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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성. 괘암

백수.白水 2015. 4. 20. 23:13

 

 

 

어제부터 내리던 봄비가 그치고 미세먼지가 사라지니 침침하던 시야가 말끔하게 맑아졌다. 웬만해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깨끗한 날, 이만하면 특별한 봄날이다. 황포돛배선착장 앞에서 호로고루 성까지 임진강변을 걸었다. 자주 걷는 길이지만 늘 새롭고 매번 정취가 다르다.

들판을 걸을 때는 늘 나 혼자서 걷는다. 사람은 어디서든 여백이 있을 때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어느 스님의 말씀마따나, 그래야 마음이 가볍고 여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느적느적 해찰을 해가며 걷는다.

 

 

 

 

감악산이 보인다. 뾰족한 송신탑 바로 오른쪽 봉우리가 감악산 정상(675m)이고, 그 오른쪽이 임꺽정봉(676.5m)이다. 정상보다도 실은 임꺽정봉이 조금 더 높다. 그 오른쪽으로 내려오며 장군봉과 멧돼지봉이 이어진다.

 

 

 

 

강은 굽이굽이 억겁의 세월을 흐르며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고, 물길로 갈린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나루터에는 흘러온 세월만큼이나 사연도 많다.

 

황포돛배선착장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장단나루라 불리던 곳으로 고려태조 왕건도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다. 장단나루는 고려시대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했던 교통로로, 고려 목종이 도망하다 피살된 곳도, 무신정권의 최충헌 형제들이 싸움을 벌인 곳도 이곳이다. 이성계는 왜구를 정벌하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이곳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공민왕을 비롯한 여러 왕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이쪽은 연천군 장남면, 강 건너 저쪽은 파주시 적성면이다. 맨 뒤쪽 산의 높은 봉우리가 자장리의 국사봉이다.

 

 

 

 

 

 

 

 

적성면 자장리

 

 

 

지금부터 27만 년 전, 강원도 평강에서 분출한 용암은 한탄강과 임진강의 옛 물길을 타고 이곳을 지나서 화산에서 115km나 떨어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화석정 앞까지 흘러내렸다. 용암은 공기와 만나 급하게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마치 논바닥이 갈라지듯 수많은 5, 6각 기둥 형태가 만들어지는데 이런 주상절리가 침식돼 수직으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가파른 절벽이 생겼다.

 

 

 

 

주변 암석 종류에 따라 현무암 사이로 강이 흐르면 양쪽이 가파른 협곡이 되지만, 강이 화강암 등 기반암과 현무암 사이를 흐른다면 현무암 쪽에만 가파른 절벽이 만들어진다. 이름하여 현무암주상절리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추가령지구대를 가리켜 들 가운데 물이 깊다고 표현했으며 철원을 두고 들 가운데 물이 깊고 검은 돌이 마치 벌레를 먹은 것과 같으니 몹시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렇게 강이 깊은 현무암협곡은 철원뿐만 아니라 한탄강 상류부터 임진강의 화석정 앞까지 이어진다. 보이는 것처럼 현무암평원은 강바닥보다 수m 수십m위에 위치하게 되므로 보를 막아서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양수펌프장을 세워 물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강바닥에도 벌레 먹은 돌이 많지만, 논밭을 깊이파면 이러한 현무암(화산석)이 쫙 깔려있다.

 

 

 

이곳이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임진적벽도(臨津赤壁圖)에 나오는 풍경이다. 양수펌프장 오른쪽 옆으로 닿을 듯 말 듯 서있는 나무가 그림에 나오는 향나무다. 물론 임진적벽도에는 양수펌프장이 없다.

 

 

 

 

 

 

이곳 강가에는 고려 때 문인인 목은 이색(1328, 충숙왕15 ~ 1396, 태조5>의 유적(卦嵒)이 구전되기도 한다. 연천 고랑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호팔경(皐湖八景)의 하나이며 적벽단풍(赤壁丹楓)으로도 불린다.

 

 

 

 

 

 

 

 

 

밭 끝에 보이는 바위! 파주 자장리 사람들이 삭녕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를 원당리 사람들은 고층바위, 혹은 고청바위라고 불렀다. 이 바위는 수십 킬로미터 상류의 삭녕에서 떠내려 왔다. 삭녕군수는 장단군수를 향해 우리 재산이니 세금을 내라고 엄포를 놓았고, 장단군수는 보관료를 내라고 응대했다. 단양의 도담삼봉과 같은 종류 전설일 뿐이지만 고려사는 장단나루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기록을 남겨 전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삭령바위 전설은 전설일 뿐...

 

토사와 석재를 퍼내고 남아있는 현무암절벽일 뿐이다.

 

 

 

 

 

물쑥 뜯으러 나온 윗집 완국이 어머님, 팔뚝만한 잉어가 강가로 나와 돌아다닌다고 호미를 들고 쫓아다닌다.

 

 

물고기 인공산란장이다,

 

 

 

석벽위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었고 푸른 강물위로 꽃바람이 분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은 가안 .

 

 

 

 

 

 

 

 

 

 

 

 

 

 

 

야생 홍도화(紅桃花)

 

 

호로고루성.

 

 

 

 

 

 

 

 

 

 

 

 

 

 

 

 

원당리 현무암절벽위에 펼쳐진 넓은 들판, 현무암절벽위에 멀리 감악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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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로 멀리 보이는 파평산

 

 

平沙落雁(평사낙안)! 백사장에 열 지어 내려앉는 아름다운 기러기 떼의 모습을 고호팔경(皐湖八景)하나로 꼽았다.

 

 

오른쪽으로 고랑포 현무암주상절리절벽이 이어진다.

 

 

 

묘소가 보인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

(麻衣太子)의 영단(靈壇)이다! 935(경순왕 9)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오른쪽 강에 면한 절벽이 괘암이다. 황포돛배는 이곳에서 회항하여 다시 선착장으로 올라간다.

자는 떨어져 나가고 없다.글자는卦嵒이 각각 가로 30cm, 세로 55cm, 眉叟는 각각 가로 20cm, 세로 25cm로 음각되어 있다.

 

 

 

「卦」의 역사

 

●괘암은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 141번지 임진강 南岸의 바위절벽에 있다.

●괘암에는 원래 고려조 이색[李穡 1328~1396.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題名하여 새긴 원본 글이 전해왔다. <아래 글 記言卷之27 下篇 山川 上 仰巖>

●이전에는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으나 1600년도 무렵에는 완전히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래 글 記言別集卷之九 卦巖題名記>

이에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 1682)16689월에 전서체로卦嵒 眉叟書라 쓰고 새겼다.

●이 암각문 역시 오랜 세월 묻혀있었는데 2001년도 현장사진연구소의 이용남소장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자는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네 글자만 남아 있었다. 탁본에 의하면 글자의 크기는 卦嵒이 각각 가로 30cm, 세로 55cm, 眉叟는 각각 가로 20cm, 세로 25cm로 암벽에 음각되어 있다.

미수가 다시 새긴 글도 350여년이 흐르는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닳아 암각의 깊이가 많이 얕아져 자획을 분간키 어렵다. 괘암은 국방부소유로 2005.5.25일 파주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된 귀한 문화유산이다.

민간인 통제지역인 임진강절벽에 위치하여 접근이 어려운 관계로, 괘암의 사진을 올리는 것도 2001년 이용남소장이후로 내가 올리는 사진이 처음인 듯하다. 이용남 소장의 탁본이 남아 있으니 이를 근거로 다시 깊게 새겨야 제대로 보존이 될듯하다.

 

 

 

산마루에 보이는 고랑포 승전전망대.

 

전망대 아래가 바로 남방한계선이다.

 

 

 

 

 

 

 

 

해자(垓字)! 지금은 배수펌프장으로 이용된다.

 

 

 

 

 

 

 

 

 

 

 

 

삼국사기에 기원전 16년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말갈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온조왕은 마수성이란 성을 쌓고, 목책(木柵)을 세웠다. 그러자 낙랑태수가 사자를 보내 협박했다.” 는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고대에 목책(木柵, 나무울타리)은 가장 유용한 방어시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