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석촌동 백제고분군 (1982. 6) <우>아래를 지하(地下) 터널화한 후 유적을 복원한 모습 백제 전기(기원전 18~475) 수도였던 한강 유역 광주에는 원래 많은 피라미드형 돌무지무덤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몇 기만 남았다.
풍납토성을 말하기 전에 잠시 석촌동(石村洞) 백제 전기 백제 수도 유적을 조사하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는 원래 돌이라고는 나오지 않는 넓은 충적평야, 즉 광주(廣州) 평원이다. 그런데도 돌이 많이 있다 하여 일명 돌마리·돌마루·돌마을·석촌(石村)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석촌동 언덕배기는 원래 5개의 작은 산처럼 돌무더기가 쌓여 있어 일명 오봉산(五峯山)이라고 하던 곳이다. 이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89기의 백제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한강 하류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약 500년[기원전 18~475] 가까이 수도로 삼으면서 전기 백제인들이 축조한 무덤들이다. 그러나 강남이 개발되면서 파괴는 더욱 심해져서 이제는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강 유역은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처음 나라를 세운 후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밀려 공주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500년 가까이 수도였다. 석촌동 제4호 고분은 축조방법이나 네 면에 이른바 호석을 세운 것까지 고구려의 묘제를 닮았다.
198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강남에 노폭 25m의 큰길[지금의 백제고분로]이 뚫리고 국가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된 백제 전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3, 4호 고분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남한지역에서는 돌로 쌓은 유일한 피라미드식 무덤이 잘리고 주변의 백제 유적이 인멸되고 심지어는 당시의 인골이 포클레인의 삽날로 교란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1) 이 같은 일이 대명천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저자는 선배, 동료 교수, 언론인들과 함께 세미나를 개최하고 한편, 청와대와 정부에 건의하면서 4년여 동안 보호운동을 벌였다. 문공부 허문도 차관, 청와대 신극범 보좌관의 협조로 마침내 1985년 7월 1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정부는 519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복원 보존비를 책정하여 오늘과 같이 유적 아래로 지하 터널을 만들고 유적은 사적공원으로 정비했다. 이때의 조사가 오늘 서울 풍납동 백제 왕경유적(王京遺蹟)을 발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7년 1월 1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 날,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소재하고 있는 풍납토성에서 백제 초기의 유적·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혁명과도 같은 대사건이다.
저자는 1996년 여름방학부터 선문대학교(鮮文大學校) 역사학과[현 고고연구소]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풍납토성의 실측조사를 해왔다. 1997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도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지런히 풍납토성의 성벽을 측량하고 성곽의 보존실태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풍납토성 안의 풍납 1동 231-1번지에서 신우연립 재건축조합 외 5개 주택조합이 추진하는 현대아파트 건축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5m 이상이나 되는 철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서 터파기 공사를 하는 것을 담장 틈새로 목격했다. 그 이튿날에도 수차 진입을 시도하다가 1월 3일 간신히 현장에 진입하여 마침내 지하 4, 5m 아래의 검은 토층에서 목탄과 백제토기 파편들이 수없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2) 자세히 살펴보니 이른바 풍납동식 무문토기(風納洞式無紋土器) 파편과 백제토기(百濟土器) 파편이 수없이 나왔다. 이때가 바로 백제왕궁 유적이 발견된 역사적 순간이다.3)
<좌>풍납토성 내 왕경유적 발견 당시의 저자『조선일보』 1997년 1월 6일자. <우>풍납토성 안 현대아파트 부지 터파기 공사장1997년 1월 1일 정월 초하루날 현지조사시에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우리나라 고고학 최대의 발견이라고 한다. 이 곳 풍납토성 내부는 원래 논밭으로 형성된 농촌이었는데, 1964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에서 백제 초기의 유적 유물을 발굴하고도4) 이를 보존시키지 못하고 문화재 보호구역으로부터 해제되어 결국 성벽은 파괴되고, 성 안은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편입되어 주거지역으로 변한 뒤 오늘날까지 계속 백제왕궁 유적이 인멸되고 있던 지역이다. 1983~89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몽촌산성(夢村山城)을 발굴하게 되면서 몽촌토성이 백제 도성(都城)일 것5) 이라는 가설에 밀려 풍납토성 내의 개발[파괴]은 더욱 급진전되어갔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백제왕궁(百濟王宮) 유적1964년 발굴시에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보존하지 못하고 서울시의 도시개발로 토성 안에 도시가 들어섰다. 뒤에 보이는 산이 아차산이다. 1997년 1월, 저자에 의하여 왕궁유적이 발견되어 일부가 사적 제11호에 추가 지정되었다.
저자는 풍납토성 내의 현대아파트 건물 기초공사장에서 백제토기들을 발견한 직후 1997년 1월 4일, 문화재 관리당국에 보고하여 공사를 중지시켰다. 당국에서 즉시 발굴에 들어가 풍납토성 내 현대아파트 신축부지 안에서 발견된 유적은 일반 집터로는 보기 힘든 큰 건물터를 비롯하여 집회장이나 관청과 같은 고급건물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와와 전돌·주춧돌 받침대·불탄 기둥·서까래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기원전 3~1세기의 풍납동식 무문토기, 기원[0] 전후 시기의 연질 타날문토기, 1~2세기의 연질 무문토기, 2~3세기경의 회색 경질토기가 출토되었다. 회색 경질토기계의 삼족(三足) 토기·원통형 기대(器臺) 등의 토기류는 4, 5세기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옥기류·유리류·철기편 등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6) 그러나 지금은 이 곳에 ‘현대 리버빌아파트’가 들어섰다.
<좌>1958년의 풍납토성 모습 고 김영상(金永上) 선생 촬영. <중>40년 후의 풍납토성 모습성벽에는 교회가, 성 안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1998> <우>풍납토성 서벽 해자(垓子) 발굴 모습해자의 바닥을 강돌로 깔았다.
1999년 여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이 발굴되었는데, 성벽 기저의 너비가 40m, 높이 약 10m[원래 약 15m], 전체 둘레 3.5km나 되는 거대한 토성이 확인되었다. 2003년에는 서벽에서 해자(垓子)가 발굴되었다. 이는 웬만한 석성(石城)보다 훨씬 장대한 성곽이다.7) 이와 같은 성곽 규모는 놀랍게도 저자가 1996년 실측 조사에서 밝힌 제원(諸元)과 일치한다.8)
풍납토성 성벽의 하부에서 이른바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발굴되었는데, 같은 층의 C14 측정연대가 기원[0] 전후 시기의 것으로 측정되었다. 이는 온조왕 13년[기원전 6]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천도(遷都)하였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기원 전후 시기에 이와 같은 거대한 토성을 고운 모래와 흙만으로 10cm 정도 두께로 15m 높이나 한 층 한 층 판축법(版築法)으로 무려 3.5km를 축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백제가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국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력과 자원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는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에 이미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보는 증거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13년[기원전 6]에 신하들과 함께 서울 부근을 순시하다가 한수(漢水, 오늘의 한강) 남쪽의 땅이 매우 넓고 기름져서 이 곳에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그해 가을에 이 곳에 성을 쌓고 천도 준비를 갖추어 이듬해[기원전 5] 봄에 천도(遷都)하고, 15년[기원전 4] 봄 정월에 궁궐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 궁성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다. 지난 1997년 저자가 현대아파트 터파기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을 처음 발견한 이후 계속된 발굴 조사 결과,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읍[기원전 18~475]인 하남위례성의 유적과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어 2000년, 당시 문광부 박지원 장관의 협조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보존책 강구 지시로 정부는 점차사적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
으레 백제의 역사라고 하면, 공주[475~538]나 부여[538~660]의 역사만 알고 금강 유역의 유적만 백제 유적인 줄 알고 있지만 한성백제 시기는 공주·부여 시기의 185년간에 비하여 무려 500년이나 된다. 2000년 전에 이미 오늘의 서울이 우리나라 역사상의 엄연한 수도라는 역사적 사실을 새삼 인식할 수 있다.
풍납동 ‘경당아파트’ 부지 출토 ‘대부(大夫)’명 토기
1999년 9월부터 2000년 5월까지 풍납토성 안의 풍납 1동 136번지 경당연립주택 재건축조합에서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해 사전에 한신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실시한 ‘긴급구제발굴’에서 백제 초기의 많은 유적·유물이 발견되었다. 전면 넓이가 16m나 되는 대형 건물지를 비롯하여 12필 말머리를 묻은 제사갱·주거지 등 유적과 주춧돌·벽돌·기와·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토기 항아리의 어깨 면에 새긴 ‘대부(大夫)’는 중국 정사인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에 보이는 조선왕이 기원전 323년에 연(燕)나라에 보냈다고 하는 대부(大夫) 예(禮)의 관직명(官職名)과 같은 것이다. 대부는 고대 중국에서 궁중(宮中)의 중추핵심(中樞核心)인 최고의 관직이다.9) 그리고 고구려 고국천왕[179~196]이 을파소(乙巴素)를 ‘중외대부(中畏大夫)’에 명하고 국상(國相)을 맡게 하였다고 하는 기사가 『삼국사기』 열전에 보인다.
풍납토성 안에서 궁궐 유적과 함께 궁중 최고위직위인 ‘대부’명의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저자가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측조사 연구』[1997]에서 풍납토성을 백제 전기의 왕성(王城)으로 논증하였던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해준 셈이다.
경당 연립주택 신축 ‘아파트’ 부지에서 연화문 와당이 나오지 않고 모두 기하문(幾何紋) 와당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384년 백제에 불교(佛敎)가 들어오기 이전의 기와이다. 『삼국사기』 권33 잡지 옥사(屋舍)조에 보면, “진골은 방의 길이와 넓이를 24자를 넘지 못하며, 당기와를 이지 못한다[眞骨室長廣不得過二十四尺不覆唐瓦]”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임금의 신분인 성골(聖骨)만이 기와를 얹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전 고(구)려에 “고려[고구려]에서는 오직 왕궁·관부·불전에만 기와를 올린다[高麗惟王宮官府佛火爈以瓦]”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아마 백제에서도 임금이 거처하는 왕궁에서만 기와를 얹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의 “봄 정월 새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기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았다[春正月作新宮室儉而不陋華而不侈]”고 하였다. 이곳에 건축된 왕궁이 이와 같지 않았나 한다. 진사왕 7년[391], 궁실을 중수할 때 궁성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천지조산(穿池造山)]고 하는 기록을 보면 궁성은 평지성(平地城)임을 알 수 있다.
흙으로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는 판축법(版築法)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성(諸侯城)과 한(漢)대의 왕성에 사용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수도인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국고성(齊國故城), 곡부(曲阜)의 노국고성(魯國故城) 그리고 연나라 수도인 하북성 이현(易縣)의 연하도(燕下都) 등의 발굴 결과, 이들 도성이 평지에 강이나 하천을 끼고 판축으로 축조한 토성임이 드러났다.10) 그리고 우리나라 평양(平壤) 근교의 기원 전후 시기의 낙랑토성(樂浪土城)도 대동강(大同江)을 낀 평지토성이다. 1970년대 중국 길림성(吉林省) 고고문물연구소가 집안(輯安) 통구하변(通溝河邊)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을 발굴한 결과 기원 전후 시기에 초축(初築)된 성벽은 흙으로 쌓았다고 하였다.
일본의 경우, 고대의 도성들도 모두 평지에 조성되었다. 7, 8세기의 오사카(大阪)의 나니와노미야(難波宮), 가시하라(橿原)의 후지하라교(藤原京), 나라(奈良)의 헤이조교(平城宮), 교토(京都)의 헤이안교(平安宮) 등이 모두 평지성이다. 특히 아스카·나라시대의 나니와노미야라는 이름의 난파궁은 문헌기록에 자주 보이지만 오랫동안 그 위치를 모르고 있다가 1954년, 오사카의 우에마찌(上町) 북단 주택공사 현장에서 오사카 시립대학 야마네도꾸따로(山根德太郞) 교수에 의하여 발견된 나라시대의 한 점의 기와가 계기가 되어 나니와노미야가 다시 탄생하였다.11)
오사카성 바로 앞의 도심에서 발견된 나니와노미야 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관계학자·대학 총장·시민단체들이 정부와 시당국에 청원하여 서울의 경복궁 앞 청진동이나 무교동과 같은 금싸라기 땅을 구입하고 발굴하였다. 오늘날에는 무려 9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면적을 확보, 국가 사적공원으로 지정하여 오사카시뿐만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궁궐지 내부 전체가 사적지로 지정되더라도 주민들이 당장 이주하거나 아파트를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지 안에 있는 기존의 아파트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할 때 재개발하지 않고 시나 정부가 매입한 뒤에야 그 일대를 복원한다고 한다.
우리가 풍납동 백제 왕성과 왕경 유적을 보존하는 데 일본의 새로운 역사 문화 보호정책이나 보존운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일본 오사카시 중심부에 있는 나니와노미야(難波宮) 유적국가와 시 그리고 시민이 땅을 매입하여 사적공원을 조성하였다. 멀리 오사카성(大阪城)이 보인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서울 백제왕궁의 발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12.27.이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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