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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 동궐(東闕)인 창경궁과 창덕궁.

백수.白水 2018. 3. 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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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설명은 모두조선고궁포털등 문화재청의 자료에서 옮겼다.


2018.3.3(토요일) 창경궁의 동쪽에 있는 정문(홍화문,弘化門)으로 입장해서 창경궁의 명정문 명전전 함인정 경춘전 통명전을 통과 후, 함양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입장하였다.

 

창덕궁은 지리적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 일단 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돈화문,敦化門)으로 나간 후 다시 들어와 창경궁쪽으로 올라가면서 관람하는 순서를 밟았다.



동궐도(東闕圖)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왕실정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왕실정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가로 576cm 세로 273cm 이며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 1828경으로 추정된다.

 


창경궁(昌慶宮)

창경궁 포스팅 바로가기☞  http://blog.daum.net/ybm0913/2383


창경궁로를 사이에 두고 창경궁과 서울대병원이 마주하고 있다.



정문인 홍화문(弘化門):동향으로 조선 성종 15(1484)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1616)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금천(禁川)과 그 위에 놓인 옥천교를 건너면 명정문(明政門)이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명정문(明政門):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명정문(明政門)과 앞마당에 있는 품석(品石):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곳은 임금님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1544년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명정전(明政殿)내부: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오봉도의 병풍이 놓였다.



명정전(明政殿)천정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창덕궁(昌德宮)

문화재청 창덕궁 가기 http://www.cdg.go.kr/default.jsp





 1.돈화문일원  2.인정전 일원  3.선정전일원  4.희정당  5.대조전 일원  6.성정각 일원  7.궐내각사    

 8.구 선원전 일원  9.낙선재일원  10.부용지와 주합루  11.애련지와 의두합  12.연경당  13.존덕정 일원 

14.옥류천 일원 15.신 선원전 일원  16.후원입구



돈화문(정문) 매표소



돈화문(敦化門:보물 383):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문에서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다.

궐내각사는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관청으로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궐내각사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8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 높이 15~16m,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돈화문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금천(禁川)을 건너 진선문(進善門)을 통과해야 본전인 인정전으로 갈 수 있다



금천(禁川)위에 놓인 석교를 건너 진선문(進善門)으로 들어간다.



진선문(進善門)에서 쭉 걸어 나가면 숙정문(肅靖門)이 나오고, 왼쪽으로 보이는 인정문(仁政門)으로 들어가야 창경궁의 본전인 인정전(仁政殿)이다.



숙정문(肅靖門)을 나서면 후원과 낙선재로 갈 수 있다





인정문(仁政門:보물813)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인정전(仁政殿:국보225)은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 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광해 2)에 재건, 1803(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정전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선정전(宣政殿, 보물 제814):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보물 제 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정전 내부



성정각 일원



이곳으로 가면 왕실정원(宮苑)인 후원(後苑)으로 가는 길이다.

비원(祕苑) 또는 금원(禁苑)이라고도 하는데 시간부족으로 구경하지 못하고 다음기회로 미뤘다.



낙선재로 가는 길










낙선재(樂善齋)(보물:1764):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낙선재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낙선재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이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다


낙선재의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며,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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