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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몽촌토성 (夢村土城)

백수.白水 2019. 4. 5. 08:26

 

 

 

서울은 고대국가 백제의 첫 번째 왕도로서, 백제700년 역사가 시작된 공간이자 전성기의 중심무대였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시조온조왕이 기원전18년 한강남쪽의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위례성은 나중에 한성(漢城)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송파지역이다. 한성은 백제 전체역사의 2/3이상인 500년의 역사가 머문 곳으로, 백제왕 전체 31명 중 21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한성도읍기에 백제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3대 근초고왕은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황해도지역, 남쪽으로는 전라남도지역까지 영역을 넓혔으며, 바다를 건너 동아시아주변국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한성도읍기(서울) BC18AD475 (493)

  -.웅진도읍기(공주) 475538 (63)

  -.사비도읍기(부여) 538660 (122)

 

 

 

 

 

 

 

 

몽촌토성(夢村土城)

 

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돼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어있는 몽촌토성은 야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든 한성백제시대의 중요한 성곽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토성이라 부르지만 사실 순수한 토성은 아니다. 남한산에서 뻗어 내린 최고 높이 44.8m인 타원형의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이른바 판축 기법을 이용해 입자가 곱고 잘 들러붙는 점토를 5~10두께로 차곡차곡 올려쌓은 산성이자 토성인 것이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면을 깎고 다듬어서 급경사를 만들고 그 경사면에 목책을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도록 하였다. 성벽 밖으로는 방어용 물길인 해자를 둘렀으며, 성벽 바로 안쪽의 네 지점에는 주위보다 3~5m 정도 높게 토단을 마련하여 망루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축조된 성곽은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평면 형태가 정연하지 못하지만 단순화시키면 마름모꼴에 가깝다.

 

규모는 면적이 136천여 평, 성벽 전체 길이가 2,285m에 달하는 큰 성으로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이 730m, 동서로 가장 긴 곳이 540m이며, 그 평균은 남북이 약 540m에 동서가 약 400m이다. 또한 성의 동북쪽 밖으로는 270m 가량 이어지는 외성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지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현재의 지표면을 기준으로 할 때 10~13m 정도이다.

그렇지만 성벽의 바닥이 지금의 지면보다 2~4m쯤 지하에 있고, 그동안 풍화에 의해 깎여나간 것까지 감안한다면 원래 높이는 13~18m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위한 체육시설 건립 예정지로 확정되면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6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어 몽촌토성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물은 토제품, 옥제품, 석제품, 금속제품, 목제품, 골제품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주종을 이루는 것은 토기로서, 다양한 형태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토기 또한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고구려 토기의 존재는 몽촌토성이 한성백제 멸망 후 한동안 고구려에 의해 점령,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중국 서진의 것으로 판단되는 흑갈색 유약을 입힌 동전무늬 도기 조각인데, 이는 몽촌토성이 만들어진 시기를 3세기 중후반 무렵이나 그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유적으로는 반지하의 움집터 12, 주춧돌을 사용한 지상 건물터, 조선시대의 온돌 건물터, 연못터, 곡물이나 기타 음식물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깊이 파서 만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이제까지 몽촌토성을 한성백제시대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가 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있어왔으나 몽촌토성이 발굴됨으로써 이런 주장은 다소 후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발굴에 참여한 학자조차 출토 유물이나 내부 시설에 있어 현재까지 거의 전 지역이 발굴조사된 몽촌토성에서는 최고 지배세력이 거주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되고 확인된 유물이나 유적이 초기백제사를 규명하는 데 소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지만,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터나 관청터, 혹은 최고 지배층이 사용했을 만한 유물이 아님도 분명하므로 유물이나 유적만으로 본다면 사실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 아니라면 과연 이 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발굴 뒤에도 여전히 이곳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이도 있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蛇城)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백제의 도성이 함락될 때의 남성(南城)으로 간주하는 학자도 있는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그러니 고대사에 밝지 않은 우리로서야 교통정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듯하고, 지금으로서는 아쉽지만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나 그 규모와 축조 방법, 내부 시설물, 출토 유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백제 초기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성곽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와 운명을 같이했던 듯하다. 고구려에 의해 한성백제가 무너진 뒤 이곳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는지 발굴 과정에서 삼국시대 후기나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유물 유구는 보이지 않다가 조선시대의 흔적이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국경선이 백제와 달랐던 고구려, 신라, 고려에게는 이곳의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출처]‘답사여행의 길잡이발췌

 

 

 

몽촌역사관

암사동신석기마을 비롯해 명일동·가락동·역삼동의 청동기시대 집 자리/ 백제의 도읍이었던 풍납토성·몽촌토성/ 석촌동·가락동·방이동 고분군/ 아차산의 고구려보루·이성산성 등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서울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다.

 

 

 

대략 이 지역이 한성백제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백제의 첫 왕성은 위례성(慰禮城)이다.

371년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긴 뒤 한성(漢城)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았다.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이며, 몽촌토성도 그 능선의 일부에 해당한다.

 

한성은 남·2개의 성으로 이루어졌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추정한다. 고구려군이 한성을 공격한 내용을 담은 삼국사기 개로왕21년 기록 고구려군이 북성을 공격해 7일 만에 빼앗고 남성을 공격하였다.’와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기록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니 왕성이 함락되어 마침내 위례를 잃었다를 종합하면, 475년 북성은 큰 성, 남성은 왕성이다.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왕이 도성을 나와 산성에서 지키는 기존의 방어체계와는 달리, 한성은 그 자체로 군사적 기능이 컸다. 특히 몽촌토성은 왕성과 관청, 왕실직속군대 등이 주둔하는 왕성이자 비상시 피난처였을 것이다.

 

※ 유물이나 유적으로 보아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학설도 있는 등 아직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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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성내천이다

2문에서 청룡교를 건너면 올림픽수영경기장 뒤쪽에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서 까치다리를 건너서 성내천을 오른쪽에 두고 470m쯤 걸으면 왼쪽에 몽촌역사관이 나온다. 유물과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 시간여유를 갖고 본다면 한성백제를 개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답사일: 2019.03.29 금>

 

 

성내동 강동구청역에서 성내천을 건너 북1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무지개다리

 

 

 

 

성벽 밖에서 보는 성벽의 모습

 

 

 

 

성벽과 성내천-몽촌호 사이로 성 밖을 도는 산책로가 나있다. 길 왼편이 성벽, 오른쪽의 성내천이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성내천의 물오른 수양버들 새파란 가지가 휘휘 늘어져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왼편의 건물이 내성농장(성벽동쪽지점)이다. 이곳에서 동--남 방향으로 2,285m의 성벽 길을 한 바퀴 돌았다. 걸으면서 파노라마처럼 주로 성벽 길과 성 밖의 모습을 많이 찍었다.

 

 

 

 

 

 

 

 

 

 

 

 

 

 

 

 

 

 

 

 

성벽에서 내려다본 성내천

 

 

 

 

나이가 500년을 넘은 은행나무, 높이17.5m, 둘레 6m.

 

 

 

 

 

 

 

 

 

 

 

 

 

 

 

 

 

 

 

 

 

몽촌토성 성벽에는 4개소에 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3-5m 정도 판축성토하여 만든 것인데 몽촌토성의 마름모꼴 평면을 그 동서남북 꼭짓점을 기준으로 사분(四分)할 때 각 변마다 1개소씩 배치되어 있다.

 

서북망대지는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당되는 표고 44.8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석촌동, 잠실, 풍납동 등이 조망된다.

 

 

 

 

 

 

 

 

 

 

 

 

 

 

 

 

 

 

 

 

 

 

 

 

 

 

 

 

 

 

 

 

 

 

 

 

 

 

 

 

 

 

 

 

 

 

 

 

 

 

 

 

 

 

 

 

 

 

 

 

 

 

 

 

 

조선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구(1649 1704)묘역

 

 

 

 

 

 

 

 

 

 

 

 

 

 

 

 

 

 

 

또 한곳의 망대.

 

 

 

 

원래 몽촌토성의 해자(垓子, 방어용으로 성 밖을 둘러 판 못)인데 아름다운 호수(몽촌호)가 되었다.

 

 

 

 

수변무대·국기광장 등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곳이 남문지(南門趾)로 보인다.

 

 

 

 

 

 

 

 

 

 

 

 

 

 

 

 

 

 

백제집자리전시관

 

 

88년도 몽촌토성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4기의 집자리(88-1·2·3·4호 수혈주거지). 집자리와 함께 발견된 토기, 화덕시설, 저장구덩이를 보존, 동일한 장소에 전시하여 한성백제시대의 생활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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