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하던 그, 유배의 아픔 이겨낸 건 ‘소명’이었다
8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에서 다산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제에 참여한 지역 학생들이 유배 행렬을 재현하는 거리 행진을
하며 다산의 동상 앞을 지나고 있다(위). 가운데는 유배된 다산이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四宜齋), 아래는 다산초당
정조 24년(1800) 음력 6월 28일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이 떠돌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실학을 적극 지원했던 정조의 죽음으로 남인들은 위기를 맞게 됐다. 나이 어린 세자를 대신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산은 관직을 사임하고 경기도 마현으로 낙향했지만 노론 벽파가 쳐 놓은 덫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신유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치면서 순조 1년(1801) 2월 8일, 다산은 마현에 들이닥친 의금부 관헌들에게 끌려갔다. 지난달 초순에 정순왕후가 사학(邪學) 엄금의 하교를 내렸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오래전에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던 탓에 그만 방심을 했던 것이다.
다산은 관직을 사임하고 경기도 마현으로 낙향했지만 노론 벽파가 쳐 놓은 덫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신유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치면서 순조 1년(1801) 2월 8일, 다산은 마현에 들이닥친 의금부 관헌들에게 끌려갔다. 지난달 초순에 정순왕후가 사학(邪學) 엄금의 하교를 내렸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오래전에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던 탓에 그만 방심을 했던 것이다.
선대왕(정조)의 뜻을 받들고 개혁을 추진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모든 일이 그러하듯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남인 탄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렇다면 자신은 천주교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될 것이다. 국문장에 끌려나온 다산은 자신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천주교 신도들을 고발했다. 그들 중에는 셋째 형 정약종도 포함돼 있었다. 정약종은 매형 이승훈과 더불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믿음을 지켜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학(西學)으로 천주교에 접근했던 다산은 그들과 입장이 같지 않았다.
‘독실한 신자인 셋째 형은 어차피 기쁜 마음으로 순교할 것이다.’ 다산은 그렇게 판단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정약종을 사석(死石)으로 활용키로 한 것이다. ‘아우 약용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정약종도 동생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내다보고 거처를 옮겨 형제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던 정약종은 적극적으로 다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밝히고 나섰다. 상대의 수를 정확히 간파하고 빠져나갈 대책을 마련한 동생과 생사를 초월한 형제애로 다산을 도운 형. 덫을 놓고 정약용을 옭아매려던 노론 벽파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산은 사지를 빠져나왔고 먼 남쪽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경북 장기(포항)를 거쳐 전남 강진에 당도한 다산은 위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 밀려온 것이다. ‘이대로 잊혀지는 것이 아닐까.’ 잊혀진다는 것은 서럽고 두려운 일이다. 다산처럼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람은 새벽에 정신이 제일 맑다.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만큼 두려움도 가장 심하게 느낀다. 잔월이 영창을 통해 은은한 빛을 뿌릴 때면 심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다산은 가족들을 강진으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죄인의 신분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지런히 친지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면 외로움은 극에 달했고 이대로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떻게 하면 밀려오는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생각을 낙천적으로 하고 바쁘게 살아야 했다. 이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신유사옥에 함께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 형 정약전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외딴섬으로 유배된 정약전은 어민들과 어울려 물고기 족보(‘자산어보’)도 만들고, 학동들을 모아 서재를 열며 적극적으로 외딴섬에 적응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여인도 맞았고 아들도 얻었다. 그런 둘째 형을 보며 다산은 용기를 얻었고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게 됐다.
같은 처지의 형제지만 답을 구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정약전이 적극적으로 현지에 동화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데 비해 다산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실학과 민초의 삶을 접목해 앞으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소명(召命)으로 다산은 붓을 들었다. 그것이 선대왕의 뜻을 받들고 셋째 형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해서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유배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온다. 흔히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위기가 저절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본질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대응해야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다산이 이른바 ‘물먹는 시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겼냐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개혁가들은 대부분 낙천주의자들이다. 박영효는 훗날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김옥균을 ‘형편없는 허풍쟁이’라 평했다. ‘신해혁명’의 주역인 손문의 별명은 ‘대포’였다. 그런 이들은 위기에도 잘 적응한다. 하지만 다산은 선천적인 낙천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명을 정확히 헤아리고 정진해서 이 시기를 잘 극복해냈다. 오늘날 다산이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추앙을 받는 건 18년의 유배 생활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됐던 조선 사회의 개혁을 추진하고 개인적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했던 다산이 새삼 그리워진다.
<오세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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