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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의 향기]<10·끝> 1930년대, 실학사상 재조명 나선..

백수.白水 2012. 5. 15. 16:02

“식민지 해방시킬 유일한 정법가” 역사속의 다산을 다시 깨우다


 

 

1934년 9월, 본보에 6회에 걸쳐 연재된 정인보의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오른쪽 지면)은 신문을 통해 실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알린 효시이며, 1938년 12월부터 본보에 65회에 걸쳐 연재된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왼쪽 지면)은 다산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수작으로 인정받는다. 1930년대 지식인들이 다산학 및 실학 연구를 소개하고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 신문과 잡지였다. 그중에서도 동아일보는 가장 앞서갔던 매체로 꼽힌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근세조선의 유일한 정법가(政法家)이다. 아니 상하 오백 년에 다시 그 쌍(雙)이 적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선생 일인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사 연구요,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심혼(心魂)의 명예 내지 전조선성쇠존멸에 대한 연구이다.”(‘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敍論)’·정인보·동아일보 1934년 9월 10일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조선 르네상스의 끝자락에 태어나 조선이 본격적인 쇠퇴기에 접어들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역사 속에서 잠자던 다산을 다시 깨운 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1930년대 지식인들은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동인을 민족 내부에서 찾고자 했다.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이 그 중심에 있었다. 다산에 대한 연구는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인 1935년 전후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다. 당시 이 같은 연구를 소개하고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바로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잡지였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신인 정인보는 1934년 9월 10일에서 15일까지 6회에 걸쳐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을 실었다. 최초의 실학 연구물로 꼽히는 이 글에서 정인보는 다산의 사상이 실학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또 다산을 조선의 탁월한 위인이자 새로운 정법과 문화건설의 실제적 여망을 담은 인물로, 그리고 조선학 운동의 정신적 기폭제로 인식했다. 같은 해 안재홍은 동아일보 자매지인 신동아 10월호에 ‘정다산 선생과 그 생애의 회고’를 기고하면서, 다산을 ‘조선의 대선각(大先覺)이요 대선구자(大先驅者), 문(文)의 제일인자’로 평가했다.

1935년 동아일보는 7월 16일 3면 전면을 할애해 정다산서세백년기념(丁茶山逝世百年記念·서세는 별세의 높임말)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정인보의 ‘다산 선생의 일생’, 백남운의 ‘정다산의 사상’, 현상윤의 ‘이조 유학사상의 정다산과 그 위치’, ‘다산 선생 저술연표’ 등을 실었다. 또 16일 1면 사설을 통해 다산의 유덕(遺德)과 업적을 기려 찬양했다. 조선일보도 같은 해 7월 16일자에 ‘고증학상으로 본 정다산’ ‘다산선생연보’ 등을 실었고, 매일신보는 7월 25일부터 8월 6일까지 10회에 걸쳐 ‘진정한 정다산 연구의 길’을 게재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출판사 신조선사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 영인본 간행 작업을 진행했다. 다산학을 비롯해 실학 관련 기사를 주로 쓴 정인보 최익한 안재홍 등이 여유당전서 출판에 참여했다. 동아일보 등 신문사들은 간행 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38년 여유당전서 76권 400부가 5년여의 작업 끝에 완간되자 10월 28일자에 관련 소식을 크게 다뤘다. 이후 최익한은 1938년 12월 9일부터 1939년 6월 4일까지 무려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을 연재했다. 박홍식 대구한의대 외국어학부 교수는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글은 분량과 내용에 있어 다산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수작으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다산학 17호에 ‘일제강점기 정다산 재발견의 의미, 신문 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을 발표한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영남대 한국근대사상연구단장)는 “일제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년을 전후해 일어난 조선학 운동에서 ‘정다산’은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며 “당시 신문과 잡지는 지식인들이 다산학 및 실학 연구를 소개하고 논의하는 유일한 장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 갔던 매체가 바로 동아일보”라고 강조했다. <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