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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태국-라오스

[32] 인도차이나반도

백수.白水 2015. 3. 19. 17:03

 

 

인도차이나반도국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버마) 중 어느 한 나라를 방문하게 된다면 개별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차이나반도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역사, 지리, 문화, 예술, 종교 등의 공통사(共通史)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별국가의 영역은 정리가 어려울 정도로 팽창과 수축 흥망성쇠 안정과 혼란을 반복하는데, 경계가 지금처럼 확정된 것은 최근세의 일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베트남은 대승불교이고 나머지 4개국은 소승불교로 불교가 곧 생활인 불교국가다. 이들 나라의 사원을 관람하면서 우리나라의 절과 참 많이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절은 순수한 불교적 색채 그대로지만, 이들 나라의 사원은 힌두교와 불교가 뒤섞여있다.

우리나라의 절에도 삼신각(三神閣)이나 삼성각(三聖閣)을 따로 두어 토속신앙을 포용한 흔적을 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철저하게 융합된 모습이다.

 

따라서 힌두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들 나라의 불교유적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처음에 올렸던 글을 다시 상기코자 한다.

 

 

百聞一見의 상관관계

 

 

 

여행을 하고 유적답사를 하면서 늘 떠오르는 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 아닌가? 백문(百聞)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직접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 맞아. 이렇게 내 눈으로 확인해 보니 듣던 것과 다르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야!”라고 찬탄을 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내가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一見百聞보다 상위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곧 백문(百聞)이 있어야 제대로 일견(一見)할 수 있다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이다.’ 여행기를 정리하다보면 어떤 것을 꼭 보고 왔어야 하는데 빠뜨려, 다시 보러 갈 수도 없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사전에 충분히 공부를 하고 다녀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해가며 정리한 인도차이나반도종교의 이해를 소략(疏略)하지만 한 편씩 따로 올린다.

 

동남아시아의 특징 

 

 

종교를 예로 들면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을 포괄하는 東北아시아는 유교 또는 대승불교 등을 공동의 문화적 요소로 보유하고 있고, 中東은 이슬람교가,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등이 포함된 아시아는 조금 복잡해져서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 좀 더 다양한 종교 또는 문화적 차이가 나타난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버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등 아세안(ASEAN) 회원국가 열 나라를 포괄하는 東南아시아는 지역의문화의 양상이 복잡한 만큼 편의상 유라시아 대륙에 연해 있는 大陸部 동남아시아(인도차이나반도)와 해안지대 또는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島嶼部 동남아시아(말레이반도)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버마가 포함되고, 후자에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등이 해당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 東南아시아에는 유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등 지구상의 주요 종교가 모두 존재한다.

 

베트남은 유교의 영향이 강하고 대승불교가 보편적이다. 전통 시대에는 유가의 경전을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 시험을 치르고 관리가 되었다. 유교가 많이 보급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베트남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해 왔는데, 이는 동북아시아적 요소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그리고 그 옆으로 이어지는 태국, 버마 등 4개국은 불교 국가적 모습이 두드러진다.

11세기경부터 시작해서 동남아시아에는 소승불교가 빠르게 퍼져 나갔는데, 이들 4개 국가에서 불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며, 일반인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촌락에는 불교 사원이 있어서 의례와 교육, 문화, 심지어는 정치의 중심지가 되며, 사람들은 불교의 가르침 속에 평생을 살고 불교적 관습에 의해서 생을 마감한다. 

 

     

동남아시아의 초기 국가

 

초기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보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특히 기록문화가 발전한 중국의 역사 내지는 지리서가 가장 유용하다. 중국에서는 '25()'라 불리는 대단한 기록물을 남겼고, 각 시대의 사서에서는 외국열전내지는 지리지를 두어 중국과 관련되거나 중국이 인식하고 있던 각 나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한서에 벌써 동남아시아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들이 나열된다. 한대는 무제(武帝, 기원전 141-87) 시기에 강력한 팽창정책을 실시했고 특히 기원전 111년에 현 광동, 광서 및 북베트남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남 비엣(Nam Viet 南越)을 멸하고 북중부 베트남지역까지 7을 설치해 내지화 작업을 했다.

 

한서의하면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에 몇 개의 주목할 만한 나라들이 중국의 이웃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위치와 성격 등을 비교적 명확히 알 수 있는 큰 국가들은 대략 기원후 1세기부터 등장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융성했던 고대 왕국들을 살펴보면, 인도의 영향은 상당히 광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동남아시아 지역에 가장 먼저 등장한 대규모의 고대국가로서 푸난(Funan)을 들고 있는데, 푸난은 약 1세기에 흥기해서 7세기경까지 존속했다고 이야기되며, 남부베트남지역과 캄보디아지역까지를 영향권 내에 두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 사이의 해상무역 중개 지점에서 발전하던 푸난은 힌두문화와 대승불교가 동시에 나타나는 인도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푸난이 쇠퇴하고 첸라(Chenla)라고 하는 크메르왕국캄보디아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유명한 앙코르 제국으로 발전했다. 12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제국이 남긴 어마어마한 유적지 앙코르와트(Angkor Wat)와 앙코르톰(Angkor Thom)이 있는 캄보디아의 시엠립(Siem Reap)에 가서 이 도시 곳곳에 산재한 건축물들을 보면, 힌두교와 불교가 절묘하게 조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베트남만 제외하고 소승불교화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인도 문화는 변용의 과정을 겪었다. 불교적인 것과 힌두교적인 것이 적절하게 섞인다거나 토착적인 요소와 결합되는 현상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에서 왕권은 신권과 동일시되는 현상 같은 것이다.

 

 

베트남은 인도의 영향에서 예외이다. 베트남 북부 지역에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영향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다가 10세기경 독립한 이후에는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곧이어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하며 중국적 요소를 현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 지역까지 전파했다.

 

베트남이 한자와 대승불교, 젓가락 등 동북아시아적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동남아시아로 분류되는 요인 중의 하나는 베트남이 인도 문명권으로 진입하고, 또 일정 부분 그 문화를 흡수했다는 것이다. 영토를 획득하고 사람들을 베트남화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부에 있던 참파나 남부에 있던 크메르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사이공 중심지를 걷다 보면 참배객들로 붐비는 힌두교사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메콩 유역에는 크메르 사원들이 많이 남아 있다. 중부에서는 참파 고탑(古塔)이라든가 사원이 그대로 남아 베트남 문화유산의 일부가 되어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푸난(Funan 扶南)이며, 푸난과 더불어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출현한 또 다른 고대국가인 참파(Champa) 등이 있다.

 

이 국가들의 공통점은 우선 대륙부의 초기 거대국가라는 점, 초기 동남아시아사의 흐름 및 문화적 특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 그러나 현재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구분하는 경계와는 많이 어긋나거나, 사라져 버린 국가여서 개별사에서 설명하기는 적당하지 않다는 점 등이다.

 

현 베트남의 북부 지역을 포괄하면서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던 남 비엣도 대략 이 범주에 들어가고, 푸난보다 이른 동남아시아 최초의 고대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남 비엣의 역사는 설립자가 중국인임이 분명하고 중심부의 위치 또한 현 중국 광주(廣州)에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초기 국가로 규정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굳이 개별사로 다루고자 한다면 남비엣(남월)과 참파는 베트남역사에서, 그리고 푸난(부남)과 첸라(진랍)는 캄보디아역사에서 다루어야 할듯하다.

 

 

 

 

 

푸난 [Funan, 부남 扶南 ]

 

푸난은 중국의 사서와 동남아시아의 비문에 역사적 실체가 함께 나타나고 다량의 유물도 출토되어 오고 있다. 국가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기원후 1~2세기경에 눈에 띄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 같다. 푸난의 중심부가 있었던 곳은 인도차이나반도 남쪽 메콩 연안으로서 현 프놈펜보다 조금 아래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캄보디아인들의 선조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힘들다. 캄보디아인들은 티베트로부터 내려온 몬 - 크메르어 계통이지만, 푸난은 말레이계 선주민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지도로 보면, 푸난 중심부가 매우 깊은 내륙 안에 위치해 있는 것 같지만, 푸난이 있었던 시절의 메콩 하류란 지금보다는 그 끝이 훨씬 짧았고, 이후 오랜 기간 퇴적물이 쌓이면서 현 위치까지 길어진 것이다. 따라서 푸난의 중심지가 되는 비아댜푸라(Vyadhapura)는 해안에서 강을 타고 들어가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고 보아야 한다. , 푸난의 주요 항구였던 옥 에오(Oc Eo)는 남중국해와 시암만에 가까웠다. 푸난은 해상 교역을 통제하고 중간 교역에 종사하면서 강력해진 국가였다.

 

'푸난'은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의 '프놈(Phnom)'과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이다.

 

푸난은 기원후 3세기 초쯤 카운딘야 계열로 내려오던 왕통을 장군 판시만(Phan Shih Man)이 차지한 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비약적으로 팽창해서 그 지배영역은 동쪽으로 현 베트남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 서쪽으로 현재의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 반도, 버마에까지 이르렀다. 말하자면 대륙부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그 지배 영역하에 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푸난이 로마나 아니면 진대(秦代) 이래 중국처럼 영토의 대제국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지배의 영역은 푸난 왕에게 복종하는 종속국들로 연결되는 범위였을 뿐이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것도 아니었다. 토착 지도자들의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되는 형태였다. 단지 "복종하지 않는 국가들은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다"(남제서(南齊書))라고 하는데서 푸난의 권력 중심과 주변부의 지배 - 복종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푸난 상류 사회에서는 인도적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조정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시바와 비슈누는 중요한 경배 대상이었다. 힌두교 문화가 전래된 이래 자연스러운 인적, 물적 교류에 따라 이곳에 불교 역시 뒤따라 전해진 것은 당연했다. 이미 3세기에 푸난을 통해서 대승 불교가 북베트남지역을 거쳐 남중국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며, 동시대 판시만 왕은 불교의 후원자였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이며 종교가 발전했고, 또 중국의 남조와 꾸준한 교류를 가졌던 푸난이 한국, 특히 백제와 직간접적인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백제사 연구자 이도학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사 내용(543)을 근거로 하여 백제가 6세기 중엽에 푸난과 교역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이도학 1996 : 41; 51-52), 당시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푸난은 대략 6세기 말경부터 쇠퇴하는데, 그것은 푸난보다 메콩 상류에 위치해 있던 첸라(Chenla)가 점차 성장하여 새로운 권력 중심부가 되면서 푸난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 첸라가 바로 유명한 앙코르 시대를 만들어 낸 주인공인데, 첸라에 대해서는 캄보디아의 역사에서 자세하게 서술하겠다. 푸난을 약화시켰던 또 하나의 세력은 푸난의 동북쪽, 현 베트남의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또 다른 왕국 참파가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참파왕국(Champa)

 

2세기 말엽~17세기 말 현재의 베트남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인도네시아계인 참족()이 세운 나라.

참인()은 옛날부터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192년경 후한(後漢)의 지배에서 독립해 중국인이 임읍(林邑)이라고 부른 참파를 건국하였다. 임읍의 세력의 중심은 현재의 빈치첸 칸남다낭성() 부근이었는데, 그 세력은 제2왕조 시대에 매우 번성하였으나 송() ·()나라의 침략을 받아 국력이 위축되었고, 4왕조가 멸망한 뒤로는 남방의 부족이 더 많이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의 문헌에는 환왕(環王) ·점파(占婆) ·점성(占城) 등의 국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0세기 이후 중국에서 독립한 베트남 역대 왕조와 격렬한 항쟁을 되풀이하였으나 베트남인의 남진을 막지 못하고, 그 제8왕조는 전레[前黎]왕조의 압력으로 이제까지 지킨 수도 인드라푸라(다낭 부근)를 버리고 남쪽에 위치한 비자야로 천도했으며, 이어 제9왕조는 리[]왕조에게 현재의 빈치첸성 북부를, 또한 제13왕조는 쩐[]왕조에게 빈치첸성 남부 칸남다낭성 근처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