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을 지낸 할아버지는 ‘여러문제연구소장’이었다. 천문 지리 농업 언어 등 다방면에 저술을 남겼고, 부인이 “붓과 벼루는 멀리하고 요리를 가까이 하시려나” 걱정할 정도로 부엌 출입도 잦았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역시 수학과 천문 분야의 최고수였다. 이런 다빈치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가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구·1764∼1845)다.
풍석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 못지않은 르네상스인이었다. 나이는 두 살 어리고, 1789년 다산에 이어 1790년 과거에 급제했으니 과거시험 기수로는 다산의 한 해 후배가 된다. 두 사람 모두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다산이 38회, 풍석이 62회 등장하는 엘리트 관료였다. 재야로 내쳐진 후 불후의 명작을 남긴 점도 같다. 다산은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실학을 집대성했고, 풍석도 관직에서 물러나 집중적인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 기간이 공교롭게도 18년이었다.
다산의 면모를 집대성한 저작이 여유당전서라면, 풍석의 대표작은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다. 둘은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걸었다. 다산은 벼슬길에 오른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해야 할 바를 제시한 반면, 풍석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사는 데 필요한 ‘잡학(雜學)’을 집대성하는 데 매달렸다. 벼슬 귀한 선비 집안에서 자란 다산이 경학과 경세학에 몰두하는 동안, 집안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해낸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자손은 “토갱지병(土羹紙餠·흙국과 종이 떡)의 공허한 말장난이 싫다”며 비주류 실용학을 파고든 것이다.
다산의 저술 활동엔 18명의 제자가 함께했다. 하지만 풍석은 혼자 힘으로 밭 갈고, 옷 해 입고, 집 짓고, 병 고치고, 제사 지내고, 여가를 즐기는 데 필요한 ‘생활의 모든 지식’을 113권 54책 252만7083자에 담았다. 당시 지식인들은 나라 경영이 아닌 잡학 집필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걸까.
다산은 국학 부흥운동이 한창일 무렵인 1930년대 정인보 선생이 동아일보에 실은 글을 시작으로 업적을 재조명받았다. 하지만 임원경제지는 1939년 보성전문(현 고려대)이 전질을 필사하는 작업을 동아일보가 보도하면서 최초로 언론에 공개됐을 뿐 그 전모는 지금껏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도 두 손 들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고 전문적이어서 완역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출연기관이 포기한 번역 작업의 끝을 본 이들은 41명의 소장학자다. 이들은 ‘임원경제연구소’를 차리고 국문학 한의학 경제학 미학 수학 기계공학 등 전공을 살려 4개의 필사본과 임원경제지가 인용한 853종의 원전을 비교해가며 9년간 매달린 끝에 초벌 번역을 끝내고 최근 개관서를 출간했다. 개관서만 펼쳐 봐도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신기루 속 보물처럼 엿보기도 어려워라”는 독후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연구소는 2014년 500쪽짜리 55권 분량으로 임원경제지를 완간한다는 계획이다.
벼슬길에 오를 때와 내려온 후를 두루 살핀 다산과 풍석 두 문성(文星)이 활약했던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였다. 임원경제지가 완간되는 2014년은 풍석 탄생 250주년이다. 몸소 밭 갈고 물고기 잡으며 천시 받던 공업과 상업에까지 두루 깊은 식견을 보여줬던 열린 지성 풍석과 그가 남긴 저작이 본격적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동아/광화문에서/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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