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인문학에 길을

5. 아르키메데스

백수.白水 2012. 4. 25. 13:06

“기하학 다 풀기전엔 못간다” 외치자 로마병사가 그의 목을 쳤다

“기하학 문제를 다 풀기 전에는 못 떠난다!(이놈)”

기원전 212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오르티자 섬. 로마군이 1년여의 공략 끝에 드디어 시라쿠사의 마지막 거점인 오르티자를 함락한 뒤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년∼기원전 212년)가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일흔다섯 나이도 잊고 문제 풀기에 몰두하던 아르키메데스는 목에 칼을 들이대며 끌고 가려는 병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로마 병사는 그를 한 칼에 살해했다.

18세기에 활동했던 아이작 뉴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함께 ‘역사상 3대 수학자’로 꼽히는 아르키메데스의 학구열과 집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그가 죽기 전 모래사장에 도형을 그려 놓고 문제 풀기에 골몰했다는 설도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알로 우주를 채우면 10의 56제곱 개면 된다는 생각을 할 만큼 ‘큰 수’나 모래에 관심이 많아 ‘모래를 세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르티자의 유일한 모래사장에는 요즘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려는 수학자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시라쿠사는 기원전 212년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기 전까지 약 500년간 그리스의 해외 식민지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의 하나였다. 시라쿠사에서 나고 자라 사망한 아르키메데스는 다양한 무기를 발명해 로마로부터 시라쿠사를 지키려 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6개의 대형 오목렌즈를 둥그렇게 붙인 요면경(凹面鏡)은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바다로 접근하는 로마 해군 선박에 불을 일으켜 태웠다. 현재 시라쿠사의 명문 과학고인 ‘리코 과학 코르비노’의 실내 현관에는 요면경을 끼고 먼바다에 있는 로마군의 배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르키메데스의 조각상이 서 있다. 조각상 기단에는 ‘거울 발명, 로마의 배를 태우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수학교사 스키아보 엠마누엘레 씨(48)는 “그는 로마로부터 시라쿠사를 구한 위대한 인물로 최고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다”며 “학생들에게 귀감으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가 성능을 개선한 투석기는 유효 거리가 200m 이상으로 당시 로마군 투석기보다 2배 이상 멀리 나가는 가공할 만한 전투장비였다. “나에게 지렛대와 지렛점을 주면 지구를 움직여 보이겠다”는 말을 남긴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 원리를 응용한 다양한 투석기를 제작했다.

아르키메데스의 ‘다연발’ 활은 탄력을 얻기 위해 구부리는 나무판이 여러 겹인 데다 사거리가 다양한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쏠 수 있다. 적이 볼 수 없는 참호나 성 안에서 쏘면 많은 병사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켜 로마군의 혼을 빼놓았다고 한다. ‘한 사람의 두뇌가 로마 4개 군단과 맞먹는다’(‘로마인 이야기’)는 칭송을 들었다.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최근 찾아간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의 도시’라고 할 만큼 곳곳에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로마軍에 맞서 시라쿠사 지키려 한 영웅, 사재를 털어 이탈리아 시라쿠사에 ‘아르키메데스 과학박물관’을 세운

안토니오 리토리오 씨가 미국 하버드대 팀과 함께 고증해 재현한 아르키메데스의 ‘다연발 활’ 모조품 앞에서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위쪽 사진). 다연발 활은 길이가 다른 화살을 수직으로 배치해 다양한 거리로 날아간다.

이 박물관에는 아르키메데스가 햇빛을 모아 로마 해군 선박을 불태웠다는 요면경의 모형도 설치돼 있다.

 

시라쿠사 출신으로 대학교수를 지냈던 안토니오 리토리오 씨(64)는 사재를 털어 세운 ‘아르키메데스 과학박물관’을 4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은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각종 무기나 발명품의 복제품을 야외에 전시해 놓은 ‘무기 전시 공원’처럼 보였다. 이곳에는 미국 하버드대 팀과 함께 제작한 ‘다연발 활’도 있다. 리토리오 씨는 “위대한 과학자의 고향인데 번듯한 박물관 하나 없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젠 한 해 1만 명가량이 찾는 명소가 됐다.

오르티자 섬 중앙에는 ‘아르키메데스 플라자’ 분수 광장이 있고, 광장 인근에는 다비드 자미티 씨(32)가 4대째 이어받아 운영하는 ‘레스토랑 아르키메데스’가 있다. 여기선 7.5유로(약 1만1250원)짜리 ‘아르키메데스 스파게티’도 판매한다. 그의 이름을 딴 호텔도 있다.

기업인들과 사회단체가 최근 광장 옆에 ‘아르키메데스 박물관’을 세웠다. 입구에 있는 ‘아르키메데스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대형 그림이 관람객을 맞는다. 아르키메데스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등 역사상 유명한 수학자 20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수학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 ‘원주율 3.14(π=3.14)’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둘레 길이는 원에 내접하는 정다각형보다는 크고 외접하는 정다각형보다는 작다는 원리에 착안했다.

그는 내·외접하는 정 96각형을 각각 그려 원의 둘레 길이를 계산했다. ‘원의 둘레 길이=2×π(원주율)×r(반지름)’이다. 따라서 지름(2r)을 1이라고 하면 원의 둘레 길이가 바로 π에 해당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를 활용해 원주율은 223/71(내접 다각형 길이) < π < 22/7(외접 다각형 길이) 사이의 수라고 계산했다. 다만 223/71, 22/7라는 수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를 소수로 변환해 보면 3.14084507 < π < 3.14285714이다. 현재 사용하는 원주율 3.14159265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물체를 유체에 넣으면 물체와 같은 부피의 유체만큼 가벼워진다’는 사실과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도 알려진 부력도 그가 발견했다. 이는 당시의 기행(奇行)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의 왕 하에론으로부터 연금술사에게 받은 왕관이 순금인지를 알아내라는 의뢰를 받는다. 목욕을 하면서도 이를 궁리하던 그는 몸이 물을 밀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력의 원리를 알아낸 후 “유레카 유레카(알았다 알았다)”라고 외치며 벌거벗은 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쳐나갔다고 한다. 서로 다른 물질은 같은 무게라고 해도 부피가 다르다는 점을 깨달은 것. 그는 왕관과 같은 크기의 순금 왕관을 물에 넣어 밀어내는 물의 양이 다르다는 것을 비교해 본 후 연금술사의 왕관이 가짜임을 알아낸다.

아르키메데스는 생전에 자신의 비석에는 ‘원통에 구(球)를 넣은 모양’을 조각해 달라고 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기둥과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의 체적의 비(3:2)를 처음 알아낸 기쁨을 묘비에까지 새기고 싶어 했던 것이다. 시라쿠사를 점령한 로마의 장군 마르셀루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존경했던 인물로 그가 허망하게 살해된 것을 아쉬워하며 소원을 들어줬다고 한다.

지금은 그의 무덤과 묘비를 찾을 수 없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 법률가 웅변가인 마르쿠스 키케로는 시라쿠사를 방문했을 때 “가시덤불에 덮여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의 유언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다”라고 적었다. 그의 영향으로 가우스, 뉴턴 등 상당수의 후대 과학자들도 자신의 묘비에 업적을 새겼다.  < 시라쿠사=구자룡 기자 > 

타원 면적 구하는 법 완성

 

‘포물선이나 타원 면적 구하기는 소젖 짜기를 닮았다?’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적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포물선이나 타원형에 관한 연구다. 특히 ‘무한 소진법(消盡法)’이라고 불리는 면적 구하기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타원이나 곡선의 함수식만 구하면 적분법을 이용해 쉽게 면적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무한히 많은 도형을 그림으로써 면적을 구했다.

포물선의 경우 포물선과 직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에 삼각형과 사다리꼴의 수를 계속 늘려 가면 곡선으로 둘러싸인 면적에 근접하게 된다. 삼각형과 사다리꼴로 나타낼 수 있다면 쉽게 면적을 구할 수 있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사다리꼴의 수를 늘려가며 포물선 내의 면적을 구해 나가는 모습이 마치 소의 젖을 짜내는 것과 닮았다 해서 ‘착출법(搾出法)’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이 같은 방법은 아르키메데스보다 앞서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수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에우독소스가 고안하고 아르키메데스가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이만근 교수는 설명했다.

에우독소스나 아르키메데스 시대에는 무수히 많은 도형을 그려 나간다는 생각은 했지만 ‘극한’이나 ‘무한’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무한’은 ‘무질서’라고 생각해 기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가 ‘무수히 많은 도형을 그려 면적을 구한 것’은 18세기 아이작 뉴턴과 라이프니츠 시대에 개발된 적분 개념의 원형이 된다. 아르키메데스를 미적분의 선구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적분이란 무한히 쪼갠 조각을 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