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길을

사회주의자였던 내가, 공자의 ‘無知也’에 빠져

백수.白水 2012. 4. 28. 06:42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펴낸 이남곡 씨

 “저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예순 살이 넘어 공자의 ‘논어’를 강의하고, 책을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16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깊은 산골마을. 벚꽃, 살구꽃, 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순서도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휴)을 펴낸 이남곡 씨(67)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8년 전이다. 그의 집 뒤쪽 마당에는 장류사업을 하기 위해 그가 담가놓은 된장, 고추장 항아리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었다.

16일 만난 전북 장수군 논실마을학교 이사장 이남곡 씨는 “기업인들이 공자와 같은 고전을

많이읽는다는데, 인간 중심의 가치를 내세우는 진보운동가들이야말로 논어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는 이 씨가 담가놓은 고추장 된장 항아리들이 보인다. 장수=전승훈 기자

 

“저 앞에 보이는 게 대성산(大聖山)입니다 . 큰 성인, 즉 공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웃 ‘논곡(論谷)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사람들이 주경야독하면서 공자를 읽었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에 정착해서 논어를 강독하게 된 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이 씨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상경해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4년간 복역했다. 1980년대 정토회 법륜 스님의 요청으로 불교사회연구소장을 지내고, 무소유를 표방한 경기 화성 ‘야마기시(山岸) 실현지’ 공동체에서 8년을 살았다. 2004년 아내와 함께 전북 장수에 정착한 뒤론 이웃 주민들과 ‘논어’를 강독하고, 논실마을학교 이사장으로 시골사람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왜 논어를 읽기 시작했나요.
“농촌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수, 전주, 익산 등지에서 귀농자들, 마을 주민들과 2년 동안 함께 읽으며 공부했죠. 처음엔 공자가 봉건제와 군주제, 가부장제의 옹호자라는 생각에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어를 다시 읽으면서 왜 그동안 공자 사상의 탁월함, 특히 인간 지성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비판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논어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로 ‘무적무막(無適無莫·군자에겐 옳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다)’과 ‘무지야(無知也·나는 모른다)’라는 구절을 꼽았다.
“배우기를 즐기는 모습, 이것이 공자가 가진 최대의 매력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호학(好學)’은 ‘나는 모른다’에서 출발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는 과정입니다. 옳고 그름을 쉽게 단정하지 않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진리다’ ‘내 생각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통과 배움은 불가능합니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 무엇이 진리인가를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는 첫 단계인 셈이죠.”

―공자와 다른 사상을 진보성 면에서 비교한다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공자에게 배우려는 것은 아집을 넘어 끝까지 진리를 탐구하려는 정신입니다. 반면 ‘완고한 이념체계’인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 과학을 표방했지만 계급성과 당파성에 치우쳐 과학에서 멀어졌습니다. 이른바 ‘당의 무오류성’이란 말은 가장 완고한 종교임을 나타내죠. 북한에서는 개인숭배로 왜곡돼 마침내 3대 세습이라는 시대착오적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운동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공자가 내세운 ‘정명(正名)’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과거의 좌우, 진보-보수 개념의 고정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힘듭니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문(人文) 운동’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꾸준히 지속되는 인문운동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이남곡 씨의 인생 역정

경기고 - 서울대 법학과 나와 남민전 사건으로 4년 복역
불교사회연구소장 지내다 무소유 공동체서 8년 생활
아내와 전북 장수에 정착해 장류사업하며 인문학 강좌
<장수=전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