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인문학에 길을

꽃이 그냥 저만치에 있는 거지

백수.白水 2012. 5. 23. 18:04

박범신의 귀거래사. 모든 것 내려놓고... 고향서 글에 살리라.

 

여름이 지나면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앞으로 10년간은 소설만 쓸 생각입니다.” 등단 39년을 맞은 소설가 박범신(65)이 새로운 문학 도전에 나선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25년간 몸담았던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에서 정년퇴직하는 그는 가족과 떨어져 논산으로 내려갈 예정.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각종 직함도 조만간 모두 정리할 생각이다.

 

서른아홉 번째 장편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문예중앙)를 출간한 22, 그는 자신의 문학인생을 돌아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나의는 말굽이 손바닥에 자라난 한 남자의 야수적 폭력성과 처절한 사랑 얘기를 그린 소설이다.

 

뜨겁게 (작품활동을) 했고, 주위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평가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회한이 남아 있어요. 앞으로 10년 내가 좋아하는 문학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한 가정의 가장, 대학교수, 작가의 세 가지 역할을 하다 보니 문학에 최선을 다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1980년대 신문 연재물을 연달아 선보이며 대중소설 작가로 입지를 굳혔지만 문단의 비판도 높았다. 1993년 절필했다 8년 만에 복귀하기도 했다.

 

“1980년대 연재소설을 많이 쓰면서 먹고살았는데 당시 문학의 최선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게는 이제 안 하려고 합니다.” 두서없이 말이 긴 것 같다” “책에 대해서만 써 달라고 멋쩍게 말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말문을 열었다. 한참 말한 뒤에는 한 대 피워야 겠다며 담배를 입에 물기도 했다.

 

얼마 전 마지막 강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누구다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정작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어요. 나이 예순이 되면 얘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팔렸습니다. 그래서 밤새워 평생 좋아하고 싫어한 것을 따져봤는데 나는 집단을 싫어하고, ()정파적이며, ()계몽주의적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파벌이나 정파에 들지 않아 상처받고 소외된 적도 있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작가란 이름보다 예인(藝人)으로 불리는 게 좋아요. 이 나라는 작가들에게 예술만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 시대를 관통해 왔습니다. 제가 평생 최선을 다하진 못했지만 작가로서 예술가의 자리를 지켜왔다고 자찬할 수 있습니다.” 다작(多作) 소설가로 꼽혀온 그는 쉼 없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글을 쓸 때만 그야말로 완벽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소설을 안 쓰면 우울해지고 삶이 무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드니까 존재론적 고독이랄까.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요. 이 나이에 유명해지고 싶다든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세속적인 욕망은 100% 접었습니다. 나를 추리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이것(소설)밖에 없어서입니다.”

 

지금도 머릿속에 쓸거리가 여럿 있다는 그는 뭘 쓸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작가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래도 신변 정리를 위해 금년에는 신작을 내지 않겠다는 게 그의 이색 목표. 가족과 떨어져 문학청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작가는 골방에 들어가서 글만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며 웃으면서도 청년 박범신의 각오를 밝혔다. 이제 강렬한 표창을 든 청년 작가로 진군해보자. 차선이 아니라 최선으로.”   < 2011. 6. 23. 황인찬 기자. 동아일보>

 

 

 

작가는 오로지 문학으로 발언, 문학은 이념 아닌 인생에 봉사해야

 

박범신의 은교가 영화로 나온다니 기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서가에 있던 은교를 찾아보니 2쇄였다. 책갈피에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이라는 나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세상의 추앙을 받는 칠십 노()시인 이적요의 적요한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든 열일곱 소녀 은교, 스승을 동경하면서도 질투하는 제자 서지우와 이적요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또 하나의 스토리라인이다. 작가 박범신은 은교를 열일곱 소녀로만 보면 소설을 오독(誤讀)한 것이다. 은교가 40이라도, 60이라도 상관없다. 남자였어도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독자가 작가의 주문대로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평론가 신형철은 연애소설이 예술가소설로 육박한 사례라고 썼다. 독자들이 17세 소녀와 노년 시인의 사랑을 담은 애틋한 연애소설로 읽는다 해도 누가 말릴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연애소설이 아님을 강조하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은교는 본원적 갈망의 끝에서 만난 불멸의 가치를 상징한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열일곱 살로 설정했을 뿐이다. 소녀에 대해 노인이 순정을 바치는 내용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 소녀의 이름도 은교라는 중성적 느낌이 나도록 했다.”

 

은교를 갈망의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던데 무엇에 대한 갈망인가.

 

“1993년 절필선언을 했다가 1996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15년 가까이 나를 사로잡은 화두가 갈망이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꿈을 다루었다. 갈망은 깊은 그리움이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 영원성과 불멸, 사랑의 완성과 같은 얻기 힘든 가치에 대한 욕망이다. 그런데 절필의 시기가 내가 늙어가는 시기였다. 절필을 통해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망,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 등 세속적 기득권을 버렸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절필 자체가 문학으로 얻어낸 현실적 기득권에 대한 욕망을 던져버린 행위였다. 그런데 그걸 던지고 나니까 근원에 대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늙어가는 것이 두려웠고 시간은 뭐고,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강력한 물음에 직면하게 됐다.은교는 그것을 가장 정면으로 응시해본 소설이다.”

 

이적요가 곧 박범신이라고 했던데 늙는 것이 두려운가.

 

이적요는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지만 그의 존재론적 발언과 갈망, 추락의 감정은 내 육성(肉聲)이나 다름없다. 늙음을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게 어디 나뿐이겠는가. 삶의 유한성에 대해 모든 이가 고통을 느낀다.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잠시 잊게 하고 있을 뿐, 본원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도저(到底)한 것이다. 나는 늙음을 좀 다르게 본다. 자기변혁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늙는 것이고, 자기변혁을 꿈꾸면 청춘이다. 나는 육체적 쇠락의 사이클에 정신을 내맡기고 싶지 않다. 육체적 기운은 못하지만 내적으로는 열정과 갈망이 화염병처럼 분출을 노리고 있다. 육체적 쇠잔이 정신을 훼손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고, 이적요처럼 반항할 것이다. 나 박범신은 그런 의미에서 청춘이다. 청춘 박범신으로 써 달라.(웃음)”

 

은교에서 당신, 지금 썩은 관처럼 보여!”라는 청년의 말에 노시인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을 느낀다. 농경문화의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삶의 지혜를 지닌 웃어른이고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정보화 시대의 노인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홍수 속에서 변화의 속도에 뒤처진 세대라는 인식도 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지하철에서 10대들하고 자리싸움이나 하는 잉여인간으로 노인을 폄하하는 버릇없는 누리꾼들도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영화화가 결정됐나.

 

“‘은교를 블로그에 연재할 때 이적요의 나이는 77세였다. 책을 펴낼 때 출판사에서 이적요의 나이를 60대로 줄여달라고 하더라. 주인공이 죽어가는 노인이라면 책이 판매가 안 된다고 하면서. 소설은 독자가 읽어주어야 하기에 기분 나빴지만 타협했다. 은교와 만날 때를 69세로, 죽을 때를 70세로 설정했다. 책도 잘 팔렸고 영화제작자로부터 러브콜을 많이 받았다. 정지우 감독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정 감독의 예전 영화를 보니 인간의 밑바닥 본능을 그려내는 데 재능이 있었다. 이런 감독이라면 노인이 갖는 본능, 짐승 같은 면을 잘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해 동의했다.”

 

영화 은교에 대해 만족하는가.

 

세 번쯤 보고서야 영화의 디테일과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원작을 안 읽은 관객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영화는 주제를 비교적 잘 살린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판에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원작의 주제를 충실하게 밀고 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영화 은교에 대해 특별히 칭찬하는 대목은 두 가지. 하나는 서지우가 승용차에 탄 채 추락하는 장면이다. 배우 김무열은 스승에 대한 배신감과 슬픔, 절망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채 추락한다. 원작에 없는 이 장면은 소설이 가질 수 없는 영화의 강점을 드러낸다. 둘째는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 신에 등장하는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지 알아요? 나도 외로워서 그래요, 나도라는 은교의 대사를 꼽았다. 영화에서 가장 야할 수 있는 장면이 이 대사로 인해 정당성과 품격을 갖게 된다.

 

원작자가 영화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왜 불만이 없겠는가. 최대 불만은 이적요의 캐릭터가 너무 순화됐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적요가 혼자서 벌이는 반란이다. 삶의 유한성이라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은 기록이다. 시간에 굴복하지 않고 맞짱을 뜨는 것이다. 사회문화가 정해놓은 늙어가는 양식에 대한 통절한 반역이다. 그런데 돌처럼 단단하게 잘 구조화된 이적요의 고독감과 카리스마가 활자로는 잘 드러났지만 영화로는 잘 표현되지 않았다. 자칫하면 노인의 순정 드라마처럼 읽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 내에 영화라는 장르에 이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요즘처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가벼운 코미디가 판치는 시대에 이런 근원적 주제로 진지하게 찍은 영화에 젊은 관객이 몰리고 있다는 점도 작가로선 행복한 일이다.”

 

은교는 어떤 여자인가.

 

관능적 여자다. 나는 관능을 마음속 폐허로 본다. 은교는 마음속에 폐허를 가진 여자다. 그녀는 열일곱 소녀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여자다. 이런 여자야말로 남자들의 로망이다.”

 

은교를 블로그에 연재했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활동을 하던데.

 

나는 텍스트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텍스트가 좋다면야 그것이 종이이건, 인터넷이건 괜찮다고 본다. ‘은교를 펴낼 때도 출판사를 설득해 ‘e도 함께 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활동도 하고 있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다. 내가 트위터 팔로어 수나 기억하고 있다면 그때부터 나는 정파(政派)주의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인터넷상의 소통을 믿지 않는다. 리플이 달린다고 해서 그게 소통인가. 인터넷에는 깊고 대등한 토론도 없고 연대감을 느낄 수 없다. 혼자 지껄이는 것보다 좀 낫지만 그렇다고 그게 본업이 될 수는 없다.”

 

요즘 일부 작가는 대규모 팔로어를 끌고 다니며 사회적 목소리를 낸다.

 

문학은 이념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봉사해야 한다. 문학은 불행한 사람, 부자유스러운 사람, 상처받은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왔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하는 사람들이 범좌파로 분류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문학이 그런 좌우이념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그런 편협한 정파주의 감옥에 왜 내가 들어가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작가는 혼자 있는 놈이다. 내 편도 집단이 되면 를 만든다. 나는 단독자로서 내 문학을 할 뿐 패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패거리하고 어울릴 거면 정치를 하지, 왜 문학을 하는가.”

 

그는 자신에게도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 이데올로기란 첫째로 문학순정주의라고 말한다. 오로지 문학으로서만 발언하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작가라는 전지적 시점을 의식하고 견지하려고 노력한다. 둘째는 인간중심주의. 역사는 명분을 기록한 것이고 소설은 사람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기록한 것이다. 울고, 웃고, 화내는 내면세계를 기록하면 그게 소설이고 그걸 읽는 독자들은 궁극적으로 명분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올해 대선이 있는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이 뭐라고 보는가.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덕성(德性) 있는 지도자다. 공자는 덕이 있는 정치를 멀리서도 사람이 찾아오는 정치라 했지만 나는 덕성은 부동심(不動心)이라고 본다. 하지만 덕만 있으면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밖에 더 되겠는가. 따라서 대통령은 개별 사안에 흔들리지 않고 미래에 우리 국민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덕성을 갖추고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과묵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명지대 교수로서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쳤는데 요즘 20대들 정말 힘든가.

 

현상적 삶으로 보면 힘들다는 아이들의 불평은 엄살이다. 우리 젊을 때는 끼니가 걱정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본주의가 가르쳐준 삶의 방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소비 욕망에 물든 아이들은 쇼윈도로 가득한 길을 걸어가는 것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세상이 그렇게 가고 있는데 아이들은 그 트렌드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준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표가 없는 아이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뒤엎을 수는 없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갖도록 해 내부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효율성만 강조하는 지금의 대학교육은 이것을 제공하기는커녕 훼방만 놓고 있는 꼴이다.”

 

작가는 은교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 후 한 달 반 기간에 폭풍우처럼 써내려갔다. 그는 지금 내부에서 오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다음 작품에 대한 영감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고향 충남 논산으로 낙향해 살면서 서울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그는 최근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논산일기 2011 겨울이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그가 애태우며 기다리는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내 인생 마지막 승부는 은교가 아니야. 그냥 사랑이야. 얻고 싶은 것도 그뿐. 사랑보다 큰 권력은 경험하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57일 박범신 트위터에서) 그는 불멸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청춘이었다.

< 2012. 5. 14. 대담: 정성희 논설위원. 동아일보 >

 

 

젊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 삶이 아득

 

삶이 아득해져요.”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씨(50·전 명지대 교수)젊은 여자를 보면 (은교를 바라보듯) 애틋한 마음이 생기느냐고 묻자 박범신 작가(66·상명대 석좌교수)가 답한 말이다.

출근할 때 상명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에 걸려 멈춰요. 햇빛이 쏟아지고 여대생과 여중고교 애들이 기운차게 내 앞을 지나가요. 삶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나의 돌이킬 수 없는 세월도 지나가죠. 김소월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그냥 꽃이 저기 저만치에 있는 거지. 그러면 상처와 슬픔이 생기죠. 툴툴 털고자 하지만 여전히 남은 그 슬픔이 내 문학적 동력이지요.”

 

남자의 물건은교를 만났다. 김 씨는 올 초 출간된 남자의 물건집필 과정에서 박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박 작가의 소설 은교를 소재로 두 남자가 나눈 대화가 책에 짧게 언급돼 있다. 그런데 남자의 물건을 펴낸 출판사 북이십일이 책에 넣지 못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동영상 오 나의 처녀, 은교를 제작했다. 동영상은 카드북닷컴(www.cardbook.com)에 올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여인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을 선생님이 써주신 덕분에 남자들의 그런 욕구에 대한 면죄부가 생긴 것 같아요. 저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죠.”()

 

남주인공은 70세고 여주인공은 17세 소녀죠. 평생 자기 절제를 해온 노시인에게 나타난 은교는 단순히 젊은 아이가 아니에요. 불멸의 처녀성을 뜻하지요. 처녀가 늙어 애 낳고 시집가고 그러는 것은 노인의 머릿속에 없는 거예요.”()

 

김 씨는 은교를 읽으면서 칠십 노인의 열일곱 소녀에 대한 사랑에 자꾸 감정이입이 돼 몇 번이나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젊은 여성에 대한 욕망을 품을 수 없다고 사회가, 그리고 스스로 규정짓는 게 슬프다고 털어놓았다. 박 작가는 안 된다고 할 때 갈망은 더 커진다. 본성을 드러낼 수 있고, 사랑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비록 나는 못했지만이라며 웃었다.

 

박 작가는 교수로서 젊은 제자, 특히 여제자 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대담하다 싶을 만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해까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인 내 입장에서 아이들은 영원한 버진(처녀)’이에요. 열일곱 살 그대로 있는 거죠. 교수가 60대쯤 됐을 때 제자들도 늙어 50대쯤 되면 참 평화스러운데, 나는 60세가 됐지만 제자는 아직도 20대 초반이죠. 거리가 많이 생기니, 마음이 아프고 상처 받는 일이 많아요.”()

 

인터뷰 내내 50대에 갓 진입한 남자는 70세를 향해 가는 또 다른 남자에게 늙어감에 대한 슬픔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물었다.

 

전 미리부터 늙어가는 게 참 슬퍼요. 그 슬픔이 소설에 잘 나와 있지요. 하지만 노시인이 결국 은교의 손을 만지는 걸로 끝이 나는데, 전 굉장히 비겁하다고 봤어요. ‘이렇게 슬프게 해놓고 손만 만지고 가게 하나’, 그런 생각을 했지요.”()

 

가질 수 없기에, 은교죠. 그렇기에 우리 마음속에 갈망이 남는 거고요. 전 늙어가는 게 불편하진 않아요. 하지만 말할 수 없이 슬프죠. 하지만 깊은 슬픔을 간직하는 게 오히려 좋다고 봐요. 또 무언가를 끝없이 갈망하고자 해요. 그러면 진정 늙은 건 아니니까요.”()  < 2012.5. 23.. 대담: 김정운 전 명지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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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고독이라?  존재적론적(存在論的)이란 존재론에 관한, 또는 그런 것.’을 말하는데, 존재론의 개념을 이해하고 요점을 정리하기란...? 골머리 아프다. 차라리 이글을 읽는 것이 편하다.

 

 

존재론과 인식론

 

 

아카데미 동영상강의 해설인데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썼습니다.

.. 이건 간단한 건데.. 단박에 알아먹지 못한다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네요. 이는 관점의 문제니까. 여기서 잘못되면 다 잘못되는 겁니다. 눈에 딱 보이는 소실점이 안 보인다고 하면 저도 어쩔 수가 없지요.

 

보면 보이는 소실점을 동양의 그 누구도 수천년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쉽게 이해될 성질의 것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한 거고. 소실점은 하나의 점에 모이는 것입니다.

 

존재론의 탐구 역시 하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구조론은 언제라도 하나를 찾아간다는 점을 항상 의식하세요.

 

또 먼저 관점이라는 부분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점이란 무엇인가?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메커니즘의 존재 말입니다. 그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가 불통이재요. 나와 대상 사이에, 눈과 피사체 사이에 메커니즘이 있다는 사실.

남자와 여자가 사귀더라도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방정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조론은 어떤 둘 사이의 관계 곧 숨은 메커니즘을 탐구합니다. 눈과 피사체 사이에 방정식이 있어요.

 

내가 어느 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말입니다. 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점만 보이고, 선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선만 보이고, 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각만 보이고, 입체로 보는 사람에게는 입체만 보입니다.

밀도로 보아야 전모가 보입니다. 관점의 이동이 필요한 거지요. 이건 존재론, 저건 인식론으로 되는게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한 쌍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게 중요합니다.

 

모래시계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한 쌍이지 않습니까. 근데 윗부분에는 모래가 떨어지고 아랫부분에는 모래가 쌓이지요.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각각 나누어서 본다면 두 개의 사건입니다.

1) 모래가 떨어진다. 2) 모래가 쌓인다.

 

모든 혼선이 여기서 빚어집니다. 모래가 떨어지고 또 모래가 쌓인다 이렇게 둘로 보거나 아니면, 아니면 모래가 쌓이는 부분만을 본다면 혼란이 일어납니다. 구조론에서는 항상 1을 추적합니다. 사건은 하나에요. 이건 절대적인 규칙입니다. 반드시 사건은 하나다에 밑줄 쫙. 절대 기억하셔야 합니다. 관찰해서 하나가 아니면 하나가 될 때 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에 도달하면 깨달음. 모래가 떨어지는 것은 지구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고, 원인이 하나이므로 결과도 하나여야 합니다. 즉 그곳에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요. 에너지가 한 곳에서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랫부분에 모래가 쌓이는건 저절로 되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어도 됩니다. 그냥 됩니다. 이거 이상하잖아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데 공짜로 되니까요. 여기서 착각이 일어나는 거지요.

 

나는 때렸고’ ‘너는 맞았다면 내가 때린 사건과 네가 맞은 사건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린게 맞은 거죠. 인간의 보는 시선이 다를 뿐. 둘은 하나다 이 점을 이해하는게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혼선은 하나의 사건을 둘로 나누어 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빛은 빛대로 있고 어둠은 어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은 하나입니다. 존재론이란 이걸 깨닫는 것입니다.

 

인식론이란 이걸 나누어서 별개로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에는 빛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빨주노초파남보로 세상을 보지만 그것은 이미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항상 검은 것은 아니에요. 검은 그림자는 흑백그림자이고 빨주노초파남보는 칼라그림자이지요. 인간의 눈에는 모래시계 아랫부분만 보이므로 추상해서 그 윗부분을 찾아야 하는데 이건 생각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깨달음입니다.

이를 태양에 비유하는 것은 태양이 사방에 두루 비치는 성질을 말하려는 것이며 하나의 원본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말함이며 그러므로 마음이든 자연이든 돌이든 흙이든 풀이든 빛이든 태양이든 달이든 그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존재론이고 그 본질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인식론이지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일단 인식론입니다.

 

일단 님은 한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님이 보았다고 믿는 태양은 자연에 존재하는 태양이 아니라 님의 뇌 속에 만들어진 상에 불과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존재를 압니다. 바람을 본 것이 아니라 나뭇잎을 본 거지요. 그런데 인간은 바람을 보았다고 착각합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을 하나로 통합시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곱까지 빛깔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빛을 프리즘이 일곱까지 그림자로 연출해낸 것입니다. 산은 푸르지만 실제로는 붉습니다. 붉은 산을 우리가 푸른 산으로 착각하는 것은 산이 푸른색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산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는 붉은 색을 취하고 푸른색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산은 붉지요. 그런데 우리는 산이 푸르다고 믿습니다. 산이 버린 것을 산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초목이 푸른 것은 초목이 푸른빛을 버렸기 때문입니다존재론의 의미는 완전성입니다. 완전한 것은 항상 에너지의 입출력이 있습니다. 인식론의 세계에는 에너지의 작동이 없습니다. 제가 글에서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라고 구분하여 쓰는 것은 그 순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자운동량은 존재론이고 순서를 뒤집어서 양운동입자질이면 인식론이지요. 존재론과 인식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인데 순서를 구분하기 위해서 따로 이름을 붙인 겁니다. 왜 이 구분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양운동입자질이라고 해놨지만 실제로는 양이 모여서 운동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양이 모여서 운동이 됩니다. 예컨대 점을 모아서 선을 만들 수 있지요. 이는 에너지가 없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가짜니까요. 인간이 종이 위에 그린 것은 기호에 불과하지요. 그건 진짜 자연의 점이나 선이 아니라 인간의 약속입니다.

 

인식론은 자연에서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약속에서는 되기 때문에 편의로 쓰는 것입니다. 영화스크린 속에서는 불가능이 없지요. 그곳에서는 슈퍼맨도 되고 배트맨도 되는데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컴퓨터의 작동이라든가 정보의 전파 등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듯한, 무에서 유가 창출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한 명의 꼬마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면 자연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에게는 가능합니다.

 

인식론의 세계에서는 실제로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인식론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돈이 돈을 버는 현상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예컨대 평화롭던 마을에 전쟁이 일어나면 갑자기 금이 가치를 얻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돈이 휴지가 되므로 믿을건 금 밖에 없지요. 돈을 금으로 바꾸어 피난을 가야하므로 갑자기 가치창출이 됩니다. 이것이 명목상의 가치창출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치창출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본은 수치화된 신용이고 신용은 위험에 비례하므로 위험이 있어야 사회에 신용이 형성됩니다. 위험이 전혀 없으면 자본이 형성되지 않아 시장이 붕괴됩니다. 자본은 어떤 외부의 힘에 대응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은 권()인데 권은 요소들이 어떤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고 질서를 이룬 것입니다. 이는 에너지 투입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그 하나의 방향은 위험이 존재하는 반대방향입니다. 위험의 포지션이 특정되지 않으면 자본이 하나의 방향으로 질서를 갖추지 못하므로 자본이 붕괴됩니다. 권력이 탄생되지 않고 이에 의사결정 실패로 의미있는 일을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자본의 의미는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를 건설하는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위험의 존재가 명백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롭던 마을에 도둑이 나타나면 갑자기 권력이 발생하고 국가가 성립하고 자본도 발생하지요.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예상되는 미래의 외부에서의 작용에 대응하여 신용을 축적하는 형태로 자본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추운나라에서 경제가 발전하지요. 그러므로 인식론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인식론은 에너지가 없으므로 시작과 끝이 불명해서 뒤죽박죽으로 됩니다. 존재론은 반드시 에너지가 투입되므로 에너지가 소멸되면 사건이 끝납니다. 사건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요.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존재론은 완전성을 나타내므로 하나의 그림을 머리 속에 세팅해 두면 반복적으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앞과 뒤, 입력과 출력으로 세팅되면 존재론입니다. 인식론은 불완전해서 써먹기 어렵지요.

 

구조론은 이걸 조금 더 구체화시켜 원인작용판정반작용결과로 세분화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존재의 1사이클이 완성되는 것이며 어떤 하나의 존재, 사건, 개별자, 1자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표현은 필자가 지은 말이다. 구조론의 용어다. 철학서적 들여다볼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자 기준이다. 인간의 모든 오류는 여기서 헷갈리는 거다. 기준이 둘이라서 이중기준의 오류에 걸린다. 해결해야 한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는 것이 구조론의 첫 단추 꿰기다. 누구든 백퍼센트 여기서 걸리기 때문이다. 피해가지 못한다. 특별히 훈련해야 되는 거다.

 

사건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 훈련하여 이것을 두 개의 개별적 사건이 아닌, 한 가지 사건의 기승전결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원인 측 위주로 보는 것이 존재론이요, 결과 측 위주로 보는 것이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결과론이다. 근데 인간은 원래 결과를 보고 거기서 단서를 얻으며 거기에 추론을 더하여 인식을 조직한다. 존재론은 인간이 원래 못 보는 거다. 소실점을 못 보듯이 아무도 못 본다. 보여줘도 못 본다.

 

궁수가 활을 쏜다. 화살이 과녁에 맞는다. 두 사건이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하나의 사건임을 인식하기다. 근데 보통 사람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화살이 과녁에 맞은 다음이다. 궁소가 쏘는 장면을 못 본다. 봐도 그게 과녁에 맞은 화살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궁수따로 과녁따로다. 여기서 관점의 이동이 일어나며 그 때문에 상대성과 역설이 작동한다. 문제는 기준이다. 하나의 기준에 맞춰놓고 풀어야 한다. 원인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존재론이고, 결과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인식론이다. 훈련하면 모든 사건의 소실점, 센터, 기준점을 찾을 수 있고 복잡한 것이 단순해지며 확 풀려버린다. 존재론의 시야를 얻는다.

 

중요한건 무지의 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둘을 별개로 나누어 본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해야 한다.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본다는 거다. 원래 그렇다는 거다. 작용과 반작용 중에서 반작용 위주로만 본다. 상부구조는 은폐되고 하부구조 위주로 본다.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못 보고 감기환자의 이마에 끓는 열은 본다. 배후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보지 못한다. 그게 인식론의 병폐다. 다 그렇다.

 

둘을 통일해서 보면 어떻게 되는가? 덧셈과 뺄셈이 뺄셈 하나로 통일되고, 덧셈은 사라진다, 곱셈과 나눗셈이 나눗셈 하나로 통일되고 곱셈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추가적인 해설이 필요하다. 세상은 마이너스이므로 덧셈은 원래 없다. 곱셈은 원래 없다. 수학자는 나눗셈을 쓰지 않고 분수로 곱하는데, 분수가 이미 나눔수다. 엄밀히 말하면 수학에서는 원래 나눗셈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게 미적분이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그렇게 하지 않지? 왜 존재하지 않는 덧셈을 쓰지? 존재론으로 보면 일단 문장이 길어진다. 뇌가 꼬인다. 불편하다. 대신 정확하다. 괜히 일 번거롭게 만든다.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된다. 수학자는 기술이 뛰어나고 시간이 널널하므로 마이너스를 쓰지만 보통사람들은 시간도 없고 해서 편한대로 플러스를 쓴다.

 

무엇인가? 존재론으로 보면 시동을 걸었더니 자동차가 간다.. 가 아니라 시동을 걸었더니 실린더가 폭발하고 피스톤이 움직여서 플라이휘일이 돌아가고 미션이 작동하여 구동축이 돌아가니 바퀴가 굴러간 결과로 자동차가 진행한다로 된다. 문장이 너무 길다. 문장을 단축하려면 단축키를 써야 한다. 그게 플러스다. 플러스를 쓰면 문장이 짧아진다. 왜냐하면 바운더리를 넓게 잡기 때문이다. 대신 에러가 난다. 그래서 얼버무리려고 모순이니, 반역이니, 항명이니, 하극상이니, 상대성이니, 역설이니 하는 거다. 근데 원래 자연에는 모순도 없고 하극상도 없고 역설도 없다. 그게 다 문장을 짧게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된 거다. 모든 모순은 문장길이단축욕망 때문에 일어난다.

 

플러스 사고 아침 해가 동쪽하늘에 떴느냐?

마이너스 사고 태양이 지구자전방향 기준으로 볼때 동쪽으로 위치를 이동한 것처럼 관측되고 있느냐?

마이너스는 에너지의 결따라 가는데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일일이 지정해야 하므로 문장이 길어지고 뇌가 꼬인다. 태양은 뜨지 않는다. 지구가 뜨는 거다. 그럴게 정확하게 말할수록 문장이 길어지므로 편의로 플러스를 쓰는 거다. 그래서 나온게 인식론이고 인간은 이 방법으로 지식을 축적한다. 근데 가짜다.

 

인식론에서는 항상 바운더리 지정의 오류가 개입한다. 근데 어떤 사건 초기단계에서는 누구도 바운더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류가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 거다. 바운더리 지정하려면 공연히 시간만 걸린다. 불이 났는데 호롱불이 났는지 라이터불이 났는지 담뱃불이 났는지 아궁이불이 났는지 산불이 났는지 집이 불타고 있는지 안 따지는 거다. 대충 알아먹으란 거다. 보나마나 집에 화재가 났다는 말이겠지.

 

바늘을 잃었는데 그냥 찾으면 되지 뭐하러 자석을 가져오고 계산기를 두들기고 나침반으로 방향과 위치를 파악하겠느냐 말이다. 근데 바늘이 백만 개라면? 이때는 별수없이 존재론을 해야 한다. 그게 구조론이다.

훈련하여 원인과 결과를 하나의 기승전결로 보는 능력을 얻으면, 전부 한 줄에 꿰어낼 수 있으면 존재론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며 특별한 능력을 얻은 것이다. 아무도 못하는 것을 해내게 된다.

 

인식론 - 한 개의 바늘을 운이 좋으면 빠르게 찾는다.

존재론 - 백만 개의 바늘을 운과 상관없이 정확하게 찾는다.

 

잃어먹은 바늘이 한 개이면 인식론을 쓰고 백만 개면 존재론을 써야 한다. 구조론은 백만 개의 바늘을 찾는다. 처음에는 세팅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세팅해 놓으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다. 근데 경험 있는 베테랑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기승전결로 인식하고 있다. 경험없는 분야라면? 망친다. 이번에 김어준이 노원갑에서 헤맸는데 경험부족이었다. 새누리도사 조동원은? 베테랑이었다. 베테랑이나 전문가들은 연역할 수 있으므로 순방향으로 가서 항상 이긴다. 아마추어는 연역할 수 없으므로 역방향으로 가고 따라서 진다. 그런데 존재론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면 경험이 없어도 연역할 수 있다.

 

모르는 분야라도 상당히 보인다. 물론 이 경우에도 팩트의 오류에 의한 에러는 있다. 그러나 확실히 유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가끔 아마추어 네티즌 중에 프로야구를 세세한 기술까지 설명하는 사람 있다. 공 한번 안 던져보고 투수의 온갖 변화구를 잘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에너지의 결을 읽은 것이며 존재론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미 베테랑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박찬호의 투구폼 어디가 잘못되는지 동영상만 보고 알아맞출 수 있다. 근데 완전초보를 가르치라고 하면 못한다. 이건 경험이 필요한 거다.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분명히 보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구조론은 존재론을 구사하는 것이다. 결 따라 가는 것이다. 결을 읽고 들어가는 것이다. <김동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