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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태국-라오스

[31] 왓 프라깨우. 멩라이왕 동상 / 치앙라이

백수.白水 2015. 3. 19. 07:29

 

왓 푸라깨우(Wat Pra Kaew)는 언제 설립되었는지 잘 모른다. 왓 푸라깨우의 원래이름은 왓 빠이아(Wat Pa Yia)대나무 숲 사원이라는 뜻이다. 1434년 탑에 번개가 쳤고, 에메랄드불상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사원이름을 왓 푸라깨우라고 부른다. [사원입구 안내판]

 

 

 

 

 

이곳의 에메랄드불상은 복제품이다. 원 불상은 방콕에 있는 왕실사원 '왓 프라깨우'에 안치되어 있다.

 

꽃모양의 여러 장식들 <본당 내> 

 

 

 

 

 

나란히 전시된 불상들 <본당 앞>

 

 

 

 

 

 

 

 

 

 

 

 

 

 

 

파란만장한 에메랄드 불상, Phra Kaew(프라 깨우)流轉

 

태국 최고의 보물인 에메랄드불상은 폭 48.3cm, 높이(옥좌포함) 66cm의 좌불상(座佛像)으로 본래 초록빛 불상이다. 불상을 처음 본 승려가 잘못알고 에메랄드불상이라 부르게 된 것이 그만 이름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 불상은 처음 인도의 승려 가가세나(Nagasena, 那先)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불상은 당시 인도에서 발생된 내전을 피해 실론(지금의 스리랑카)로 옮겨진다.

 

그후 11세기에 이르러 버마를 통일한 바간(Bagan)왕국의 아누릇(1,0441,077)왕이 상좌부(上座部)불교 즉 소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며 스리랑카에 프라깨우(Phra Kaew)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불상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잃어버리게 된다.

 

그 후 불상은 엉뚱하게도 캄보디아의 바닷가에 있는 한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범상치 않은 이 불상은 자신들의 제후에게 바쳐졌고, 캄보디아 왕은 이 불상을 당시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던 타이족의 아유타야왕국(1,3501,767)에 선물로 바친다. 왕은 이 불상을 아유타야 왕국 캄펭펫(Khamphaengphet)왓 프라께오(Wat Prakeo)’ 사원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 불상은 아유타야가 버마의 침공을 받으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사라졌던 불상은 거의 100여년이 지난 1,434년 어느 날, 치앙쎈의 폭풍우로 씻겨 내려간 흙더미 속에서 [ 일설에는 치앙라이의 왓 프라깨우(원래 이름은 대나무사원이라는 뜻의 왓 빠이야였다.)에 있는 쩨디가 번개를 맞아 파괴되면서스투코(stucco, 하얀 회벽)로 덧칠해진 채 긴긴 잠에서 깨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석고가 벗겨지고 이 드러나자, 전설속의 에메랄드불상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후의 행로는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다. 불상은 치안센에서 당시 란나왕국의 첫 수도였던 치앙라이(Chiang Rai)로 옮겨졌다.

 

란나왕국(1,2591,558)의 삼팡켄(Samfangkaen) 왕은 이 불상을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기고자 코끼리를 세 번이나 보냈으나, 코끼리가 매번 치앙마이가 아닌 람팡으로 람팡으로 방향을 잡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1,436년 람팡에 있는 왓 프라깨오 돈타오(Wat Phra Kaew Dontao)에 모셨다. (이 불상은 1436년부터 1468년까지 32년간 이곳에 모셔졌다)

 

이 불상은 1468, 다시 란나왕국의 강력한 왕 틸로캇(Tilokat)에 의해 왕국의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겨져 왓 쩨디 루앙의 쩨디 동쪽 벽감(壁龕)에 보관되면서 치앙마이왕국의 수호상이 되었다. (1,4681,551년까지 83년 동안 보관 됨)

 

83년 동안 란나왕국을 지키던 타이민족의 수호상, 에메랄드불상은 1,552년에 타이민족의 손을 떠나 라오족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의 정세를 보면, 태국중북부지역은 란나왕국, 라오 지역은 란쌍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란나왕국의 공주와 란쌍왕국의 왕자 포티싸랏(Potthisarat)이 결혼하면서 15451548년까지 두 나라는 연합 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던 중 1551년에 란나왕국의 틸로캇(Tilokat) 왕은 아들이 없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란나왕국의 공주와 란쌍왕국의 왕자인 포티싸랏(Potthisarat) 사이에는 유일하게 한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Lao의 셋타티랏(Setthatirat) 왕이다. 란나 왕국의 각료들은 왕자를 치앙마이의 왕자로 불러들였다. 셋타티랏 왕자는 틸로캇 왕을 이어서 란나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데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1,552, 셋타티랏의 아버지인 란쌍왕국의 포티싸랏 왕이 죽자 셋타티랏은 란쌍왕국으로 돌아갔고 푸라깨우 불상도 왕국의 수도인 루앙푸라방으로 옮겨버렸다. 불상을 가지고 곧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으나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불상도 다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불상은 이때부터 무려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타이족의 손을 떠나 라오족들의 수호상으로 추앙받으며 라오스에서 보관된 것이다.

 

1,563년 버마가 라오스를 침공하자 라오의 셋타티랏왕은 비엔티안에 Wat Phra Kaew(왓 파 깨우)를 짓고, 1,565년 이곳에 에메랄드불상을 봉안했다. 지금의 라오스 프라깨우는 사원이 아니라 법당만 남아있기 때문에 호 프라깨우(Ho Phra Kaew, 호 파깨우)로 불리며, 라오스에서 영문표기는 Phra Kaew 또는 Phra Keo를 혼용하고 파께우로 발음하기도 한다.

 

타이족의 톤부리왕국(1,7671,782) 탁신왕은 버마를 내쫒아 아유타야의 옛 땅을 회복하고, 크메르지역과 라오지역까지 세를 넓혔다.

 

1779년 탁신왕은 라오의 위앙짠(지금의 비엔티엔)을 공격하여 파깨우(Pha Kaew)사원에 보관 중이던 프라께우(Phra Kaeu, 에메랄드불상)와 라오족의 보물인 황금불상 파방(Phabang)을 빼앗아 톤부리에 있는 왓 아룬(새벽사원)에 보관하게 된다.

 

그후 톤부리왕조 다음에 일어난 차끄리 왕조의 라마1세는 1784년에 왕실사원인 왓 프라께우를 건설하고 프라께우를 이곳으로 옮겨 지금까지 태국최고의 보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라오족의 보물인 파방은 1867년 라오스에 반환되어 1975년부터 루앙프라방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chanwoolee/22023130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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멩라이왕(Mengrai, 1239-1317) 동상

백만 논()의 왕국이란 뜻의 란나왕국을 건설한 멩라이왕(Mengrai, 1239-1317)은 중국위안족인 따이 위안(Tai Yuan)에 의하여 지금의 치앙쎈지역(치앙센 근처라고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에 세워진 녹양((Ngon Yang)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22세에 부왕의 뒤를 이었고, 1262년에 치앙라이에 도시를 건설하여 치앙콘, 판 등 북부타이의 분지와 작은 평야에 흩어져있던 작은 토후국가들을 통합하여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1287년 이곳 치앙마이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멩라이왕(King Mengrai)은 같은 타이족인 쑤코타이왕국의 3대왕인 람캄행왕(1277-1298), 파야오왕국의 응암무앙과 민족동맹을 맺고, 하리분짜야(현재의 람푼)지역에 있는 버마 몬족을 1291년부터 1292년까지 공격하여 하이푼차이를 멸망시켰다. 이 민족동맹은 태국역사에서 매우 중요한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는1238년 크메르제국(Empire of Kmer)의 지배하에 있던 수코타이에서 타이족장들이 크메르를 타도하고 세운 타이(Thai)족의 왕국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국의 역사를, 북부의 따이(Tai)족의 역사까지 포함하여 중국 운남성시절의 7세기경까지 소급시키며, 또한 북부의 영토도 원래의 영토로 포함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호주에 갔을 때 확인했는데... 똑 같다. ‘하와이 무궁화가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