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18년 온조왕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우고 오늘날 송파구 일대에 첫수도‘한성’을 건설하여, 475년 공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서 493년간 21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한성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는데 북성은 평지에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風納土城), 남성은 남한산줄기 끝자락을 다듬어 흙을 쌓은 몽촌토성(夢村土城)이다.
여기 석촌동과 가락동·방이동일대에는 백제왕실과 귀족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석촌동고분군은 한강변 충적(沖積)대지에 위치한 백제시대초기의 돌무지무덤으로, 1911년 처음조사가 이루어졌고, 1916년 조사에서 흙무덤(封土墳)23기 돌무지무덤(積石塚)66기 합하여 89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석촌동(石村洞)이라는 마을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또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고분 외에 조사와 발굴을 통해 널무덤(土壙墓)12기·독무덤(甕棺墓)6기·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2기 ·토광적석묘(土壙積石墓)1기·돌덧널무덤(石槨墓) 1기가 산재해 있음이 확인되었었지만, 개발로 파괴되고 복원에서 빠지는 바람에 지금은 그저 8기의 무덤만이 남아있다.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촌동 백제초기 돌무지무덤은 백제건국세력이 고구려계 이주민임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증거로 석촌동일대에서 돌무지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3세기 중엽 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백제가 본격적인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은 시기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3호 돌무지무덤은 밑변50m 높이4.5m의 거대한 규모로 4세기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 가운데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은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이주민이 백제의 최고지배세력을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은 돌무지무덤 내부를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돌 대신 흙을 채운 것이 아니라 기존 분구묘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의 요소를 채용한 것이다.
2호분의 시굴조사를 통해 2호분이 기존의 나무널을 가진 소규모 무덤을 포함하여 새로이 대규모의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4호분 역시 기존의 분구묘를 다듬어서 돌무지무덤으로 만든 특수한 무덤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제식 돌무지무덤의 주인공들이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내려오기 전부터 분구묘를 사용하였던 현지의 선주민이었음을 말해주는 한편 고구려계 이주민에 의해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가 건국과정에서 마한으로부터 동북 백여 리의 땅을 빌었다는『삼국사기』기록을 감안해보면 한강유역에서 백제 건국 이전부터 분구묘를 사용하고 있었던 선주민들은 넓은 의미에서 마한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식 돌무지무덤을 비롯한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들은『삼국사기』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
공원으로 조성된 규모는 1만7천여 평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도심 속 고도처럼 외롭고 쓸쓸하지만, 고대유적과 현대식도시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서 1,500∼2,000여 년 전 옛 백제 영욕의 역사를 그려보며 감회에 젖는다.
무덤의 분류와 용어정리
■ 묘(墓): 작은 규모의 무덤
■ 릉(陵) : 주인이 밝혀진 왕과 왕비의 무덤
■ 총(塚): 주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른 무덤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유물이 발견된 규모가 큰 무덤
■ 분(墳): 무덤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특이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규모가 큰 무덤
널무덤: 아래와 같이 세분하지만 통칭하여 ‘널무덤’으로도 부른다.
1.토광묘(土壙墓, 움무덤) [壙: 구덩이, 움] 땅 구덩이에 시체를 직접 묻는 가장 단순한 무덤.
2.목관묘(木棺墓, 나무널무덤) 나무로 만든 널에 시체를 넣은 뒤 흙을 쌓아 올린 무덤.
3.목곽묘(木槨墓, 나무덧널움무덤) [槨: 바깥 관(外棺), 덧(거듭)널] 널 + 널
나무덧널(목곽)을 만든 다음 그 안에 1~2개의 나무널(목관)을 놓고 흙을 덮어 봉토를 올리는
무덤. 안쪽이 관이고 바깥쪽 관을 곽이라고 함.
봉토분 (封土墳·封墳 흙무덤) [封: 쌓다, 올리다] [封土: 흙을 둥글게 쌓다] 흙을 둥글게 쌓아올려 만든 무덤
즙석봉토분 (葺石封土墳) [葺: 기울 즙, 기울 집] [즙석葺石: 돌을 이다. 돌을 얹다]
매장주체부가 지상에 있으며, 무덤 분구(墳丘)를 돌로 덮어 만든 무덤을 지칭하는 말이다. 땅 속에 여러
구덩이를 판 후 시체를 나무관이나 항아리관에 넣어 묻고, 봉분을 둥글게 쌓은 후, 돌을 초가지붕처럼
덮은 형태의 무덤이다.
적석총 (積石塚, 돌무지무덤) 돌널 위에 흙을 덮지 않고 돌을 쌓아 올린 무덤
옹관묘 (甕棺墓, 독무덤 독널무덤) [甕: 항아리, 독] [ 棺: 관, 널]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은 무덤.
석관묘 (石棺墓, 돌널무덤) 관이 나무가 아닌 돌로 되어있는 무덤
석곽묘 (石槨墓, 돌덧널무덤) 나무관(木棺) 바깥에 돌곽(石槨)을 두른 무덤.
적석묘 (積石墓, 돌무지무덤)
무지 = 무더기, 더미 돌을 쌓아올린 무덤.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 나무관 + 나무곽 + 돌무더기. 신라금관총 등
전축분 (塼築墳, 벽돌무덤) [塼(전): 벽돌] 백제무령왕릉 벽돌로 쌓은 무덤
석실분 (石室墳, 돌방무덤) 돌로 방을 만들고 관을 넣은 무덤. 석곽묘는 방(室)이라고 할 만큼 넓지 않다.
횡혈식 (橫穴式石室墳, 터널(굴)식돌방무덤) [횡혈(橫穴): 굴, 터널] 굴(터널)을 만들고,
그 속에 돌방을 만들어 시체를 안치한 무덤
수혈식석실분 (竪穴式石室墳, 구덩식돌방무덤) [수(竪): 세우다, 세로] 아래로 파고 내려가 돌방을 만들고
시체를 안치한 구덩식돌방무덤. 횡혈식석실분과 반대 개념.
횡구식석실묘 (橫口式石室墓, 앞트기식돌방무덤) [橫口= 굴 입구] 횡혈식석실묘처럼 굴을 깊이 파지
않고 앞트기정도로만 판 것.
수혈식석곽묘 (竪穴式石槨墓, 구덩식 돌덧널무덤) 수혈식석실분(구덩식돌방무덤)이 방을 만든 것이라면,
수혈식석곽분은 돌로 덧널(석곽)을 만듦.
고분분포도
5호분 ▼
제5호분은 지름17m 높이3m 의 원형 봉토분이다. 이 고분에서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봉토분에서 정비 복원 할 때 내부조사 는 하지 않고 봉분의 흙을 쌓은 방식만 확인 하였다. 봉분을 흙을 다져 봉긋하게 쌓았으며 그위에 강돌과 막돌로 한 겹 덮은 다음에 다시 흙을 얇게 덮은 특이한 형식 무덤으로 이을 즙석봉토분 이라고 부른다.
한강유역 즙석봉토분의 대표적인 사례는 제5호분의 동북쪽 수십미터 지점에 위치한 가락동 제1,2호분이다.
1969년 두무덤을 발굴 조사한 결과 하나의 봉분안에 여러개의 나무 널과 독널을 각각 묻은 흙무지무덤으로 밝혀졌다.
석촌동 제5호분도 같은 구조로 추정된다 즙석봉토분의 게통에 대해서는 토착민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적 요소가 가민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봉분 만들고 지상에 주검 안치 공간을 둔 마한의 문화전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 ▼
A호 적석총 또는 외방내원형 적성총이라 한다. 안쪽 지름이 11,4m 흙무지 봉분이 있고 걷모습 한변길이가 16m 인 직사각형 계단식돌무지 무덤이 었다는게 추정된다. 신라무덤에서 볼 수 있는 둘레 돌이 호석처럼 안쪽에 두근 원모양 네모 모양 열을 지은 깬돌이 봉분자락에 놓여있었다.
그 바깥 자갈돌과 네모 모양 열을 지어 가지런히 놓인 테두리의 깐돌을 주변 1,2,3,4 호분처럼 게단식 돌무지무덤 흔적으로 보인다 . 1987년 발굴조사 돌무덤 3기와 돌무지 움무덤 2기의 뚜렷한 윤곽이 안쪽 바닥면에서 발견되었으나 돌무지 무덤이 파괴된 뒤에 나중에 만들어진 무덤일 수 있어서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 관련성은 분명하지 않다.
무덤 안과 밖에서 각종토기 조각 손칼 쇠못 꺽쇠등 철기 만이 출토되었지만 모두 교란층이어서 관련 유물인지는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제1호분 ▼
1호분은 북분과 남분이 연결된 전체 길이 22.3m 규모의 쌍분이다.
남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지만 북분은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다.
1987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남분의 돌덧널[石槨]에서 귀후비개로 추정되는 은제품이 출토되었다.
1987년 발굴당시의 모습
3호 움무덤 ▼
이 움무덤은 길이208m, 너비58cm, 깊이 26cm의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직사각형으로, 장축은 동북 - 서남방향이다. 2호움무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바닥시설은 없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짧은목 단지1개가 놓여 있었다. 원래 있었던 움무덤을 방수보호시설로 덮고, 바로 그 위 50cm 지점에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분군 남쪽에서 북쪽으로 2호분 – 4호분 – 3호분이 이어지고 그 뒤로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2호분 ▼
2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17m 내외의 규모이고 3단을 이룬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서 1987년에 이루어진 시굴조사 때 나무널[木棺]1기에서 단경호(短頸壺)와 철도자가 출토되었다.
제2호 고분은 1985년 석촌동 백제고분군 정비 계획에 따라 복원 되었다. 그전에는 돌로 덮힌 봉우리 모습으로 주변에 민가와 돌담장이 세워져 있었고 겉모습은 돌무지 무덤이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백제식 돌무지 무덤이다.
원래 흙무지 무덤이던 것을 나중에 돌무지무덤으로 겉모습을 바꾼 제4고분과 달리 처음부터 내부을 흙으로 채우고 겉에만 돌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발굴조사 당시 돌무지는 기단부의1m 정도가 내부의 흙무지는 높이3,8m 정도 남아 있었다.
이를 토대로 3단의 계단식 돌무지을 복원하였다.
서북쪽 모서리 지점에서 나무널 1기가 발견 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든것이다.
이를 통해 흙무지 널 무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널 무덤과 서남쪽 봉분안에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굽다리접시와 곧은입항아리 가 출토되었다.
발굴당시모습
4호분 ▼
4호분은 3단으로 구성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다. 한 변의 길이는 17.2m이고, 전체 높이는 2.1m이다.
1974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3단 정상부에 굴식 돌방[橫穴式石室]이 윤곽만 상징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1984년에 이루어진 정비복원을 위한 조사에서는 돌방의 윤곽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기존의 분구묘(墳丘墓)를 다듬어서 돌무지무덤으로 만든 특수한 무덤임이 밝혀졌다.
제4호고분은 맨 아랫단 길이가 17m 가량인 사각형의 3단으로 된 게단식 돌무지 무덤이다.
겉모습은 완전한 돌무지 무덤이지만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 있어서 전통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는 다른 백제식 돌무지 무덤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4년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는 제3단에 동서 4,6m 남북4,8m 정사각형돌방과 너비2m 가량의 널길을 윤곽만 상징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1984년정비 복원을 위한 제조사에서 원래 진흙을 다져 쌓은 흙무지무덤이던 것을 겉 모습만 돌무지 무덤으로 바꾼것으로 확인하였다.
주검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저 쌓은 지점 3군데서 따로따로 확인되었다.
무덤안에는 특별한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돌무지 속에서 벽돌 토기 기와등 조각 발견되었다.
돌을 쌓은 방식으로 보아 돌방무덤을 만들려고 한것으로 4~5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된다.
1984년 발굴당시 모습
고분군 아래로 지하철9호선지하차도가 지난다. 석촌고분역쪽이다.
3호분 ▼
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으로서 3단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몇 단이 더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83년에 이루어진 시굴조사에서는 3단 외곽에서 부장곽으로 추정되는 돌덧널이 조사되었으나 이미 도굴된 상태였으며 주변에서 4세기대의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1986년에 이루어진 기단부 조사를 통해 가로 50.8m, 세로 48.4m 규모임이 확인되었으며 금제영락과 옥연마석 등이 출토되었다. 규모와 시기로 보아 4세기 후반 백제근초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1984년 발굴당시 모습
2호 움무덤 ▼
이 움무덤은 원래 이곳에서 북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서 조사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 재현한 것이다.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그 안에 널을 넣어 묻은 움무덤은 인류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무덤이다.
이곳 고분군에도 돌무지무덤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집단 움무덤과 대형움무덤 등이 있다.
이 움무덤은 동남동 - 서북서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이다.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무덤 안 동쪽바닥에서 회백색의 짧은목 단지 1개가 놓여 있었으며, 움안에서는 지름 1.6cm 크기의 민고리 금귀고리 1개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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