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존성벽 정비구간
“저기가 북한입니다. 한 3㎞ 떨어졌을까요. 저기 보이는 곳은 북한의 선전촌이고요. 김일성 사적관도 보이고….”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엔 오두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은 통일전망대로 더 유명한 야트막한 산(해발 112m)이다.
뿌연 안개 사이로 갈 수 없는 땅 북한 관산반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썰물 때는 도섭(걸어서 건널 수 있는)할 수 있는 지점도 조금 더 가면 있어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난다 해서 교하(交河)라 했던가. 윤일영 예비역 장군의 말이 새삼스럽다.
팽팽한 남북 분단의 상징…. 1600년 전에도 그랬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쟁탈의 요소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문헌상 기록으로도 우리는 4~5세기 이곳을 무대로 대서사시를 썼던 고구려와 백제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상황을 묘사할 수 있다.
“신(臣)의 근원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臣與高句麗 源出扶餘). 하지만 쇠(釗·고국원왕)가 신의 국경을 짓밟아…, 화살과 돌로 싸워 쇠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삼국사기 개로왕조)
472년, 고구려 장수왕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 개로왕이 중국 위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장수왕은 3년 뒤 백제 수도 한성을 공략한다. 망명한 백제인이었던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은 한때의 주군이던 개로왕의 얼굴에 3번이나 침을 뱉은 뒤 죽인다. 이로써 106년에 이르는 피어린 4~5세기 고구려-백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마감된다.
개로왕의 언급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뿌리가 같은’ 부여였다. “선세 때는 옛 우의를 도탑게 하였는데…”라고 했던 개로왕의 표현대로 4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 첫 도발 이후 백제를 침략해온 고국원왕을 평양성에서 죽이면서(371년) 피나는 혈투가 이어진다. 때는 바야흐로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한 한성백제가 최전성기에 이를 무렵이었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369~390년 사이 고구려-백제전의 승자는 백제였다. 백제는 10번의 전투에서 5승1패(4번은 승패불명)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비명횡사한 아버지(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으려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복수전은 실패로 끝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대토대왕이 즉위하자(392년) 승부의 저울추가 고구려 쪽으로 기운다.
광개토대왕은 392년(광개토대왕비문에는 396년) 4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 석현성 등 10성을 함락시킨다. 그런 뒤 그해 10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인(四面峭絶 海水環繞·삼국사기)’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킨다. 관미성을 얻은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이끌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의 국성을 포위한다. 백제왕(아신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헌납하고 무릎을 꿇는다.
“지금부터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나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58개성과 700촌을 얻고는 개선한다. 아신왕은 피눈물을 흘린다. 특히 관미성을 잃음으로써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신왕은 1년 뒤 동명묘에 절하고, 제단을 쌓아 기도를 드린 뒤 진무 장군에게 특명을 내린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인데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과인은 너무 분하다. 반드시 설욕하라!”(삼국사기 아신왕조)
백제로서는 임진강 이북의 석현성 등 빼앗긴 10성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먼저 탈환해야 할 관미성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급로 차단으로 아신왕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관미성은 고구려-백제의 치열한 쟁탈의 요소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성을 수중에 넣은 뒤 전세는 급격하게 고구려로 기운다. 한성백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급기야 475년 왕(개로왕)이 장수왕의 공격에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된다. 고구려는 최전성기에 접어들었고, 한성백제의 역사(493년)는 종지부를 찍는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더는 웅비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
관미성. 바로 이 성은 고구려-백제의 치열한 106년 싸움을 상징하던 ‘사면초절 해수환요(四面峭絶 海水環繞)’의 요새인 것이다. 게다가 광개토대왕의 병신년 기사(396년)에 보이는 58개 성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인 성의 모습이 기록됐다. 하지만 관미성이 과연 어디인지는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채 설(說)만 설설 끓는 형국이었다.
강화도설(이병도·신채호)과 예성강 유역설(김성호·이마니시), 그리고 임진강·한강 교회지점설 등이 어지러이 제기되었다. 그러던 1985년. 지금의 오두산 지역 관할부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윤일영 중령이 주목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된다.
육사생도 시절부터 임진왜란 당시의 70개 전투를 줄줄 암기할 정도로 전쟁사에 관심을 많았던 인물이었다. “우연히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년) 교하편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란 문구가 있었어요. 육사시절 은사인 허선도 교수에게 보여주니 그분이 무릎을 탁 치더군요.” 관미성의 위치를 문헌상으로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자네, 이걸로 석사논문 쓰게. 대학원에 바로 들어와.” 허교수는 ‘관미성 위치고’라는 논문 제목까지 정해주면서 제자의 ‘발견’을 격려한다. 어찌 보면 ‘어이없는 발견’일 수도 있다. 사료에 분명 적혀 있는 걸 모르고 지금껏 지형 조건과 고대어의 음운체계, 고구려군의 진출 경로 등을 통한 ‘탁상공론’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이 오두산성이 통일전망대로 개발되기에 앞서 경희대 발굴팀이 지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1990년). 조사단은 이 성이 바로 관미성이란 확증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관미성일 가능성이 많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광개토대왕이 7개 방면으로, 20여 일에 걸쳐 힘겹게 공략한 후 겨우 함락시킬 정도로 ‘사면초절’하다는 점과, 밀물 때는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해수환요’의 조건에 딱 맞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오두산성 성곽보수 및 정비와 관련된 유구조사 등 몇 차례 조사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심정보 한밭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백제식 축성기법(정상부를 띠로 두르듯 쌓았고, 산기슭을 ㄴ자로 파내고 한 쪽만 석축한 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어요. 백제 기와도 나오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많다고 봅니다. 다만 고고학적인 발굴이 더 진행되고, 더 많은 백제유물이 나와야 하긴 하지만….”
지금 성을 지키는 초병의 얼굴에서 1600년 전 백제 병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불안한 정적이 흐르는 최전방 초소에서…. 건널 수 없는 강을 무시로 나는 갈매기를 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했겠지.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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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를 따라 임진각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오두산통일전망대가 보인다. 1992년 안보교육 및 북한지역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통일부에서 건립한 곳이다. 이곳을 찾는 대부부의 관광객은 전망대만 둘러볼 뿐. 주차장 아래 삼국시대 오두산성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산성안내판이 주차장 끝머리에 있긴 하지만. 무관심 또는 무지 탓으로 보기에는 부끄럽다.
성벽의 흔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06년 성벽보수 후 원형을 보존한다며 천으로 덮어버렸다. 보기에도 흉물스럽다. 차라리 그냥두지 무엇 때문에 막대한 재정을 들여가며 파헤치고 사적으로 지정까지 했을까? 특히 다른 유적에 비해 성벽은 발굴설명회가 끝나면 그 현장을 다시 묻어 버린다.
성벽이 조사팀들만의 소유물인가?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현장을 보고 싶어 한다. 그냥두면 무슨 비밀이라도 새는 모양인가? 혹 훼손염려 때문이라면 마음 놓아도 좋을 듯싶다. 유적을 아끼는 것은 조사팀만 아니다. 일반 사람들도 이제 그 정도의 기준은 가지고 있다. 1600백년의 세월을 지닌 오두산성도 천대를 받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오두산 정상(119m)을 휘감은 산성은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산성에서 보면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산성의 규모와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벽은 훼손됐다.
서쪽 가파른 곳에만 길이 30m. 높이 1m. 폭 6m 정도의 성벽이 현재 남아있을 뿐이다. 성벽만 보면 바깥쪽을 돌로 쌓은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축법을 띠고 있다.
오두산성은 위치나 주변 지형으로 볼 때 삼국사기 광개토왕(391년)에 나오는 각미성. 또는 백제본기 아신왕(393년)등에 나오는 백제 북방의 관미성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의 관미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만약 오두산성이 백제의 북방 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이라면 고구려 광개토왕이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아신왕을 치고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는 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991년 발굴조사 때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토기. 백자. 화살촉이 출토됐다.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까지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두산성은 한반도 중부의 한양과 개성의 입구를 지키는 요충지다. 옛 기록에 전혀 언급이 없다.
조선보물고적조사에는 석축의 북문과 서문이 있으며 이 성은 한강과 임진강 요충지로서 고려말엽 도성을 지키는 목적으로 축성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전망대서 빤히 보이는 북한 땅과 거리는 3km 정도다. 천수백년 전 옛 군사들의 예지가 번뜩이던 오두산성. 그곳에는 지금도 군사요충지로서 우리군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 평화는 언제 오는 걸까? <최진연기자의 우리 터. 우리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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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북상하다 보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 근처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전망대에는 오두산에 오두산성(烏頭山城)이 있었다는 문화재 표지판이 서 있다. 이 오두산성이 이른바 관미성(關彌城)이며 1994년 3월 사적 제351호로 지정된 사실도 표지판에 적혀 있다.
관미성은 오랜 세월 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온 중요한 성이다.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직접 수군으로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을 잃은 이후 백제는 계속 수세에 몰리다가 475년 한성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렇게 국가의 운명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성이었던 관미성의 위치에 관해 그간 강화도, 교동도, 예성강 하구,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 등 여러 의견이 제시돼 왔다. 이러한 주장들은 대개 부정확한 추측이거나 신빙성 없는 단정이어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현재 육군본부에 재직 중인 윤일영(육사29기)장군이 그의 석사학위 논문 ‘관미성 위치고’에서 오두산성이 관미성이라는 주장을 1986년에 발표했다.
윤장군은 1866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의 파주 교하읍(交河邑)에서 ‘오두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원래 백제의 관미성이다’라는 기록을 찾아냈다. 이러한 문헌기록의 확인 자체가 의미 있는 발견이었지만 윤장군은 군사학적 방법으로 오두산성이 관미성임을 확실히 입증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우선 광개토대왕 비문에 기록돼 있는 396년의 광개토대왕의 백제 공격 기사를 지리·전략 등의 군사학적 접근을 통해 그 기동로가 예성강∼조강∼한강∼위례성의 선상에 있음을 증명했다.
나아가 이 일대에 있는 12개의 성 중 오두산성이 ‘삼국사기’의 관미성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음’을 밝혀냈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이 백제 북방의 10개 성을 함락시켰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분석, 이 성들이 오두산성 일대에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윤장군의 이와 같은 군사과학적·전략전술적·지형지리적 분석을 통해 관미성 위치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관미성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쟁이 윤장군의 연구로 일단락되자 고고학계에서는 관미성, 즉 오두산성에 대한 조사와 발굴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오두산 지역은 4세기에 고구려의 한강 진입을 저지하는 요충지였듯이 지금도 북한이 한강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여서 민간인의 접근이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92년 경희대박물관에 의해 최초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발굴조사는 오두산 위에 전망대를 건립하기 직전 임시 방편책으로 긴급히 실시된 발굴이었기 때문에 1차 발굴조사로 끝나고 말았다. 94년 3월에 이르러 오두산성이 사적 제351호로 지정된 것도 전망대 건물 공사에 따른 훼손을 가능한 한 막아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인데 그 후 전망대 공사는 계속됐고 더 이상의 발굴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조사단은 오두산성의 윤곽과 구조를 밝히기 위해 오두산성 지표조사를 다시 실시했다. 우선 무너져 덮여 있는 산성을 실측 조사한 결과 둘레는 1200m였으며 여섯 구간에 아직도 성벽의 모습이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노출된 성벽들은 대개 잘 다듬어진 장방형의 돌을 가로로 연결해 쌓았으며 성의 높이는 1m 내외였다. 또 조사단은 동남쪽 성 안에서 새로운 건물지와 성 남쪽에서 문지(門址)도 확인할 수 있었다. 94년의 지표조사 이외에 필자는 10여 차례 오두산성을 방문, 성벽의 잔존 상태 등을 확인했다. 이러한 조사 중 발굴로 확인된 유적들을 전망대 측이 흙을 덮은 후 나무를 심어 은폐시킨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경희대박물관의 발굴조사는 전망대 공사에 따른 임시 발굴이었고 육군박물관의 조사는 지표조사였기 때문에 앞으로 오두산성에 관해 보다 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조사가 필수적이다. 비록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이지만 군도 이제는 문화재 보호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에 국방유적연구실이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끝으로 통일전망대에 관미성에 관한 조그만 전시실 또는 기념실이라도 하나 만들어 관미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나 발굴 유물, 기타 자료들을 전시함으로써 이 전망대가 북한 땅을 바라보는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라 관미성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역사적 전망대의 기능도 갖출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성벽도 일정 구간을 발굴·보전해 관람객이 직접 답사할 수 있도록 하면 교육적 효과와 동시에 관광지로서의 기능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재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前 육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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