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전날 가마솥을 걸고 시래기를 삶았다. 시골생활 5년의 노하우, 블록을 몇 장 쌓고 걸치니 시멘트를 발라 아궁이 제대로 만든 것보다 오히려 불길이 더 잘 빨려 들어간다. 폼과 형식에 얽매이는 것보다 때로는 처갓집 벌초하듯 대충대충 사는 것이 편할 때가 많다.
시골에서의 겨울나기, 춥고 할 일없다고 땅굴파고 겨울잠 잘 수 없으니 어쩔 수없이 冬安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대보름까지 행해지는 스님들의 수행보다 한 달은 더 정진을 해야 한다.
마을회관에 나가 술 한잔하며 화투치고 놀다가 한 두 끼 식사를 해결하고 들어오면 무료하지 않게 하루를 보낼 수 있겠지만 잡기에서 손을 뗀지 몇 년 지나니 이제 흥미를 잃었고, 평생 먹어야할 량을 젊은 날 다 먹어버렸으니 술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도 불편해서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간간히 밖으로 나도는데 어제는 오랜만에 전에 살던 동네 친구를 만났다.
얼마 전 그 친구가 이웃 동네 친구들과 함께 넷이서 식사를 하고 모두를 태운 후 국도를 달려오는데 동네에서 나오는 차가 갑자기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바람에 차 오른쪽이 와장창 찢기고 형편없이 망가져 버린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연락을 받고 내가 사고현장에 달려가 보니 가해차량역시 많이 부서졌고 추돌의 여파로 다른 차 한대도 피해를 봤는데 다행히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보험처리를 하는 걸로 수습이 됐다.
후유증을 염려해 모두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며칠 후 보험회사와 합의로 네 명 모두 200만원씩 피해보상금을 받았고 그 친구차량수리비는 400만원이 나왔는데 80%는 가해차량의 보험에서, 나머지 20%는 피해차량에서 처리가 됐다고 한다. 술 담배를 하지 않으니 어느 곳을 가게 되더라도 이친구가솔선해서 자기차로 친구들을 찾아가서 태우고 끝나면 이동네 저동네로 돌아다니며 귀가까지 시켜주는 마음이 참 넉넉한 친구다.
금전적으로만 따지자면 자기차를 제물로 바치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200만원씩의 거금, 그 행운을 친구들에게 안겨준 셈이고 그 친구들은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다. 나는 그 친구들이 한 50만 원정도 씩은 갹출해서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고맙다며 전해준줄 알았다. 셋 중에서 형편이 가장 어려운 친구 A가 100만원을 가지고 왔더란다. 고마워서 반만 받고 반은 되돌려줬는데 잘사는 친구 두 사람 B와 C는 소식을 딱 끊더란다. 오히려 돈을 건네준 친구한테 뭐하려고 돈을 줬냐며 책망을 했단다. 두어 달 전쯤 B라는 친구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을 때 승차한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받은 보험금을 통째로 갖다 줬더니 고스란히 다 받아놓고서는 말이다.
화투를 쳐보면 상대방의 감춰진 속이 제대로 들어나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주변사람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다. 똥 누러 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틀린 사람이 수두룩하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세상,
가까운 사람에게 당한 상처가 훨씬 아프다. 그 친구 마음을 많이 다쳤다.
빌어먹을,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적이 아닌 종족에게 물린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날이 갈수록 지독하게 가슴을 후벼 판다.
아픔은 영혼을 황폐하게 한다.
스스로 매몰하게 한다.
자신을 묻어버릴 곳을 찾아 헤매게 한다.
< 내 마음의 표범 한 마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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