 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대규모의 성들이 대부분 예성강과 멸악산 이북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영토적인 주 방어선은 예성강 이북지역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여하튼 임진강과 한강유역의 고구려 성들이 작은 보루형태로 구축되었다고 하는 것은 신라나 백제와의 전투에 더 이상 큰 성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이 지역에 대한 항구적 영토지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보루가 배치되는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의 규모가 클 경우 축성하는데도 많은 인력과 경제적인 소모가 있어야 하지만 소규모의 인력으로 거점을 확보하면서 유사시 기마병에 의한 신속한 공수(攻守)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보루위주의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보루들은 장기간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로 확보가 목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 남북으로 연결된 보루들은 개개의 규모 면에서는 작지만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방어기지의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적은 노동력으로 축조가 가능하고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아주 능률적인 관방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고구려의 한강유역 남하 경로를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호로하(瓠蘆河)나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적성(積城)을 통하여 양주를 지나 중랑천이나 왕숙천을 끼고 남하하는 경로를 들 수 있다.
실제 이 경로와 관련하여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강을 건너기 쉬우며, 동서로 가로막힌 지형적 장애물이 없는 등 지형상의 잇점 때문에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둘째는 개성에서 바로 남하하여 임진강하구를 도하하여 파주를 지나 서울로 바로 남하하는 경로를 들 수 있다.
이 경로는 개성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라는 장점이 있지만, 임진강 하구를 도하하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는 점과 현재 이 경로와 관련하여 조사된 유적이 거의 없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앞으로의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4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이 주로 관미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경로로 생각 된다.
세 번째는 철원에서 포천을 지나 서울에 이르는 경로로 이에 대해서는 직접 고구려군의 남하 경로라기보다는 부용세력인 말갈의 남하경로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paperling.net 레포트 발췌>
네이버지도는 윗양원리 동편마을의 북쪽 뒷산 봉우리에 “무쇠봉 ‧ 수철성”표식을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곳은 ‘수리봉’이며 수철성은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산215, 산216에 위치한다.
수철성(水鐵城)
수철성의 성벽과 성 내부는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이나 부분적으로 성의 외벽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수철성은 현재 남아있는 성의 형태와 축조기법으로 보아 1.3km서쪽에 마주 대하고 있는 고구려계통의 산성인 늘목리‧적암리 老姑城(할미성)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성내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통일신라초기의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반원권무늬(半員圈紋)가 시문되어 있는 유개호의 덮개편이 소량 수습될 뿐 老姑城에서와 같은 고구려계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하늘나그네>
해발 589m인 마차산의 산록이 남북으로 길게 발달하면서 서쪽으로 감악산 산록사이에 협곡을 형성하고 북단에 돌출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마차산과 감악산 사이의 협곡을 따라 형성된 도로는 양주지역에서 적성이나 연천방면으로 가는 주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수철성은 이 교통로를 감제(瞰制)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수철성이 있는 해발397m 무쇠봉은 정상부가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성은 이 평탄한 정상부의 외곽을 돌아가면서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북동-남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250m 정도이며 동남쪽에는 70m 가량의 성벽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은 4m 정도이다. 반면 북서쪽부분은 성벽이 대부분 무너진 상태여서 면석이 남아 있는 부분은 없다. 수철성의 동북쪽 회절하는 부분은 마치 치성을 쌓듯이 돌출시켜 둥글게 쌓았는데, 1.8m정도의 큰 자연석을 기단석으로 하여 그 위에 납작한 할석으로 정교하게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22단 정도이다.
성 내부는 평탄하고 곳곳에 참호가 구축되어 있으며, 남쪽 정상부에는 단이 지면서 돌출되어 있어 당초 장대 등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수철성은 현재 남아있는 성의 형태와 축조기법으로 보아 1.3km서쪽에 마주 대하고 있는 고구려계통의 산성인 늘목리‧적암리 老姑城(할미성)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성내에서 기와편은 전혀 수습되지 않으며, 수습되는 유물은 통일신라초기의 회청색의 경질토기편과 반원권무늬(半員圈紋)가 찍혀있는 인화문토기 뚜껑, 고배대각, 완 등이 소량 수습될 뿐 老姑城에서와 같은 고구려계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수철성은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축성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둘레는 300m가 안 되는 소규모의 성으로 칠중성의 보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천연암벽을 이용한 서쪽면을 제외한 동 남 . 북쪽의 급한 경사면에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북벽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허물어져 석재의 일부분만이 수풀사이로 노출되어 있고, 남벽과 동벽은 붕괴되어 유실된 일부구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도 4개 부분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서고동저형(西高東低形)에 타원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전체둘레 250m,동서 90m.남북 25m 규모이다.
동쪽 끝부분, 곡성(曲城)형태의 성벽은 길이 16m, 높이 5m 규모이며 자연 암석을 기단으로 축조한 면석이 지금까지도 완전한 형태로 잘 남아 있어 축조양식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오솔길>
왜 무쇠봉이며, 수철성(水鐵城)일까?
수철(水鐵)은 우리말 무쇠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무쇠성’으로 부른다. ‘무쇠(水鐵)계통’의 지명은 전국에 제법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무쇠를 녹여 솥이나 농기구등의 주물을 만들었거나 철점이 있었던 곳에 이러한 지명이 남아있다.
둘째는 강이나 내를 끼고 있는 등 물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은 원래 ‘뭇 ․ 믓’ 등으로 발음되어 왔다. 그 例로 무쇠는 ‘믓’에 뿌리를 두고 음의 변화를 거쳐 믓 > 뭇 > 무스 > 무수 > 무쇠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무쇠 ․ 무시 ․ 무수’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남았다.
지역에서 연천군지명위원을 하셨던 우창제(禹昌濟)선생을 전곡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무쇠봉정상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물이 잘나오는 샘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서 샘물을 이용해 벼농사를 지어 벼20여 가마는 족히 나왔다고 한다.
내가정확한 샘물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무쇠성은 물과 관련이 있다고 증언해 주셨다.
그리고 전래되고 있는 할아비와 할미성에 관한 설화, 버린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고 전해지는 곳의 위치,
마을지명유래에 등장하는 여러 지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짚어 주셨다.
할아비와 할미성 설화.
아주 오래된 옛날에 할미와 할아버지가 수철성과 아미성의 정상에서 각자 성쌓기시합을 했는데, 할미가 먼저 성쌓기를 마쳤다고 한다. 이에 할아비는 할미에게 “성 돌이 부족하니 돌 좀 갖다 주시오”라고 부탁을 했다. 할미는 할 수없이 치마폭에 돌을 가득 담아 무쇠봉(수철성)으로 올라가는데, 마침 성을 다 쌓은 할아비가 할미에게 “성을 다 쌓았으니 돌이 필요 없소”라고 하자, 할미는 치마폭의 돌을 산 중턱에 버렸다고 한다. 이 설화로 인해 양원리는 할아비성, 적성(적암리.늘목리)은 ‘할미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료검토
※잘못된 내용을 빨강글씨로 표시했다.
출처 |
구분 |
아미성 |
수철성 |
비고 |
1.신증동국여지승람 |
적성현 |
東18리 |
※東쪽10리 |
|
2.신증동국여지승람 |
양주목 |
|
北쪽51리, 積城과 마주한다 |
|
3.동국지지 |
적성현 |
|
※東쪽10리 |
|
4.대동지지 |
양주목 |
|
北쪽50리, ※적성수철성과 상대 |
|
5.대동지지 |
적성현 |
|
東쪽20리, ※양주수철성 상대 |
|
6.고도서 읍지류 |
적성현 |
東北쪽18리 |
東쪽20리, ※양주수철성 상대 |
|
7.고도서 읍지류 |
양주목 |
|
北쪽50리,※적성(*)수철성 상대. |
|
8.여지도서 |
적성현 |
※동쪽10리에 수철성이 있다는 승람의 기록은 오류라 함 |
| |
9.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여지도서의 영향으로 수철성은 연천군 양원리에 있는 성으로 명기하고 있다. |
| ||
10.문화유적총람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적성현조: 阿未城(아미성)은 동쪽18리에 있으며 석축둘레1,937尺이다. 水鐵城(수철성)은 동쪽10리에 있다.
-.양주목조: 水鐵城(수철성)은 북쪽51리에 있다. 둘레 357尺, 높이 14尺으로 積城(적성)과 서로 마주 있다.
東國輿地誌
적성현조: 수철성은 현의 동쪽 10리에 위치한다.
大東地志
-.양주목조: 양주북쪽50리에 있으며 적성의 수철성과 상대한다.
-.적성현조: 수철성은 동쪽 20리에 있으며 양주 수철성과 상대한다.
古圖書 邑誌類
-.적성현조: 峨眉城(아미성)은 동북쪽18리에 있으며 둘레1,937尺이다...수철성은 동쪽20리에 있으며 양주수철성과 마주한다.
-.양주목조: 수철성은 북쪽50리에 있으며 둘레357尺이다. 적성(강무정이 폐성된)수철성과 마주한다.
*與積城(講武亭廢城)水鐵城相對. 講武亭은 무술을 연마하고 시험하는 곳이다.
輿地圖書
“여지승람에는 적성현의 동쪽10리에 수철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 현에는 이러한 명칭의 성이 없다. 양주 고적조를 살펴보면 수철성은 양주북쪽51리에 있으며 적성 수철성과 상대하고 있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본 현에 소재하고 있는 고성으로서 양주의 수철성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미성 하나일 따름이다. 수철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이 아미성인데 편찬기록자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하였다.
여지도서의 이러한 견해는 이후의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나 문화유적총람에는 수철성이 연천군 양원리에 있는 성으로 명기하고 있다.
하늘나그네의 밑그림을 바탕삼아 표시했다.
오르는 길은 375번지방도로 간파리 군부대 옆길을 올라 ‘사시나미고개’에서 능선을 타고 수철성으로
오르는 방법과, 양원리에서 대락골 오토캠핑장까지 차로 올라온 후 캠핑장 앞에서 능선을 타는 방법이 있다.
캠핑장에서 오르는 코스
오르는 도중에 건물지로 보이는 평탄지형이 있는데 석축이 엉성한 걸로 보아 옛 흔적은 아닌 듯..
온전하게 남아있는 동벽 ↓
북서쪽 성벽은 거의 대부분 무너졌다.↓
북쪽으로 멀리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도감포 쪽이다.
남서방향인 간파리 송산골쪽
동남쪽으로 화요일 아침이 보인다.
평탄한 정상부
다시 시작되는 온전한 남벽 ↓
한 바퀴 돌아 다시 동벽에 도착했다.
북서방향으로 간파천계곡의 진입로인 적암리 아마니고개삼거리다.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 (헬기장)
장남교쪽의 임진강이 보인다.
적암리 앞으로 흐르는 간파천
2009.1.6.일 ‘오솔길’의 블로그에 올라온 주춧돌로 보이는 사진. 지금은 보이지 않아
오토캠핑장 장의식 대표에게 확인해보니, 누가 장난삼아 절벽 아래로 굴려버린 것 같다고 한다.
요로에 적절하게 안내표식을 해 놓았다.
간파리로 넘어가는 사시나미고갯길
고개넘어 간파리 송산골
사시나미고개에서 본 양원리 대락골
송산골에서 본 수철성
송산골에서 본 아미성
아마니고개 삼거리에서 본 수철성
아마니고개 삼거리에서 본 아미성
'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0) | 2014.01.19 |
---|---|
1.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0) | 2014.01.18 |
[풍경] 한탄강현무암주상절리와 은대리성 (0) | 2014.01.16 |
한탄강 지질탐사 / 양원리 노천석탄맥 (0) | 2014.01.16 |
연천 수철성 오르는 길 (0) | 2014.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