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서 편지 교육… “너희들이 독서하는 건, 내 목숨 살리는 일”
전남 강진에 유배간 지 10년째 되던 해인 1810년 다산이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에 쓴 편지인 ‘하피첩’.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이 하피첩은 9월 9일까지 경기 남양주시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 한강의 삶과 꿈’에서 볼 수 있다.
‘하피첩’에서 다산이 두 아들에게 남긴 교훈인 경직(敬直), 의방(義方)은 ‘(군자는) 안으로는 마음을 곧게 하고 밖으로는 불의를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난다’는 뜻으로 선비들이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를 담고 있다(위). 다산이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다산초당. 실학박물관
《 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유배생활을 시작할 당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마흔이었다. 그에게는 열아홉, 열여섯의 두 아들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고3과 중3의 나이. 한창 공부하고 인성을 다듬을 때였다. 하지만 다산은 머나먼 유배지에서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두 아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의 기러기 아빠들보다 사정이 더욱 딱했다. 그랬기에 그의 교육은 엄격했지만 간절했다. 》
다산의 편지를 편역한 책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를 펴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아들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 26통을 중심으로 그의 자녀교육법을 살펴봤다. 본문의 인용문은 다산이 쓴 편지의 내용이다.
“떠나올 때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몹시 안됐더라. 늘 잊지 말고 음식 대접과 약 시중을 잘해드려라.”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나오는 첫 편지는 1801년 6월 17일(음력) 첫 귀양지인 경북 포항 근처의 장기에서 쓴 글이다.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전한 다산의 첫 가르침은 ‘효’였다. 유학자인 다산의 가르침은 항상 ‘효제(孝悌)’를 기반으로 했다.
“학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용인 효와 제로 근본을 삼고, 예(禮)와 악(樂)으로 수식하며, 정치와 형벌로써 도움을 주고 병법(兵法)이나 농학(農學)으로써 그 이익을 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폐족(廢族)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가 그것이다. 반드시 먼저 효제를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다산은 효제를 기반으로 한 독서를 강조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함을 근본으로 한 후에야 독서를 통해 학문의 길도 열린다는 것. 실제로 다산의 수많은 편지에서 독서 이야기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둘째 아이가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인 다산은 두 아들이 사서오경만을 읽고 배우는 학자나 선비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정치학 형법학 병법 농학 부역(賦役) 재정학 등으로 학문의 범위를 넓히기를 요구했다. 실학에 마음을 기울이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에 대한 독서를 권했으며 의학에 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세상의 일이나 나라의 정치에 관심을 버려서는 학자도 아니요, 선비도 아니며, 독서군자가 아니다. 나라를 근심하고 세상에 대하여 걱정하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다산은 성리학과 실학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실학적으로 사고하고 실학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쳤다. 성리학자 주자(朱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모두 이(理)로 해석하여 이학(理學)이라는 관념의 세계로 유학의 체계를 집대성했다. 다산은 그러한 주자의 이(理)의 세계를 행(行)의 세계로 대치해 실학의 이론을 세웠다. 즉, 인의예지란 일을 행동으로 실천한 후에야 그 이름이 성립된다는 것. “이(理)를 말하는 주자학자들은 인의예지를 각각 낱개로 떼어놓고 이것들이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다만 측은(惻隱)이나 수오(羞惡)의 근본일 뿐이지,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두 아들을 교육할 수밖에 없었던 다산의 편지에는 눈물겹고 애가 타는 내용이 담겨 있다.
“너희들이 정말로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저술한 저서들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것이고 이런 병은 고칠 약도 없을 것이다. 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두 아들에게 책 읽고 공부하기를 권장했던 아버지 다산은 유배 기간에 단 하루, 단 하룻밤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학문 연구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아버지였다. 이를 아는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녀 교육의 본질은 부모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丁學淵)과 정학유(丁學游·‘농가월령가’ 저자)는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추사 김정희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이재 권돈인이나 정조의 사위 해거재 홍현주와 수시로 시와 학문을 논했다. 다산의 제자인 초의대사나 황상과도 절친하게 지내면서 당대의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의 간절한 편지와 가르침에 감복했던 두 아들이 효제의 유교원리를 제대로 습득해 자식의 도리와 형제의 직분을 다했다는 것. 다음은 학유가 죽었을 때 황상이 보낸 위로의 글에 형인 학연이 답으로 쓴 편지의 첫 부분이다.
“내 아우 운포(정학유)가 죽었소. 내가 무슨 마음 어떤 손 어느 겨를에 그대의 편지를 받고, 그대의 편지를 보며, 그대의 편지에 답장을 하겠소.” 정말로 이들은 ‘형제지기’였고 ‘형제동학’이었다. 아버지 다산은 두 아들의 훌륭한 스승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해준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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