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3일(월)
개천절의 유래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로부터 시작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 고조선의 건국기록에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나온다.
개천절은 BC 2,333년에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여기서 10월3일은 역사기록에 나오는 날짜가 아니라 1년 중 수확물을 거두기에 가장 좋은 시월상달에다가
제일 길한 수인 3을 골라 붙여서 후대에 정한 것이다.
개천절이라는 이름은 1,909년 1월 5일 대종교의 나철을 중심으로 개천절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매년 경축행사를 한데서 유래되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음력 10월3일을 국경일로 제정해 경축행사를 가졌고,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수립에도 이어져
1,949년 10월1일부터 양력 10월3일이 경축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나온다.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시위환웅천왕야 장풍백우사운사....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여기서 풍백과 우사・운사를 휘하의 장수나 부족(장)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들은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을 도우셨다는...’ 제헌절노래가사(정인보)처럼
하늘이 비・구름・바람을 주관한다는
곧 비・구름・바람은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앞산인 덕숭산에는 비구름바람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며 풍운조화를 일으킨다.
구름이 비를 부르고, 바람은 비와 구름을 몰아내고...
때때로 구름인지 안개인지 비인지 분간키 어려운 瑞氣로 감싸였다가
아래로부터 위로 걷혀 올라가기도 한다.
어찌됐든 내경험에 비춰볼 때
개천절에는 거의 100%가 청천하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서론을 길게 뽑았다.
개천절이 내 결혼기념일이니까 기억을 하는 것이다.
아침에 날이 흐렸지만 식사 후 무조건 서해바다로 가자고 준비를 서둘렀다.
개천절도 기리고 결혼기념일도 기리자며...
호수처럼 파란하늘만으로도 가슴이 툭 트이는 하루였다.
앞산인 덕숭산의 서기가 걷혀 올라가더니
금세 호수같이 새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뒷산인 뒷산도 걷히기 시작한다.
집에서 서해바다 천수만의 서산 A지구방조제를 건너서 간월도까지 24km로 금방이다.
A지구방조제 안쪽이 간월호, B지구방조제 안쪽이 부남호가 된다.
여기는 서산A지구방조제, 나는 B지구방조제로 진입하지 않고 시작지점에서 우회전하여 부석사로 향했다.
도비산(島飛山)은 충청남도 서산시의 부석면 취평리와 인지면 신동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358m).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 남쪽 18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산에는 봉수가 있는데 "동쪽으로는 홍주 고구현의 성산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태안군 백화산과 호응한다."고 나와 있다.
『여지도서』에도 "군 남쪽에 있으며, 그 줄기가 서각산에서 뻗어 와 임묘(壬卯) 방향에서 떨어졌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들 사료를 통해서 이 산 이름의 역사가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 『조선지도』, 『대동여지도』에서도 관련 내용을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산에 봉수가 그려져 있고, 『대동여지도』에는 봉수와 부석사(浮石寺)가 묘사되어 있다. 산 이름의 한자가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에는 '도비산(島飛山)'이라고 나와 있고, 나머지 사료에는 '도비산(都飛山)'이라고 되어 있다. 이들 사료에서의 한자 이름에 통일성이 없어서 그런지 현재 이 산 이름의 한자에 대해서도 '도(島)'와 '도(都)'를 섞어서 쓰고 있다.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호산록』에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도비산은 군 남쪽 15리에 있다. 산 위에는 봉화대가 있고 기우석이 있다. (중략) 이 산은 홋산이다. 한 봉우리와 한 산협도 형체를 나누어 각각 믿을 만한 것이 없고 푸른 낭자와 높은 상투 같이 멀리 닿을 만하므로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오기를 '개벽하던 처음에 중국으로부터 날아왔기 때문에 도비산(島飛山)이라 했다.'고 한다. 아, 산이 어찌하여 날아올 이치가 있을까. 이치에도 없는 말이 심하다 하겠다." 이 기록은 산 이름이 먼 과거의 전설에 유래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 한국지명유래집>
절 이름 앞에는 마치 주소처럼 산 이름이 붙으니 서산의 부석사는 도비산 부석사가 된다.
안내표지판에서 통일신라시대인 677년(문무왕 17년)에 의상(義湘, 625~702)이 절을 세웠다거나 선묘낭자에 얽힌 설화 등은 모두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것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설로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柳琴軒)이 망국의 한을 품고 물러나 이곳에다 별당을 지어 독서삼매로써 소일하였는데, 그가 죽자 승려 적감(赤感)이 별당을 사찰로 바꿨고 사찰명도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섬이 마치 뜬 것같이 보이므로 부석사라 하였다고 하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일본 대마도 관음사(觀音寺)에 있는 금동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의 불두(佛頭)는 1330년(충혜왕 17)에 이 절에서 조성하여 봉안한 것인데 고려 말에 왜구에게 약탈되었던 듯하다.
이 불상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조선 초기 무학(無學,1327~1405)이 다시 지었다는 것을 1530년(중종 25)에 찬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여현(韓汝賢)이 1619년(광해군 11년)에 쓴 호산록(湖山錄)에 따르면 부석사는 앞에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고 하였다.
근대에 승려 경허(1849~1912)와 만공(1871~1946)이 머물면서 선풍을 진작시켰다고 한다.
부석사편액은 만공이 썼고, 심검당편액은 경허가 썼다고 한다. 만공이 수도한 만공토굴이 있다.
서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도비산의 부석사는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절로 보인다.
그리 멀지않은 수덕사와 연암산 천장사에 경허와 만공의 자취가 서려있고,
승려 만공이 간월암을 재 창건한 점으로 미뤄볼 때
스님들은 어느 한곳에만 머무른 게 아니라 전국을 두루 주유(周遊)하면서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경내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고목들이 부석사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본전인 극락전
어느 불자의 간절한 기구가 오랫동안 이어진다.
탑이란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이 행여 무너지지 않도록 숨소리까지 멈춰가며 공들여 쌓아 올린 것,
고달픈 중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처음엔 느티나무 화석인줄 알았는데 자연석이다. 껍질의 모양과 색상이 꼭 닮았다.
마애불앞에서 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한곳에 용왕각, 산신각, 선묘각(왼쪽부터)이 함께한다.
만공선사가 수행하던 석굴.
아치형의 자연석을 얹으니 멋진 다리가 되었다.
간월도
간월암은 간월도에 있는 암자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썰물 때는 길이 열리고 밀물 때는 섬이 되는 간월도의 간월암과 무학대사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서 태어난 무학대사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나라에서 진 빚을 갚지 못해 쫓겨 다니고 있었다.
포졸들이 대신 어머니를 붙잡아서 고개를 넘어가는데 갑자기 산기가 있었다.
그때 온 산천이 눈으로 덮여 있었는데 둘러보니 한 곳만 눈이 없어 그곳에서 해산을 하고 아기를 옷가지로 덮어놓은 뒤 태안현청으로 끌려갔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현감이 어머니를 풀어주어 다시 그곳으로 가보니 큰 학이 두 날개를 펴고서 아기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크게 감격한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고 지었으며, 그 고개를 ‘학이 돌본 고개’라 하여 ‘학돌재’라고 하게 되었다.
그 후 출가를 한 무학이 이곳 간월도에 암자를 짓고 수행을 하던 중 어느 날 문득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이 암자 이름을 간월암이라고 지었다.
간월도에 절이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안면 면장 박동래와 만공스님이 암자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연암산 천장사 법당에 있는 현판을 영인한 염궁문(念弓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아래 사진) 이번에 보니 없어졌다. 확인해보니 문을 보수하면서 떼어낸 것이라고...
연암산 천장사 법당 문 위에 경허스님이 쓴 念弓門(염궁문)이라는 글이 붙어있다.
<念弓門>은 "생각의 화살을 쏘는 문"이라 해석하는데, 번뇌와 망상을 화살에 실어 날려 보낸다는 의미로,
마음의 문으로 번뇌가 일어나면 활 쏘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라 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라는 말이다.
경허스님은 천장사에 주로 머물면서 간월암에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여행 이야기 > 국내여행.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수만∙간월도∙서해의 조망이 탁월한 연암산(燕岩山) (0) | 2016.10.07 |
---|---|
덕숭산 정상에서 정혜사로 (0) | 2016.10.05 |
여성봉 (0) | 2016.09.22 |
뒷산(449m) / 금북정맥 예산덕산 광천리 (0) | 2016.09.18 |
가야산 위성사진 (0) | 2016.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