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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맑은 물은...

백수.白水 2011. 12. 16. 14:17

감악산아래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에서 5년간 살다가

임진강유역 北岸에 위치한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로 이사했다.

임진강유역은 백제의 초기영역, 경치도 아름답지만 고대유물과 유적이 많다.

앞으로 이곳에 살아가면서 역사지리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현지답사를 하면서 사진과 글을 올리려한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새들(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해북도 판문군과 경기도 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로 흘러드는 강.


옛날에는 더덜나루(다달나루)라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임진강이라 하였다. 임진강의 ‘임(臨)’은 ‘더덜’ 즉 ‘다닫다’라는 뜻이며 ‘진(津)’은 ‘나루’라는 뜻이다. 그밖에 ‘이진매’ 즉 ‘더덜매’(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이라고도 하였다.


자연환경임진강의 길이는 254㎞이고 유역 면적은 8,118㎢로서 북한에서 9번째로 넓은 유역 면적을 갖고 있으며, 한강의 제1지류이다. 전체 유역 면적 중 남한 지역이 약 3,008㎢, 북한지역이 5,108.8㎢를 차지하고 있다. 강원도 북부를 흐르면서 고미탄천(古味呑川)과 평안천(平安川)을 합류하고, 경기도 연천에서 철원·평강 등을 흘러온 한탄강(漢灘江)과 합류한다. 고랑포를 지나 문산 일대의 저평지를 흐르는 문산천과 합치고 하구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까지는 고랑포까지 배가 다녔고 소형 선박은 안협(安峽)까지 운항할 수 있었다. 강의 중상류 지역은 경기도의 동북단으로 황해도·강원도 등과 인접하며, 동쪽으로는 광주산맥의 지맥이 뻗어 지장봉(地藏峰, 877m)·보개산(寶蓋山, 724m)·향로봉 등 일련의 험준한 산이 있다.


추가령구조곡을 사이에 두고 마식령산맥과 마주하며 그 지구대를 임진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차탄천(車灘川)·한탄강 등을 합치면서 적성 부근에서 유로를 서남쪽으로 바꾼다. 용암대지 주변의 지형은 화산암류와 편마암 및 변성암 계통이 주를 이룬다.


이들 하천이 합류된 유역에는 비교적 비옥한 평지를 많이 만들어서 쌀·밀·조·옥수수·고추·잎담배 등의 생산이 많다. 하류 유역에는 파주시·장단군 등이 있으며 한강과 함께 넓은 경기평야를 형성한다.


임진강의 상류는 소나무, 참나무를 기본으로 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임진강의 연평균 흐름양은 266㎥/s이며 유출률은 33ℓ/(s·㎢), 연유출높이는 1,031㎜, 연유출계수는 0.7, 연증발량은 452㎜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1,483㎜로서 강수량이 많은 지대이다.


최근에는 북한에서 식량부족을 메우기 위해 옥수수를 재배하는 밭을 만들고 땔감을 위한 삼림벌채를 하여 토사가 하천으로 유입되어 토양의 유실량이 많아졌다.


임진강 유역에서 용암은 플라이스토세 중기의 종식 무렵 분출했을 가능성이 크며, 용암층 위로는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들어와 2만여 년 전 무렵까지 계속된 퇴적운동으로 오늘날과 같은 퇴적층이 만들어졌다고 해석되는 연구가 있다.


그리고 임진강 하류인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 일대에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에 용암대지가 만들어지기 전에 형성된 하천퇴적층 내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 유물은 용암대지 말단부보다 하류에 위치하며 이 유물이 발견되는 퇴적층이 용암대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쌓인 것이라는 단서가 된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이 하안단구와 용암대지 아래에 있는 백양리층 사이의 층서관계는 불확실하나 앞으로의 구석기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예로부터 임진강 유역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이 되어 역사적인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라 하였고 연천군에는 고구려 칠중현의 치소인 칠중성(七重城)이 있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이 강에서 백제군을 대파시킨 일이 있고, 신라 진흥왕은 이 강의 남쪽을 점령하여 고구려와 경계한 적이 있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정복하였을 때에는 칠중성(積城 :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부근에서 이 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한 일이 있다.


강 하류 쪽의 파주군 중심지인 금촌은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농산물이 풍부하고 소하천들이 많이 발달하여 있어 소규모의 주운(舟運 : 배로 화물을 나름)도 행하여진다. 문산읍은 경의선의 종점이며 판문점이 있어 남북 분단의 상징이며 군사상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


봉서산(鳳棲山, 216m)은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산정에 산성을 쌓아 역사적으로 알려졌다. 문산 서북쪽의 임진진(臨津鎭)은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연천군 전곡읍에서 중요한 지류인 한탄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는데, 그 전곡읍 전곡리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임진강 南岸 파주 적성면 객현리 앞에서 임진강 하류 쪽으로비룡대교와 주월리 쪽을 바라보고 찍었다.

 

임진강 유역의 연천군은 본래 38선 이북이 되어 군정법령 제22호에 따라 38선 이남에 남은 지역을 파주군으로 편입시켰다가 1954년 10월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대체로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을 갖추게 되었다.


장단군의 고랑포는 편리한 주운 때문에 물산의 집산지가 되던 곳이다. 장단의 임진강변에 있는 장단석벽(長湍石壁)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많이 찾던 곳이다.


하류 쪽에는 동파적벽(東坡赤壁)이 있으며 화장사·심복사·경순왕릉 등의 유적이 있다. 강의 중상류 지역은 6.25의 격전지로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으나, 보개산·문인폭(文人瀑)·연취암(蓮醉巖)·용추(龍楸)·문인석(文人石) 등의 명승고적이 도처에 많이 남아 있다. 또한, 강의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고 판문점과 임진각은 남북 분단의 상징적인 곳이 되었다.


북한은 2009년 9월 6일 사전 예고 없이 임진강 상류의 황강댐에서 물을 방류했다. 당시 무인자동경보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아서, 임진강에서 야영하거나 낚시하던 6명이 급류에 휩쓸려 숨진 사건이 있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강건너 마을이 적성총과 고인돌이 있는 백학면 학곡리.  바로 코앞이고 겨울에는 얼음위로 금방 건널 수있다.


지금의 지리 관련 서적들에는 대개 임진강이 한강(漢江)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강으로 기록을 하고 있지만, 옛 문헌에는 이 강을 한강의 지류로 보고 있다. "한강은…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을 합하고, 통진(김포군)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동국여지승람>


즉, 임진강은 한강에 합류하여 한강에 들어간다는 것이 옛 문헌들에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임진'은 본래 고구려의 '진임성(津臨城)' 또는 '오아홀(烏阿忽)'인데, 신라 경덕왕 때 '임진(臨津)'으로 고쳐서 개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 후, 신라 문무왕 때인 667년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칠중성(七重城)'(지금의 파주 적성) 부근에서 이 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한 일이 있는데, 당시 이 강을 '칠중하(七重河)'라고도 불렀다. '칠중하'라 한 것은 이 강의 흐름이 굴절이 심해 당나라 사람이 '호로하(瓠蘆河)', '표하(瓢河)', '과천' 등으로 부른 것을 의역한 것이라 한다.


옛날에는 강을 나타낼 때 '하(河)'와 '강(江)'이란 말을 썼는데, 작은 강에서는 '하'란 말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나루를 나타낼 때는 '도(渡)', '진(津)', '포(浦)' 등의 말을 썼다. 이 중 가장 큰 나루를 의미한 것이 '도(渡)'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또 '강(江)'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임진강도 원래는 나루와 그 강을 가리키면서 그냥 '임진(臨陣)'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뒤에 '강'이란 말이 덧붙어 '임진강'이 되었다.


임진강의 갈림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한탄강(漢灘江)'이다. 임진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을 '교하(交河)'라 한다. 이 말은 두 줄기의 큰 강이 서로 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출처: 배우리. 임진강>

 

 

임진강의 옛 이름에 대한 고찰

칠중하는 호로하(瓠蘆河), 표하(瓢河)의 의역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때 진임성(津臨城)을 통일신라 경덕왕 때 임진(臨津)현으로 고쳐서 개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고 나온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임진(臨津)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으나 임진강이라는 강명을 상류에서 하류까지의 전칭(全稱)으로 사용하게된 것은 후대의 일로 생각된다.

내가 아직 내가 상고(詳考)치 않아 그시기를 가늠할 수 없으나 국토지리연구원의 한국지리지/ 금강에 관한 지명기록을 보면 강의 하류인 개성부근의 이름인 임진이라는 지명이 후대(後代)에 강 상류에서 하류까지를 지칭하는 전칭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금강 지명을 사용하나 아직 유로 전체의 지명은 아니었고 공주일대의 유로만 해당되었다. 조선후기사료인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웅천대신 금강발원지부터 서천까지 서술하여 지명이 部分 稱으로부터 전칭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인다. 成海應 이 편찬한 硏經濟全集에서도 장수군 수분치 부터 서천포에 이르는 유로를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전칭으로서의 금강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동국문헌비고에서도 금강지명은 전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전기까지 전칭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발원지에서 최 하류까지를 하나로 인식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들어 산줄기 인식처럼 금강은 한줄기로 이해하면서 전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무릇 지명이란 산이나 강 이름에서 고을의 이름이 유래되기도 하고, 거꾸로 마을이나 고을이름에서 산이나 강 이름을 취하기도 한다.


'칠중하'라 한 것은 이 강의 흐름이 굴절이 심해 당나라 사람이 '호로하(瓠蘆河), '표하(瓢河)', '과천' 등으로 부른 것을 칠중하(七重河)로 의역한 것이라 하는 이가 있으나 七重河는 七重縣(難隱別)지역을 흐르는 강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

 

 

七重河라는 강 이름은 호로하(瓠蘆河) 또는 표하(瓢河)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당나라와의 전투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三國史記 백제 온조왕 18년(AD 1년)條에 [10월 말갈이 엄습하므로 七重河에서 싸워 추장을 사로잡아 잡아 마한에 보냈다]고 처음 등장한다.


다만 기록에는 칠중하(七重河)라는 강 이름이 칠중성(七重城)이라는 지명보다 더 이른 시기에 등장하니 어떤 이름이 먼저 생겼는지 그 선후를 알 수 없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칠중성을 한자 그대로 일곱 겹으로 해석하며 강의 굴절이 심한 호로하와 연관시키는데 이것은 무리다. 호로하는 당나라사람들이 부른 이름이라면 한자 그대로 굴절된 모양이 표주박을 닮은 것이니 그럴듯하지만


칠중(七重)이란 말은 고구려 말로 ‘난은별‘이다.

[삼국사기 雜志 제6 고구려조에 【七重縣(一云 難隱別)]


나는 ‘난은별’을 ‘넓은 들’로 본다.

참조: http://blog.naver.com/ybm0913 /임진강 4.칠중성과 난은별의 지명유래


따라서 호로하나 표하는 호로고루성이 있는 지역의 강 이름을 지칭했었고

칠중하는 칠중성이 있는 지역의 강 이름이었으며

임진이라는 이름은 하류인 개성부근의 이름이었는바 나중에 강의 전칭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호로고루(瓠蘆古壘)성은 ‘호로고루’라는 말을 고구려 말이라고도 하나, 호로가 당나라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든 아니면 고구려지명에 많이 나오는 홀(忽)과 같은 말이든 “호로하(瓠蘆河)지역에 있는 옛 보루(고루)라는 말”로 당시의 고유지명인‘호로(瓠蘆)’에 있는 옛 성(古壘)이라는 뜻으로 후대에 붙인 이름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