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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권의 역사문화적 특징

백수.白水 2025. 1. 13. 15:32

http://blog.daum.net/ma2dongpoong/8848885 솔롱고스

- 박찬승 (충남대 국사학과) -

 

 

1. ‘內浦의 유래와 지리적 조건

 

內浦란 우리말로 안 개이다. 즉 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에 들어선 포구를 뜻하는 말이다. 충남 서북부 지역은 바로 이와 같은 안 개가 다수 발달한 곳이다. 우선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삽교천, 무한천, 곡교천에 여러 포구가 발달하였다. 삽교천 입구에는 선장포구가 있었고, 그 안쪽으로 구만포(하구로부터 25킬로미터), 내포 등의 포구가 있었다. 또 석문방조제와 대호방조제가 들어선 지역도 여러 포구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당진 대호지면 일대와 서산 성연면의 명천포구는 유명하였다. 가로림만 일대에는 아직도 많은 포구들이 있다. 또 천수만 일대에도 모산만과 보령방조제 안쪽의 해만에는 광천과 같은 유명한 포구가 발달하였다.

 

 

 

<그림> 김정호, <대동여전도>의 내포지역

 

 

증보문헌비고34 여지고 관방 해방조에는 충청도 지역의 주요 포구로 56개소가 거론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아산부터 결성까지의 포구는 44개소에 달한다.1)

 

아산 : 공세곶포, 당포, 시포, 단장포

홍주 : 대진포, 전선창, 안면곶, 원산도, 석비포

면천 : 전선창, 대진포, 창택곶, 가리도

당진 : 당진포, 채원포, 맹곶

서산 : 평신진, 왜현포, 남곶,위곶, 안면곶, 요견량, 파지도, 대산곶, 백사정, 창포

태안 : 안흥진, 소근포, 부포, 안지영산곶, 대소산곶, 굴포, 안흥량, 이산곶, 신곶, 백사정

결성 : 동산포, 석곶포, 장포, 모산당포

 

이처럼 해만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수많은 포구를 만드는 지형은 한반도의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러면 왜 이 지역에 이와 같은 안 개가 발달하였을까. 그것은 이 지역의 산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지역은 흔히 非山非野라 하여 높은 산이 별로 없는 가운데 낮은 구릉들이 발달하였고, 그러한 구릉들 사이로 작은 천이 발달하여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또 바닷물이 그러한 작은 천들로 밀려들어오는 지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조수가 밀려들어오면 작은 천들은 이 되고, 바닷물이 빠지면 천변은 개벌과 갈대가 무성한 海澤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지역에 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山經表>에 의하면 錦北正脈은 안성 청룡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내려와 연기 의랑치, 천안 차령, 온양 송악을 거쳐 청양의 사자산, 구봉산, 백월산을 거쳐 오서산으로 이어지고, 결성의 보개산, 월산, 수덕산, 가야산, 서산의 성국산, 팔봉산, 태안의 지령산, 안흥진으로 맥이 이어진다. 또 백월산은 남으로 보령의 성주산, 남포의 옥마산으로 이어진다. 금북정맥은 북쪽과 서쪽의 내포문화권과, 남쪽과 동쪽의 금강문화권을 구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서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금북정맥의 잔줄기들은 서산, 태안 일대에 비산비야의 작은 구릉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동쪽의 삽교천과 무한천 일대에는 이렇다할 산이 없는 가운데 충남 제일의 내포평야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포는 북쪽과 동쪽의 아산만, 서쪽의 서해바다 등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수많은 작은 천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가면서 안 개를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수운이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은 반드시 태안반도를 거쳐가야 했는데, 태안반도의 안흥량은 조수가 급하고 암초가 많아 조운선이 좌초하는 경우가 많았다.2) 그러나 태안반도 북쪽과 아산만 일대에서부터 한양까지는 뱃길이 수월하였기 때문에 내포와 한양 간의 수운은 일찍부터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2. 내포지역의 범위

 

내포라는 말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고려시대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조선초기에 발간된고려사에는 이미 내포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 내용은 주로 왜구가 내포지역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는 내용들이었다.3)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내포라는 주로 조선후기의 왕조실록에서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宣祖대 비변사는 공주(公州) 진관의 법이 잘 다스려질 경우 금강(錦江) 일대는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며, 홍주(洪州) 진관의 법이 잘 다스려질 경우 內浦나 연해(沿海) 등지를 모두 방어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일은 간단하고 공은 많은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4) 또 선조대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 박명현(朴名賢)은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2일에 적병이 금산(錦山)으로부터 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 침입하여 이곳 저곳에 가득 차 불지르고 약탈하였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가장 먼저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며, 이시언(李時彦) 및 신이 거느린 병사들은 모두 내포 사람으로서 임천과 한산의 변을 듣고 역시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니,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5) 또 선조 체찰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3일에 홍주(洪州)의 향리(鄕吏) 이해(李海)가 청양(靑陽부여(扶餘) 등처를 체탐(體探)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이 백마강(白馬江)에 이르러 나룻배를 빼앗아 종일토록 강을 건너는가 하면 얕은 여울로 건너기도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잇따라 체탐인이 와서 보고한 것에 의하면 은진(恩津부여·석성(石城) 등처에는 왜적의 기세가 몹시 성하여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 부여의 도천사(道川寺), 은산역(恩山驛) 등처에서 분탕질하였다…….’ 하였습니다. 호서(湖西)의 내포는 왜적의 기세가 날로 성하여 수일이 못 되어 장차 여러 고을에 가득하게 될 텐데 병사(兵使방어사(防禦使찬획사(贊畫使)가 모두 좌도(左道)에만 있고 내포에는 정수나 병졸 한 사람도 파수하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조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지금 홍주(洪州)에 있는데 해미(海美) 등처에 왜적이 쳐들어와 도로가 막혀 통하지 못하게 되면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로 갈 계획입니다.”6)

선조 29년에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실록에서는 충청도 홍산(鴻山)의 서인(庶人)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몽학은 종성(宗姓)의 서족으로서, 호서(湖西)에서 종군할 적에 조련 장관(操練將官)이 되어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우거하면서 선봉장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다. 몽학은 어리석고 아무 재능이 없었으나 한현은 교활하고 일에 밝았다. 당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는데 한현은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모두 서인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면서 어사 이시발(李時發)에 소속되어 호서의 군사조련을 관할하였는데 민심은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었고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방비가 없음을 보고 이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때 현이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에 있다가 우선 몽학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고 기록하였다.7)

그러면 과연 내포지역은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일까.

영조 13년 이광좌는 호서(湖西) 내포 18개 고을이 이미 적지(赤地)로 판명되었으니, 청컨대 박사창(朴師昌)을 어사(御史)로 파견해 떠도는 백성을 안집(安集)시키고, 수령(守令)을 염찰(廉察)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내포에 18개 고을이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내포 지역 가운데 18개 고을이 흉년이 들었다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8) 그런데 여지도서에서는 홍주 진관에 속하는 18개 고을으로 서천, 면천, 서산, 태안, 온양, 평택, 홍산, 덕산, 청양, 남포, 비인, 결성, 보령, 아산, 신창, 예산, 해미, 당진 등을 기록하였다.9) 본래 조선초기 경국대전에서는 홍주진관에 위의 18개 고을 외에 홍주와 대흥이 기록되어 있었다. 즉 내포는 모두 20개 고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지도서에서 두 고을이 빠진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정조 19년 호서 위유사(湖西慰諭使) 홍대협(洪大恊)이 서계(書啓)를 올리면서, “아산(牙山)에서 조선(漕船)을 새로 만들거나 개조할 때 안면(安眠)의 송목(松木)을 정수(定數) 외로 마구 벌채한 뒤 운반해 와 내다 팔고 있으니 이 폐단을 지금부터 법을 엄하게 하여 통렬히 금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內浦의 제읍(諸邑)은 본래 면(綿)에 적당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군포(軍布)를 매번 무역해 옮기는 폐단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천(舒川) 7읍만 순전(純錢) 의 규정을 적용하고 있고 덕산(德山) 9읍은 아직 고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포보(砲保)에 대해서는 반절씩 섞어서 내게 하더라도 좋을 듯한데 병조 및 각 아문에서는 순전(純錢)의 규정을 정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10) 여기서 보면 내포는 모두 16개 읍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위의 내포 20개 고을 가운데 4개 읍이 빠졌는데, 어떤 읍인지는 불확실하다.

또 영조 27년 이중환에 의해서 저술된 택리지(擇里志)의 팔도총론(八道總論)에서는 내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內浦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 큰 못[大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斗入處]이다. 동쪽은 큰 들판[大野]이고 들 가운데에는 또 큰 개[大浦] 하나가 있으니, 이름이 由宮津으로, 밀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 없다. 남쪽으로 오서산에 막혀 있는데 가야산으로부터 온 맥으로, 단지 동남쪽으로 공주와 통한다.

伽倻山의 앞뒤에 있는 10 고을을 함께 內浦라 한다. 地勢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壬辰丙子의 두 차례 난리에도 여기에는 미치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까운 곳에는 학질과 염병이 많다.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넓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丘陵原濕(높고 마른 땅과 낮고 젖은 땅)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泉石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

그 중에서 보령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 고을 서편에 水軍節度使營이 있고 그 안에 영보정이 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여서 명승지라 칭한다. 북쪽은 결성, 해미가 있고, 서쪽에는 큰 개[大浦] 너머에 안면도가 있다. 3은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또 북쪽에는 태안과 서산이 있다. 江華와 남북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작은 바다로 떨어져 있다. 서산 동쪽은 면천과 당진이며, 동쪽으로 큰 개[大浦]를 건너면 아산이다. 북쪽으로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기의 남양 및 화량과 비스듬하게 마주하고 있다. 4은 가야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가야산의 동쪽은 홍주와 덕산이다. 모두 유궁진의 서쪽에 있는데, [] 동쪽의 예산, 신창과 더불어 뱃길로 한양과 통하는데 몹시 빠르다. 홍주의 동남쪽은 대흥과 청양인데, 대흥은 곧 백제의 임존성이다. 11 고을은 모두 오서산의 북쪽에 있다.11)

 

이중환은 가야산 주변, 오서산 북쪽의 11개 고을을 내포지역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홍주, 보령, 결성, 해미, 태안, 서산, 면천, 당진, 덕산, 예산, 신창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주장에 의하면, 가야산, 오서산과 함께 주요한 랜드마크가 되는 곳이 유궁진이다. 최남선은 내포라 함은 충청도 서남쪽의 가야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고을로서 삽교천의 상류, 유궁진의 안쪽에 있다 해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였다.12) 여기서 삽교천의 상류, 덕산의 유궁진은 오늘날 구만포 부근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중환이 말하는 내포지역은 위에서 본 이광좌의 내포지역 개념보다 훨씬 좁아진 지역이 된다.

한편 천주교쪽에서는 아산, 온양, 신창, 예산, 대흥, 면천, 당진, 덕산, 해미, 홍주 등 10개 고을을 상부 내포라 부르고, 태안, 서산, 결성, 보령, 청양, 남포, 비인, 서천, 한산, 홍산 등 10개 고을을 하부 내포라 칭하였다고 한다.13) 즉 홍주진관에 속했던 고을들을 북부와 서남부로 나누어 상부내포, 하부내포라 부른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내포지역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임선빈은 충남의 전통문화권을 내포문화권금강문화권으로 나누어 부르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14) 여기서 그가 말하는 내포문화권은 이중환이 말한 내포지역을 가리킨다. 즉 홍주진관에 속했다 하더라고 오서산 이남의 남포, 비인, 서천, 청양, 홍산 등은 금강문화권으로 넣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영준은 청양, 홍산, 한산 3개 군현은 금강 수계에 속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내포지방에 속한다고 볼 수 없지만, 교회사적인 측면에서는 등질지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홍주진관에 속하는 20개 고을을 모두 내포지방으로 보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15)

당시 공주진관과 홍주진관에 속하는 지역을 구분하여 보면 아래 <1>과 같다. 여기에서 보면 공주진관보다 홍주진관의 지역이 훨씬 더 넓다. 이는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은 모두 홍주진관으로 포함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문제는 오서산 이남의 홍산청양비인결성남포와 같은 지역이 문화적으로 홍주에 더 가까웠는가, 아니면 공주에 더 가까웠는가 하는 점이다. 전통시대에 문화권은 주로 지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컸다. 따라서 산천의 경계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 홍산청양한산은 금강유역이면서 금남정맥에 의해 보령남포비인서천쪽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산홍산청양은 공주문화권으로 구분하되, 보령남포비인서천은 홍주문화권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위의 내포문화권은 광의의 것이고, 협의의 내포문화권이라 한다면 역시 오서산 이북으로서 오늘날 홍주, 서산, 태안, 당진, 예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공주진관과 홍주진관

진관

고을 명칭

공주진관

임천, 한산, 전의, 정산, 은진, 회덕, 진잠,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연기 (12개고을)

홍주진관

서천, 서산, 태안, 면천, 온양, 대흥, 덕산, 홍산, 청양, 비인, 결성, 남포, 보령, 아산, 신창, 예산, 해미, 당진, (평택) (19개 고을)

 

 

3. 내포지역의 사회경제

 

위에서 본 것처럼 내포지역은 한양과의 수운이 발달하였고, 또 삽교천과 무한천 일대에 충남 제일의 예당평야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내포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중앙 권세가들이 서로 庄土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곳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광해군 7년 우부승지 한찬남은 신은 박이서에 대해서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와 함께 반열에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유영경의 심복이 되고 유영경의 졸개가 되었기 때문으로, 그의 흉악스런 상황은 말하자면 깁니다. 삼가 보건대, 요즈음에도 뉘우치지 않은 채 악한 짓을 하고 기세를 돋우며, 탐욕스럽고 방자함이 끝이 없습니다. 그의 불룩한 늙은 배는 모두가 욕심 주머니로, 권엽을 지휘하여 백성들을 사역시키고 나라 땅을 함부로 차지하였습니다. 이에 5만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괭이를 든 채 신음하였고 한 식경 길이나 되는 긴 제방이 용이 누운 듯 구불구불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남양(南陽)에서는 윤공(尹鞏)의 전지를 빼앗았고 유지신(柳止信)이 경기 수사가 되었을 때에는 1천 명이나 되는 장정들을 부려서 하루도 못되어 제방을 다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외에 공공의 內浦를 도모하여 차지한 것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며, 백금 1천 냥을 내어 몇 구역에 걸쳐 있는 널따란 집을 사들였습니다. 그의 탐욕스럽고 교활한 정상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고려 말기의 최충헌(崔忠獻)이나 최항(崔沆), 우리 조선의 김안로(金安老)나 윤원형(尹元衡)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짓을 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16) 중앙의 권세가들은 농민들의 부역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아서 황무지를 경지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현종대에서 농민들의 부역을 동원하여 보를 쌓은 일이 문제가 되었다. 정언 원만리(元萬里) 등이 아뢰기를, “근래 이선기(李善基)가 공사(供辭)를 속인 것 때문에 물의가 자자하니, 신들은 가슴 아프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보를 쌓을 때 일을 한 자 백여 명은 그래도 품삯을 지급했다고 핑계댈 수 있지만, 어사의 서계에서 이미 5, 6백 명이라고 했으니, 품삯을 지급한 이외의 4,5백 명에 대해서는 선기가 온통 빼놓고 거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호조 판서 허적이 상소한 내용으로 보더라도 보를 쌓은 자가 다 그 지역 주민이 아님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선기는 바로 신평(新坪)에 사는 사람들이 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감사에게 보고하여 수백 명의 군정(軍丁)을 받아 냈다.’ 하였으니, 연군(烟軍)을 당초에 제급(題給)한 사실은 분명하여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기는 갖가지 방법으로 교묘하게 꾸며대며 원래 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임금을 속인 그의 죄를 엄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국왕은 이선기를 파직에 처하였다. 또 호서의 암행 어사 이민적(李敏迪)이 서계하기를, “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선기가 지난해 봄에 서울에 사는 사대부를 위하여 보를 쌓고 전장(田莊)을 지었는데, 연군(烟軍) 5백 명을 멋대로 사용하여 많은 민원을 사고 있다하였는데, 상이 선기를 잡아다 문죄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허적(許績)이 판의금으로 있었는데,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선배 장로(長老)와 현재의 명망 있는 이들을 보건대, 보를 쌓아 생계의 밑천을 삼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신도 또한 처음에 이것이 사대부에게 수치스런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감히 무턱대고 흉내낼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여, 권세가들이 농민들을 동원하여 보를 쌓고, 황무지를 경지로 개간하는 일이 다반사였음을 잘 말해준다.17)

내포지역에 田庄을 마련한 것은 권세가들만이 아니었다. 왕실, 즉 궁방에서도 수많은 궁방전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삽교천 일대에는 유달리 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이는 이 지역에서 궁방이 물력을 내고 농민들의 부역을 동원하여 제언을 쌓으면서 궁답을 늘려갔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장토문적 자료들을 보면, 한말 궁내부 장토들이 예당평야에 다수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훈련도감이나 충훈부 등도 역시 이 지역에 상당한 장토를 갖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서 조선인 부재지주, 특히 경성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의 땅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이 곳 내포평야(예당평야)였다고 한다. 내포평야는 신창, 예산, 홍주, 덕산, 면천, 아산 지역에 걸친 드넓은 평야를 가리키는데, 이 곳은 충남 제일의 미곡 산지로서 그 면적은 20세기초 약 28백정보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예산천(현 무한천) 부근의 평야는 약 6,670여정보, 금마천(현 삽교천) 부근은 약 11,127정보에 달하였다. 이는 충남에서 가장 넓은 평야로서, 두 번째로 넓다고 하는 강경평야가 6340여정보였던 것과 비교할 때 얼마나 넓은 평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18)

이와 같이 넓은 평야의 지주들 가운데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현지에 거주하는 재지지주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특히 덕산과 대흥쪽에는 재지지주보다 서울에 거주하는 부재지주가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19) 유명한 경성 거주 부재지주 몇 사람만 꼽아보면, 윤치호(200정보), 민대식(290정보), 윤덕영(171정보), 이석구(1019정보), 경성구 천주교회(195정보) 등이었다.20)

그런데 조선후기 내포지역에는 큰 흉년이 자주 들었고, 이는 조정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효종대에 흉년이 심하여 간원이 아뢰기를,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은 수령의 직책입니다. 그런데 근래 듣건대 內浦에 기근이 심하여 서산(瑞山) 땅에 사는 선비의 아내와 자녀 등 온 집안 식구가 굶어 죽었다고 하니 관가에서 그 즉시 구제하지 않았다는 게 매우 놀랍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본 군수에게 죄를 주도록 하소서.21)

숙종대에는 금년의 농사는 처음에는 풍년이 들 전망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연달아 풍수(風水)의 재해(災害)가 있어서, 양남(兩南)2754) 지방은 흉년이 들지는 않겠으나, 그 밖의 다른 도()에는 재해를 입은 곳이 많이 있습니다. 기미년2755) 이전에 제반 신역(身役)을 만약 일시에 봉납(捧納)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우선 봉납하는 것을 정지시키소서. 기전(畿甸)과 호서(湖西) 지방의 內浦의 각 고을에서 적곡(糶穀)의 포흠(逋欠)이 가장 많은데, 여러 도의 신구(新舊)의 적곡을 일시에 거두어 바치도록 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니, 또한 우선 정지시키소서. 다만 봉납(捧納)에 준()하여 당년에 분급(分給)할 숫자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22)

중앙 권세가들의 전장이 설치되어 수탈당하고, 또 잦은 흉년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내포지역의 인심과 풍속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인조는 근래 인심이 착하지 않은데 내포는 더욱 복종하지 않으니, 어루만져 따르게 하는 방법을 모두 강구한 뒤에야 그들을 진압하여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조정이 어찌 수령을 신중히 가리고 싶어하지 않겠는가마는, 사람들의 말과 실제가 서로 어긋나 전관이 두루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정사하는 데 있어서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백성의 행 불행은 수령에 달려 있으니, 출척(黜陟)을 엄하고 분명하게 하면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입을 것이다. 경은 노력하라고 하였다.23) 숙종 20년 사헌부에서는 상소를 통해, “ 호우(湖右)지방의 백성들 풍속은 본래 간사하고 사나운데 內浦가 더욱 심한 편이며, 보령(保寧) 지방에서는 혹은 원한을 품기도 하고, 혹은 싸운 일로 인하여 불을 지르거나 총을 쏘아서 사람의 목숨을 죽인 것이 있기도 하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해당 고을 수령(守令)과 토포사(討捕使)를 엄중히 신칙하여 비밀히 염탐(廉探)시켜, 반드시 체포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해독을 제거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24) 중앙정부와 권세가들의 수탈은 내포지역의 농민들에게 저항의식을 갖게 하였고, 이를 중앙정부에서는 인심이 사납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4. 내포지역의 문화적 특성

 

내포지역의 문화적 특성은 한마디로 다양성, 개방성, 진보성으로 요약된다. 내포지역에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상당히 성하였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천주교, 동학, 기독교도 활발히 유입되었다. 또 근대 이후 사상적으로도 부르주아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역시 활발히 유입되었다. 여기에서는 불교, 유학, 천주교, 동학 부분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1) 불교

우선 내포지역의 불교부터 살펴보자. 내포의 불교는 백제시대 남북중국으로부터 이곳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초 백제 무녕왕은 고구려로부터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남중국 양나라와 일본, 그리고 발해만과 산동반도 등과 바다를 통한 교통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당시 북중국을 중심으로 운강석굴, 용문석굴, 향당산석굴, 천불산석굴 등 석굴조각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영향을 받아 성왕대(523-553)에 만든 것이 예산사면석불(봉산면 화전리, 보물 794)로 추정된다.25) 그리고 위덕왕대(554-597)에 이르러서는 태안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백화산 상봉 가까운 절벽에 태안마애삼존불(보물 432)가 만들어진다. 무왕(600-640) 초년 경에는 서산 상왕산 계곡에 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가 만들어진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삼존불구도에서 왜소한 보살상이 거대한 양불 사이에 끼어 있는 미숙한 모습을 보였으나, 서산마애삼존불에서는 거대한 주불을 중심으로 두 보살이 좌우에서 협시하는 일반적인 삼존불 모습을 보인다. 흔히 백제인의 미소가 표현되었다고 하는 서산마애삼존불은 당대 백제인의 불상 조각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 이때 수덕사에는 혜현(570-627)대사라는 고승이 삼론학을 강의하고 법화경을 염송하며 대중을 교화하였다고 한다. 혜현대사에 관한 기록은 당나라 태종 때에 도선율사가 편찬한 속 고승전28 백제국 달나산 석해현전에 실려 있을 정도이다.

위에서 본 세 곳의 사면석불과 마애삼존불은 모두 사람 키 이상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불상들로서, 당시 이러한 불상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공주나 부여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즉 당시 백제 불교의 중심은 이곳 내포였음을 이 석불과 마애불들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백제 부흥운동이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도침대사는 아마도 수덕사 승려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가 임존성주인 의자왕의 종제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켜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다가 백제를 부흥시키려 하였으나 복신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이곳 내포의 백제 불교세력은 강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이 지역의 불교 세력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상왕산 계곡에 보원사를 크게 짓고 화엄종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보원사지에 가보면 거대한 규모의 석조와 당간지주, 극히 세련된 오층석탑, 법인국사 보승탑, 보승탑비(보물 102-106) 등이 서 있어 당 시 보원사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밖에도 당진읍에서 서남쪽으로 10킬로미터 쯤 떨어진 정미면 수당리 원당굴 은보안 중턱에 있는 안국사지에는 거대한 석불 입상 세개가 나란히 있다(보물 100). 안국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시 백제 말엽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서산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9(649)에 혜감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1475(조선 성종 6)에 불탄 것을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의 대웅전은 1484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 보물 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도 이 지역의 불교세력은 매우 강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왕경 귀족의 후예인 낭혜화상 무염을 남포 성주산으로 보내어 남종선문을 개설하게 하였으니 이는 문성왕 9(847)의 일이었다. 낭혜화상은 태종 무열왕의 8대 손으로서 23세에 당나라에 건너가 남종선을 배워왔고, 같은 무열왕 후손인 김흔의 수봉지가 있던 남포 성주산에 선문을 개설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성주사는 당시 9산선문 중 최초로 개설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오늘날 내포지역 불교의 중심은 물론 수덕사이다. 수덕사는 백제 말기에 숭제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고려 31대 공민왕대에 나옹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덕사가 크게 성장한 것은 한말 이후의 일이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이 반포되어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30 본산제를 실시할 당시, 수덕사는 충남 대본산인 마곡사의 말사였다. 하지만 수덕사는 한말 이후 경허와 만공이라는 걸출한 승려를 배출하였고,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다. 경허는 동하갓, 천장사(서산), 수덕사 등지를 오가며 선풍을 진작시켰다. 만공은 경허의 제자로서 오랫동안 수덕사에 머무르면서 사부대중을 가르치며 선풍을 드날렸고, 수덕사 대웅전 이외의 건물 대부분을 중수, 중창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보월, 혜암, 벽초, 원담, 만성, 일엽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왔다. 여기서 이른바 덕숭문중이라는 한국 근대불교의 큰 법맥이 형성되었다. 특히 nejr사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수도 도량인 견성암을 만들어 비구니 스님을 길러냈으니, 일엽, 법회, 선복 등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은 수덕사는 제7교구 본사로 승격시켰고, 현재는 42개의 말사를 관할하는 수사찰로 자리잡았다. 1984년 수덕사는 사찰행정의 독립성을 가진 종합수도장을 의미하는 총림으로 승격, 이름을 덕숭총림이라 하고 초대 방장에 혜암스님을 추대하였다.

 

2) 유교

고려말 내포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의 수용에 앞장섰다.26) 백이정(1247-1323)은 원나라에 10년간 유학한 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의 가례 家禮를 가지고 돌아와 이를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귀국 후 후진 양성에 힘써 이제현, 백문보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백이정의 뒤를 이어 성리학 보급에 크게 기여한 것은 이곡, 이색 부자를 비롯한 한산 이씨 가문이다. 이곡은 1332년 원나라 정동해엉 향시에 합격하여 한림국사원 검열관이 되어 원나라 학자들가 교유한 뒤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이며, 백이정의 제자인 이제현의 제자이다. 그도 공민왕 대 원나라 정동행성 향시에 합격하여 관직을 지낸 뒤 귀국하여 성균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당시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이 이색을 도와 성리학의 수용에 앞장섰다. 이색은 많은 제자를 길렀으나 이성계를 추종하는 정도전과 이에 반대하는 제자들간의 대립으로 말년을 불우하게 지냈고, 묘는 서천 죽혼리에 있으며, 서천군 한산의 문헌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색의 후손으로는 이자, 이개와 이지함이 있다.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 집현전 부수찬으로서 훈민정음 제정에 참여했으나, 세조대에 노산군(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 노량진의 면절서원, 충주의 노운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지함(1517-1578)은 보령 사람으로 화담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유학만이 아니라 도가사상, 상수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상공업도 중시하였다. 그는 아산현감을 지내면서 노약자와 걸인들을 구호하기도 했고, 를 대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그의 학풍은 그의 조카인 이산해아 유몽인, 김신국 등 북인 관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서경덕의 학풍을 이은 이들로서 서기와 홍가신이 있다. 서기는 홍주에서 살면서 <東方分野圖>와 같은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도를 만들기도 했다. 성호 이익의 선조인 이지완, 이지안 등은 서기의 친구인 박지화의 제자이다. 홍가신은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의 제자인데, 아산 사람으로 홍주목사를 지낸 바 있다. 서경덕의 학풍을 이은 북인계열들은 광해군 대에 남명계열의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제 기호학파는 서경덕이 아닌 율곡 이이를 잇는 서인계열이 주류가 되었다.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부자의 예학파가 등장하고, 이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유계 등으로 이어지면서, 이황의 학문을 잇는 영남의 퇴계학파와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숙종-영조-정조대를 거치면서 서인계열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하고, 기호학파 안에서도 기호남인이 등장한다.

서인계열의 기호학파는 영조대 이후 이른바 인물성동이론을 놓고 낙론과 호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인물성이론을 주창한 남당 한원진과 인물성동론을 주창한 외암 이간은 모두 내포지역 사람들이었다. 한원진의 주장은 주로 호서지역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호론이라 불리었고, 이간의 주장은 주로 한양과 인근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낙론이라 불리었다. 이것이 이른바 호락논쟁이다.

남당 한원진(1682-1751)은 율곡 이이 - 사계 김장생 - 우암 송시열 - 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의 적통을 잇고 있는 호서 산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문에 입문하면서부터 40세까지 출사하지 않고 줄곧 학문을 연마하였고, 45세에 영조의 부름을 받아 경연관으로 1년여 동안 출사하였으나 영조와 사이가 벌어져 귀향한 뒤 저술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남당이 인물성동이론 문제를 놓고 이간 등과 논쟁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8

때의 일이었다. 그는 홍주 흥녕의 한산사에서 최징후, 이간, 한홍조, 윤흔, 현상벽, 우세일, 최안후, 윤형, 이하병 등과 자리를 같이하고 인물성동이론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흥녕은 오늘날 보령 오천지역으로 한산사는 수영성 인근에 있었다. 이후 그는 이간과 서신으로 토론을 계속하였고, 병계 윤봉구와는 깊은 교우관계를 갖게 된다.27) 이간(1677-1727)은 아산 외암리 사람으로 본관은 예안이다. 그도 역시 권상하의 제자로서 남당과 인물성동이론 논쟁을 벌이면서 당시 학계의 중심인물로 등장했다.

호락논쟁은 처음에는 인((((()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문제, 즉 금수와 오상의 관계와 또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즉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등의 논의에서 출발하였다. 본격논쟁은 권상하의 문하 강문8학사 가운데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전개되었는데, 스승인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면서 이것이 점차 전국적인 논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 박필주, 어유봉 등 한양의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반대로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윤봉구·최징후(崔徵厚채지홍 등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른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이란 이는 인()과 물()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해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28)

 

호락논쟁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사상계가 주화파와 척사파로 갈리고, 그런 가운데 북벌론이 제시된 정치적 현실과도 관계가 있었다. 物性異論은 종래의 中華夷狄은 다르다는 華夷論과 연결되면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18세기 조정 내부에서 연경으로 사신을 다녀온 이들은 점차 청나라의 문물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고, 심지어는 북학론을 주창하기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경화사족들은 척사론과 화이론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인 인물성동론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물성이론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인물성동론은 현실과 실리를 중시하는 진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남당의 학풍은 이후 호서지역, 특히 내포지역의 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한말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하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말 내포 의병을 주도한 김복한을 비롯한 이 지역 유림들은 사숙문인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을 塘門이라 자처할 정도로 한원진의 학풍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들 남당학파에서는 김한록계의 김상덕김상정을 비롯하여, 정혁신 계의 이돈필이설김복한, 백사정계의 백락관 등이 있으며, 이들 외에도 홍주의병에 참여한 임한주임승주 형제와, 유호근심의덕조귀원김용제이우규 등이 나왔다. 한편 한말 내포지역에는 화서 이항로의 학풍을 잇는 최익현유진하윤석봉 등이 이주해왔는데, 이들은 모두 포천고양양주 등 경기도 출신들이다. 최익현이 정산으로, 유진하가 서산으로, 윤석봉이 남포로 이주해온 것은 그들이 남당의 학풍이 지배하고 있는 이 지역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29)

하지만 내포지역에 보수적인 유학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기도 안산 성포리에는 당시 기호남인인 성호 이익이 살고 있었는데, 안산과 내포지역은 뱃길로 가까운 곳이었고, 따라서 주로 성호의 집안인 여주 이씨들이 살고 있던 덕산 일대에는 성호의 학풍을 계승하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성호의 학풍을 이은 덕산의 여주 이씨들로서는 이병휴이용휴이삼환이철환이재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여주 이씨들은 당쟁이 극심하던 숙종대 이하진이 유배지에서 죽고, 이잠이 옥사한 뒤, 정계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학문에 전력하기 위해 경기도 안산, 충청도 덕산, 강원도 원주 등지로 나뉘어 낙향하였다. 이하진의 후손 가운데 덕산에 입향한 것은 이하진의 아들 5형제 가운데 이해와 이잠이었다. 이들이 덕산지역으로 들어온 것은 외가인 용인 이씨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30)

다산 정약용은 이들 여주 이씨들에 대해, 이병휴는 易經三禮, 이맹휴는 경제와 실용, 이용휴는 문자학, 이철환은 박물학, 이삼환은 예학, 이구환은 경제실용지학에 뛰어났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이병휴는 성호의 조카이며 제자로서 성호좌파의 수장이다. 그 문하에서 권철신, 권일신 등 천주교를 신봉한 이들이 나왔다. 이용휴는 문학과 음운학, 병학, 농학에 밝았으며, 그의 학문은 아들인 이가환, 외손 이승훈에게 전수되었다. 이가환은 정조의 총애를 받은 학자였고, 채제공의 뒤를 이어 기호남인의 지주가 될 인물로 꼽혔으나 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도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이삼환은 부친 이병휴의 학문을 전수했고, 이철환은 성호의 종손이며, 이재위의 아들인데, 아버지와 함께 <物譜>를 지었다.

내포지역에는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금강문화권에 비해서는 서원의 숫자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이는 아무래도 은진 송씨와 파평 윤씨, 광산 김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벌족들이 금강문화권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포지역에도 서원과 사우는 17세기 이후 에 꾸준히 건립되었다. 다만 시기적으로 다소 늦고, 규모가 작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 내포지역의 서원사우는 學問이나 節義로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保寧花巖書院이나, 結成靖忠祠, 당진의 南以興祠宇가 그러한 경우이다. 17세기 후반에 洪州祿雲書院과 보령의 花巖書院에는 사액이 내려졌다. 節義之士柳方澤鄭臣保를 제향하는 瑞山松谷祠가 건립되었다. 이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중앙정계 色目 간의 정치적 분쟁이 향촌의 서원·사우의 건립문제과 깊이 관여되어 書院 鄕戰이 전개되었는데, 내포지역에서는 그러한 사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당시 내포지역의 서원사우는 西人-老論에 의해서 장악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8세기 전반에도 이 지역의 서원 사우 건립은 노론에 의해 주도적으로 추진되었다. 朱熹를 제향한 德山晦庵書院의 경우가 우선 그러하였다. 또 신규로 건립되거나 기존 서원에 추향되기도 했는데 이때 배향된 사람들은 내포지역에 후손이 근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역으로 書院 祠宇에 자신의 조상을 제향함으로써, 향촌에서의 위상을 보장받고자 하는 후손의 사회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세기 전반 가문간의 결합에 의한 향촌의 운영도 확인된다. 보령의 花巖書院이 그러한 경우인데, 향론을 주도하는 光山金氏, 韓山李氏, 慶州李氏가 혈연관계로 결합되어 서원의 운영 뿐 아니라 향교의 운영까지 장악한 경우였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기존의 훼철된 서원이 복립되거나, 추향이 실시되거나, 신규로 사우가 건립되는 경우들이 보인다. 復立된 것은 瑞山聖巖書院이었고, 추향된 곳은 瑞山松谷祠, 禮山晦巖書院이었다. 추향되는 사람은 모두 해당지역에 후손이 세거하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된다. 후손들이 자기 조상을 서원에 추향함으로서 지역에서 활동하는 데 후광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 시기 내포지방 서원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앙에서 활동하는 척족 가문들과의 관계였다. 숙종의 비인 仁元王后, 영조의 비인 貞純王后, 영조의 2녀인 和順翁主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慶州金氏 가문은 서산지역에서 훼철되었던 聖巖書院을 복립하는 데 주도적이었고, 또 서산의 松谷祠에 자기 선조를 추향하였다. 순조의 비인 純元王后, 헌종의 비인 孝顯王后, 철종의 비인 哲仁王后를 배출하는 安東金氏 가문은 禮山德岑書院을 적극 경영하였다. 이렇게 경주김씨와 안동김씨가 내포지역의 서원의 운영에 적극적인 개입을 한 것은 이들의 정치적 위상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 형성된 경제적 근거와도 관련된 듯하고, 또 그들이 이 지역에 이미 오랫동안 세거하면서 재지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던 점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내포지역에는 문중 사우가 9개 건립되었다. 이 가운데 洪州牧의 치소가 있던 지역에 4, 結成 1, 海美1, 泰安 1, 瑞山 1 곳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시기 타 지역과 비교할 때 적은 편이었다.31) 이는 내포지역의 유학이 공주문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뒤집어 해석하면 그만큼 덜 보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천주교

내포지역은 한국에서 한양 다음으로 천주교가 일찍이 전래된 곳이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이와 같이 일찍 전래된 것은 우선 지리적인 조건가 관련이 있었다. 내포지역은 한양과 공주를 잇는 간선도로에서는 비켜서 있는 벽지이면서도, 바다로는 쉽게 중국과 연결되는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침투해들어오기 쉬운 곳이면서, 또 벽지로서 관헌의 눈에 덜 띄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충청도 안에서도 차령 이남의 공주문화권이 호서 유림의 본거지로서 양반과 유학세력이 강력한 곳이었던 반면에 내포지역은 일부 양반과 유학세력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차령 이남보다는 세력이 약한 곳이었다. 따라서 민에 대한 지배층의 통제가 다소 이완된 곳이었다고 할 수 있고, 천주교는 바로 그 틈을 비집고 포교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내포지역은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층과, 사기제조업, 도살업 등에 종사하는 장인천민들도 상당히 많았다. 또 내포지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어서 어업에 종사하는 평민층이 많았고, 또 바다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 곳으로서 종교와 신앙에 대한 의존이 강한 곳이었다. 백제시대에 불교가 이 지역에 일찍이 들어와 민중들 사이에 크게 전파되고, 그 결과 강력한 불교세력이 형성되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또 선교사들로서는 중국으로부터 배로 접근하기 용이하다는 점, 내포지역 깊숙이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서 포교를 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유사시 배를 타고 탈출하거나 은신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앞서 본 성호 이익의 여주 이씨 일족 가운데 서학과 천주교에 관심을 갖는 이른바 성호 좌파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이 덕산지역에 거주하였다는 사실도 천주교 포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수용확산되는 과정은 1) 수용기(1790년 이전), 2) 박해기(1791-1879), 3) 전교자유기(1880년 이후)로 나뉜다. 내포지역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수용한 것은 이른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었다. 그는 어려서 기호 남인으로 성호학파에 속하는 이기양(덕산 거주)에게 배웠으며, 18살 때(1776) 경기도 양근으로 가서 권철신, 권일신 형제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존창이 권일신으로부터 직접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게 된 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1784년이나 1785년초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영세를 받은 이존창이 고향인 내포의 여사울에 돌아온 시기는 1785년이다. 그는 이후 1791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자기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포교를 하여 수백명에 달하는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이때 그에 의해 입교한 이들 가운데에는 김대건의 조모(이존창의 조카딸), 김종현(면천 출신, 김대건의 큰 할아버지), 최한일(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양업의 조부(이존창의 조카) 등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다. 신분상으로 보면, 그 가운데에는 양반도 있고, 중인층도 잇으며, 평민, 천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체포되었다. 이존창은 배교를 약속하고 풀려난 뒤 홍산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다시 은밀하게 전교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입교한 인물 가운데에는 홍산 인근 지역의 평민, 천민들이 많았다. 이존창은 1794년 다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기 위해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존창은 1795년 다시 체포되어 공주감영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 나와 천안에서 형리의 일과 장교의 일을 맡으면서 감시와 연금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1801년 다시 신유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었으며 결국 그는 서울에서 심문을 받고 공주에서 처형되었다.32) 이존창이 여사울을 떠난 이후 내포교회의 재건은 최신덕, 정산필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다른 신자들은 경상도의 안동진보영양 등지로 이주하여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나갔고, 또 일부는 전라도의 무장으로 이주하여 역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또 일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내포지역이나 차령산맥의 산간지역으로 들어가 옹기제조, 화전경작 등을 했고, 담배와 소금 행상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초기 박해시에는 원거리 이주가 많았으나, 후기 박해시에는 근거리 이주가 더 많았다.

천주교 박해는 1791년 이후부터 1879년까지 88년간 7회에 걸쳐 발생했다. 수차에 걸친 박해로 순교한 내포지역 출신 신자는 남성 331, 여성 103명으로 총 434명에 달한다. 이는 전국 순교자의 25%를 상회하는 숫자이다. 시기별로 보면, 신유박해시 24, 을해박해시 13, 기해병오박해시 25, 병인박해시 356명으로 1866년 병인박해 시기가 가장 희생이 컸다. 군현별로 보면, 신유박해시 덕산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른 이들은 면천 홍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기해박해시에는 순교자의 범위가 홍주, 신창, 대흥, 서산, 보령, 서천 등지로 확산되었다. 병인박해시에는 태안군을 제외한 내포지역의 모든 군현에서 순교자가 나왔는데, 홍주가 115, 덕산이 89명으로 가장 많았다.

박해시기 신자들은 안전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철저히 교우촌 내부 혹은 교우촌 간의, 신자 집단 내의 통혼을 하였다. 1850년대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가 일시 중단되자 전국의 신자수는 크게 늘어 186118,000명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신부와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활약하였는데, 내포에서는 다불뤼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들이 선교를 수행하였다. 1861년 베르뉘 주교가 조선교구를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두 구역이 내포지역에 있었다. 오페르트 사건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무려 13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위의 프랑스 신부들이 모두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되었고, 내포지역 100여개 마을에서 37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은 읍성 안팎에 살던 이들, 삽교천 유역의 여러 포구에 살던 이들, 그리고 산간지역의 교우촌에 살던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33)

조선이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은 1886년 이후 천주교측은 내포지역을 중시하여 공소와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더 많은 공소를 만들어 1900년까지 100여개에 달하는 공소를 만들었다. 덕산과 면천을 중심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공소는 병인 박해시 상당수가 가야산과 차령산맥으로 이전하였다가 이제 내포평야 지대로 다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서산, 해미, 온양, 아산 일대에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또 천수만 일대, 비인, 서천, 홍산 등지로도 확산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89년 덕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 본당이 세워진 것과, 예산 간양리에 간양골 본당이 세워진 일이었다. 후자는 나중에 전자로 통합되었다. 1895년에는 아산 공세리에 본당이 설립되었고, 1898년에는 양촌본당이 폐쇄되면서 대신 합덕본당이 신설되었다. 이제 내포지역의 천주교는 합덕본당과 공세리본당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 즈음 뮈텔주교는 합덕 일대에서 농지를 사들이기 시작한다. 이는 1930년대 200정보에 가까운 토지소유로 이어지는데, 이는 가난한 신자들을 모아 교우촌을 만들고 그들에게 소작을 주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게 하면서, 교회 역시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합덕교회가 있는 합덕리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천주교우촌으로서, 30명이 넘는 사제와 50명이 넘는 수녀를 배출하였다.

 

4) 동학

내포지역에 동학이 들어온 것은 1883년경이었다. 내포의 동학은 덕산의 박인호, 예산의 박희인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전 간행, 광화문 복합상소 등에 참여했다. 내포지역의 동학이 이같이 세력을 급속히 확대시켜 나갔지만, 최시형의 순회지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보안과 도피 등에 불리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이 주로 평민과 천민들이 많이 사는 깊은 산간지역 또는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넓혀간 것이 확인되는 바, 내포지역에서 동학 세력이 확산되어 간 것 또한 같은 배경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내포지역에서 가장 보수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 홍주지역보다 연해지역인 태안, 서산, 해미, 면천, 당진, 예산 지역의 동학세력이 강하였음은 이를 말해준다.

189312월 합덕에서는 농민봉기가 있었다. 이는 전 병사 이정규의 수탈에 항거하는 민란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이정규는 도망하고 말았다. 18941월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3월 들어 무장을 기점으로 제1차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자 내포지역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4월 서산에서는 동학도들이 모여 동학도를 괴롭혀오던 이진사를 징치하였다. 7월 들어 전라도 일대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이른바 집강소시기가 시작되자, 충청도 각지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홍주, 서산 일대의 양반들은 피난길에 올랐고, 홍주목사 이승우는 홍주성을 지키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홍주성에서 파견된 안무사 김경제는 914일 태안으로 가서 서산, 해미, 태안의 농민군 지도자 30여 명을 체포, 투옥하였다. 지도자들을 처형하면 나머지 동학도를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동학도들은 예산대접주 박희인에게 보고하였고, 박희인은 보은의 최시형에게 보고하였다. 결국 최시형은 체포된 접주들을 구출하기 위한 봉기를 지시하였고, 예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 일대의 동학도들은 101일 일제히 집결하여 태안과 서산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안무사와 서산, 태안 군수를 때려 죽이고, 처형 직전에 있던 동학 지도자들을 구출하였다. 또 덕산의 박인호 접도 기포하였고, 이창구의 면천 동학도도 보령 수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자 홍주 목사 이승우는 유회군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동학군 진압에 나섰다. 관군은 보령 오천 수영과 예산 목소에서 동학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박희인, 박인호가 이끄는 동학군들도 해미의 여미평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먼저 홍주를 치고,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1024일 해미 여미벌에 집결한 농민군 15,000명은 인근의 승전곡(현재의 당진군 면천면 사기소리)으로 이동하였다. 이 곳에서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부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일본군과 관군은 패퇴하여 홍주성으로 들어갔다.

농민군은 면천, 덕산을 거쳐 예산 신례원쪽을 진출하였다. 이는 아마도 홍주성 공격에 앞서 예산, 대흥 등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홍주목사는 바로 관군을 파견하였는데, 1026일 신례원 전투에서 농민군은 이번에도 관군을 격퇴하였다.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은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고, 당시 전봉준의 동학군과 싸우기 위해 공주성으로 내려가던 장위영의 이두황군은 명령을 받고 신례원쪽으로 올라오게 된다. 경군의 북상 소식을 들은 내포 동학군은 다시 홍주성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028일 홍주성 공격을 시작하였다. 해가 지면서 시작된 본격적인 전투에서 농민군은 동문(조양문)쪽을 집중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낳은 채 홍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은 114일 해미성으로 들어갔다. 117일 이두황의 장위영군 1,800여명과 윤영렬이 이끄는 천안 의병 4백여 명은 해미성 공격을 시작하였고, 농민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해미성에서 물러나와 서산을 거쳐 태안 방면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전투력을 상실하였고, 결국 해산한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되어 1111일과 14일 농민군 주도자 48명과 30명을 각각 처형하였다.

내포농민군의 활동은 이처럼 패배로 끝났지만, 당시 전봉준의 동학군 주력의 공주 전투 진압에 참여하려던 장위영군과 일본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내포의 동학군 진압을 지휘한 장위영의 이두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일본 낭인들을 도운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1907년 이후 귀국하여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는 등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홍주목사 이승우도 1895년 을미의병 당시 의병에 참여하는 듯 하였다가 배신하여 의병장 김복한, 이설 등을 체포 투옥하는 등 기회주의적 인물이었다.

 

5.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과 그 활용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포지역은 불교, 유교, 천주교, 동학 등과 관련된 많은 역사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다. 이는 흔히 지배층 문화와 기층문화의 공존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문화적 다양성, 개방성, 진취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한 측면 외에도 내포지역은 근대 이후 또 다른 문화적 특성을 형성해왔다고 할 수 있다. 즉 한말의 항일 의병, 일제강점기의 3.1운동청년운동신간회운동과 같은 민족운동, 노동운동농민운동형평운동과 같은 사회운동도 내포지역의 역사와 관련해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내포지역에서의 이와 같은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은 충청도의 다른 지역, 특히 금강문화권과 비교할 때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관련된 인물들도 다수 배출되었다. 예를 들어 동학천주교의 박인호이종일, 민족대표 33인의 한용운,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상해 홍구공원의 영웅 윤봉길,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인 것이다. 이는 이 지역의 인물들이 새로운 사상을 쉽게 받아들여 소화하는 보다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4) 또 이 지역의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학의 학풍은 보수적 측면을 갖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 지역 출신들로 하여금 타협과 변절을 거부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기도 했다. 때문에 타 지역 출신들이 갖고 있는 내포지역의 이미지 가운데 애국충절, 충의지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35)

어떤 지역이든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그 나름의 문화적 정체성을 획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은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도 일정한 연속성을 갖는다. 한 지역의 역사문화관광자원의 개발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일 것이다. 안동문화권이 유교를 내세우고, 공주문화권 내지 금강문화권이 백제와 유교를 내세울 때, 내포문화권은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사실 內浦文化圈에는 이미 內浦가 없다. 70년대 이후 진행되어온 무차별적인 방조제 건설과 해만 간척 사업으로 인하여 내포는 이미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그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 홍성을 중심으로 한 충남 서북부를 내포문화권이라 부를 때, 그나마 남아 있는 내포를 어떻게 보존하고, 그 흔적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포가 낳았던 역사문화적 자원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수많은 포구의 흔적들,36) 그 포구를 통해 들어왔을 새로운 문화, 즉 불교와 천주교의 유적들이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내포지역의 역사적 현장들을 제대로 보존, 복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연해지역이라는 위치로 인해 다수 존재했던 읍성과 산성 등 관방유적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는 해미읍성 하나 정도가 제대로 복원되어 남아 있지만, 홍주나 서산과 같은 다른 읍성들도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도록 복원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복원이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진 형태로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작은 고을의 객사가 큰 고을의 객사보다 규모가 크게 지어져 복원된다면 이는 역사의 왜곡이다. 해미읍성에 대해서는 자세한 고지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는데, 이는 하루 빨리 바로잡혀져야 할 것이다.

내포지역의 역사적 현장 가운데 한말 항일의병과 동학농민봉기가 있었던 곳들이 제대로 정비되어야 한다. 우선 홍주성의 제대로 된 복원이 시급하다. 나주의 경우처럼 홍성군청을 성밖으로 옮기고, 성 안에 객사와 주요 관아들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또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관군에 승전을 거둔 승전곡(사기소리)과 신례원에는 이를 기념하는 시설들이 들어설 필요가 있다. 또 동학군이 패전한 해미읍성과 홍주성에는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라도 우선 세워줄 필요가 있다. 또 한말 홍주의병은 을미의병과 병오의병 등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특히 병오의병은 을사조약 이후 맨 처음 일어난 의병임에도 불구하고 의사총만 있을 뿐 그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전시관과 같은 시설물이 전혀 없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천주교의 경우, 합덕성당과 보령 갈매못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신리공소는 이제야 정비에 들어갔고, 해미읍성에는 아직 그들을 수용했던 옥사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의 솔뫼성지도 아직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유교의 유적지와 관련해서는 향교와 서원, 그리고 남당이나 외암과 같은 인물들을 소개하는 전시관들이 있었으면 한다.

 

또 역사문화자원을 관광지로 활용한다고 정비하는 경우, 유적지 정비가 마치 새로운 건물과 주차장을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가능하면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유적지 정비이다. 또 그 마을이나 지역의 정체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솟대나, 제주도에나 있었던 방사탑을 마구 세우는 경우도 있다. 보도에 의하면 내포문화권의 개발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투자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 유적, 사건, 인물과 관련된 연구에 투자되는 비용은 얼마나 될 것인지 궁금하다.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않은채, 유적지를 정비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구상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현장을 찾은 관광객에게 아무런 감동이나 흥미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 가도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것들이 내포지역에도 있다면 무슨 이유로 내포지역을 찾을 것인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내포지역만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줄 때, 성공은 보장된다. 내포지역에서 가장 잘 정비된 전시관은 윤봉길의사기념관이다. 그곳에는 의사 윤봉길의 폭탄 투척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의 삶의 흔적들이 함께 숨쉬고 있다. 이 전시관에서 윤봉길은 폭탄 투척의 영웅만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을 가진 진정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러한 수준의 전시관이 가능하게 된 것은 가족들의 훌륭한 자료 보존 노력과, 수많은 연구자들의 연구와 자료 수집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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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청남도한남대학교충청문화연구소,島嶼誌, 3장 문화배경과 역사적 변천(이해준 집필), 364

 

2) 서해의 조운로는 서천 연도 동쪽 - 보령 원산도와 고대 삽시도 사이 - 서산 안흥진가의도 사이 - 당진 난지도 - 부천 영흥도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임선빈, 내포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역사문화적 성격, 2003)

 

3) 고려사40 세가 공민왕 134월 정유, 42 세가 공민왕 102월 기사 등

 

4) 선조실록, 27916일 신묘

 

5) 선조실록, 3096일 계사

 

6) 선조실록3099일 병신

 

7) 선조수정실록2971일 병인

 

8) 영조실록13827일 계미

 

9) 여지도서충청도 홍주. 임선빈, 내포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역사문화적 성격」 『』

 

10) 정조실록1917일 경인

 

11) 擇里志八道總論 忠淸道條.

 

12) 최남선, 조선상식:풍속지리제도편2, 인문류, 內浦維麻

 

13) 이는 1861년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한 베르뉘 주교가 조선교구를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눌 때, 홍주 이북을 상부내포, 홍주 이남과 태안반도 일대를 하부내포라 부른 데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최영준, 19세기 내포지방의 천주교 확산」 『대한지리학회지344, 1999, 395쪽 참조.

 

14) 임선빈, 21세기를 향한 충남의 신 정신문화 창조」『열린충남15, 충남발전연구원, 1999.4

 

15) 최영준, 앞의 글, 395

 

16) 광해군실록7722일 정묘

 

17) 현종개수실록2714일 신묘

 

18)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충청도편, 117

 

19) 같은 책, 262-263

 

20)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시 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 명부참조

 

21) 효종실록209617일 계미

 

22) 숙종실록6819일 을사

 

23) 인조실록9112일 신축

 

24) 숙종실록20314일 임자

 

25) 최완수, 내포지역의 불교」 『열린충남18, 2002. 이하 내포 불교에 대해서는 최완수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하였음.

 

26) 이하 내포 유학에 대해서는 이성무, 내포지역의 지성사」『열린충남18, 2002를 참조하여 정리하였음.

 

27) 윤종빈, 조선후기 내포지역 유학자의 역학관 - 남당 한원진을 중심으로-」『동서철학연구29, 2003

 

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

 

29) 김상기, 한말 일제하 내포지역 성리학의 학맥」 『지방사와 지방문화7-1, 2004.5.31 발간 예정

 

30) 곽호제, 조선후기 덕산지역 여주 이씨가의 학문적 성격 -서학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같은 책

 

31) 이정우, 조선후기 內浦지역 書院·祠宇建立運營性格, 같은 책

 

32) 김수태, 조선후기 내포지역의 천주교 확산」『지방사와 지방문화7-1, 2003.5.31 발간 예정

 

33) 이상의 천주교 관계 서술은 최영준, 앞의 글과 김수태, 앞의 글을 참조하였음.

 

34) 또 근대 이후 이와 같은 새로운 사상들의 수입이 일찍이 가능했던 것은 내포지역이 당시 외래 문화 수입의 통로였던 인천과 뱃길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는 점도 중시되어야 한다.

 

35) 김용웅, 내포지역의 역사문화관광자원과 개발방향」『열린충남18, 2002, 1, 110

 

36) 서산의 명천포구, 아산의 선장포구가 가장 중요한 곳인데, 이 곳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

 

 

<출처: http://blog.daum.net/ma2dongpoong/8848885 솔롱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