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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추사고택과 기념관, 화암사

백수.白水 2018. 2. 12. 16:10

 

추사유적지는 추사가 태어나서 성장한 충남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고택과 묘소 기념관이 있고, 당쟁에 몰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적거(謫居)했던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추사유배지가 있으며, 1852년 함경도 북청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죽을 때까지 마지막4년을 보낸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있다.

 

2016.1서귀포 추사유배지를 다녀왔고, 추사고택은 2016.7월에 이어 다시 찾았는데 가까이에 있어서 앞으로도 자주 찾게 될 것이다.

 

 

 

http://blog.daum.net/ybm0913/4244 (서귀포 김정희유배지 2016. 1. 28)

http://blog.daum.net/ybm0913/4444  (추사 김정희고택       2016. 7. 24)                              

 

 

 

추사유적지 배치도

 

 

 

 

 

 

추사관계도 [자료:추사박물관]

 

 

 

 

 

 

추사 연보(年譜)

 

1. 가계·관력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등 백여 가지에 이른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조선조의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魯永)앞으로 출계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보덕을 지냈다.

그러나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으나, 순조의 특별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2. 금석학파의 성립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으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때는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기예(聰明氣銳)하여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같은 거유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러 점차 난숙해갔으며,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연구에 몰두하고, 금석자료의 수탐(搜探)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 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으며,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금석학파를 성립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3. 경학과 불교


한편,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수많은 청대학술의 거벽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양 대사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발(題跋)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으며,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4. 서예

 

또한, 그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바탕으로독자적인 발전을보여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올라 조맹부·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다시 더 소급하여 한(()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는데,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5. 시와 회화

 

한편,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 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화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畵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를 노출하는 문기(文氣)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을 잘 쳤는데,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고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 歲寒圖모질도·부작란 不作蘭등이 특히 유명하다.

 

6. 전각

 

··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으며,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는데, 그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 고인(古印)의 인보(印譜)를 구득하여 직접 진한(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는데,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7. 산문

 

그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같은 편지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고, 그를 통해서 내면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한글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30여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 많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며, 또 한글 서예면에서 민족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8. 평가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 阮堂尺牘(22, 1867)·담연재시고(72, 1867)·완당선생(55, 1868)이 있고, 완당선생전집(105, 1934)은 종현손 익환(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 묘

 

추사 김정희와 첫째부인 한산이씨, 둘째부인 예산이씨가 함께 묻힌 합장묘로, 비문은 후손인 김승렬이 1937년에 짓고 새겼다. 북청의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다. 죽기 전까지 글씨쓰기를 계속하였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板殿(판전)을 쓴 것이 죽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고, 제자들이 앞 다투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문을 바쳤다.

 

 

 

 

묘 앞에는 석상(石床)과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망주석에 양각된 이름 모를 한 마리의 네발동물이 특이하다.

 

 

 

 

고택 옆에 가문대대로 이용해온 우물이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 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새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추사고택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주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의 고택모습을 갖췄다. 서울에있는 월성위궁은 서울의 저택으로 김정희가 관직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던 곳이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라서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대문

 

 

 

 

 

 

 

 

바깥채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네모난 이 돌기둥은 해시계로 쓰였다. 건물전체가 동서방향으로 자리 잡은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石年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안채

 

 

 

안채는   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여성들의 거주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하는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주택구조로서, 왕실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영당(影堂)

 

 

 

 

김정희 사후 아들 김상우가 세웠다. 추사의 평생 벗인 권돈인은 영당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秋史影室(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후원

 

 

 

율곡선생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의 오죽(烏竹)처럼 이곳에도 검은 대나무가 심어져있다.

 

 

 

 

 

 

 

 

 

 

 

 

 

 

 

 

 

 

 

 

추사의 인보(印譜)

 

 

 

 

 

 

 

 

 

 

 

 

 

 

 

 

 

 

 

 

 

 

 

 

 

 

 

 

 

 

 

 

 

 

 

 

 

 

 

 

 

 

 

 

 

 

 

 

 

 

 

 

 

 

 

 

화암사(華巖寺)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228년의 느티나무로 나무 높이16m, 나무둘레 4.1m이다.

 

 

추사 필적 암각문(岩刻文)

    

 

 

용궁리마을에 있는 추사묘의 뒤편 烏石山(오석산)의 산등성이 앵무봉에 자리잡은 화암사는 추사가 어려서부터 드나들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다진 곳이다. 화암사는 김한신이 별사전으로 받은 땅 안에 있어 추사 집안의 원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화암사에는 그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이 있고, 법당을 돌아 뒷마당으로 가면 병풍바위 면에 단정한 예서체의 시경(詩境)과 반듯한 해서체의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병풍바위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350m쯤 올라가면 바위 한 면에는 소봉래(小逢萊)가 새겨져 있다.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추사가 중국 연경(북경)에 갔을 때 스승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의 집 대문 양쪽에

上見東坡舊居士(상견동파구거사) 儼然天竺古先生(엄연천축고선생)이라는 대련이 걸린 것을 보았다.

이 대련에서 추사는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이라는 문구를 떠올려 이곳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에 유려한 행서(行書로 써서 새겨놓은 것이다.

 

천축고선생댁천축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며 고선생이란 부처를 옛 선생이라 이른 말이다. 그러니 이는 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뜻인데 불가에의 친근함에 추사의 재치가 어우러진 재미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詩境(시경)은 시의 경지 또는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풍취라는 뜻으로 좋은 경치를 뜻하기도 한다. 추사가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탁본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예서로 쓴 이 글씨는 송나라시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인물인 육유의 글씨이다. 일부에서는 추사의 친필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바위는 일명 쉰질바위로 추사가 小蓬萊(소봉래) 秋史題(추사제)라 새겨 놓았다. 스승 옹방강의 집앞 석순에 蓬萊(봉래)라 쓰여진 것을 보고 자신을 작은 봉래라 이르며 여기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추사는 小蓬萊學人, 小蓬萊主人 또는 小蓬萊, 小蓬萊閣, 小蓬萊山人, 小蓬學人(등의 호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추사의 烏石山(오석산)에 대한 애정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