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백옥봉(白玉峰)과 당나라장수 설인귀(薛仁貴)

백수.白水 2013. 12. 26. 15:41

 

멀찌감치서 임진강변 현무암용암대지위에 펼쳐진 광활한 주월리(舟月里)들판을 바라다보면 봉곳하게 솟아오른 2개의 야트막한 봉우리가 발견된다.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큰 묘처럼 보이는데 한곳은 가월리·주월리 구석기유적'이 발견된 곳이고, 다른 한곳은 주월리 한밤이마을의 뒷산으로 당나라장수 설인귀(薛仁貴, 613~682)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그동안 임진강의 범람에 따라 여러 차례 큰 수해를 입은 후 제방을 쌓고 경지정리를 하여 지금은 평야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큰비가 오면 적성면소재지까지 임진강물이 차올랐고 중성산 아래에 있는 가월리 앞에도 물이 들었다하니 이일대의 지형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고 봐야한다.

 

구석기인들은 지대가 높은 곳에 움집을 짓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초기 백제인들도 백옥봉주위에 취락을 마련하고 가까운 곳에 육계토성을 축조하여 적으로 부터 자신들을 지키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농경지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땅은 제방축조전만해도 침수지역이나 황무지로 농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인귀 관련자료

http://blog.daum.net/ybm0913/847

 

 

 

 

白玉峰, 야트막한 동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장군은 적성면 주월리 백옥봉아래 가난한 집에서 탄생하였다고 전한다.

 

 

 

 

 

동네사람들이 정상 한켠에 산신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쪽을 향한 정상의 군사시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사위가 훤히 조망된다

.

 

 

 

 

 

 

 

 

 

 

설인귀(薛仁貴) 장군 유적의 설화

 

 

설인귀는(613~682) 용문출신으로 서기 645(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군졸을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후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랑장 소정방과 고구려 적봉진을 침략 658(보장왕 17)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되어 주장 이세적과 육군을 이끌고 봉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제성을 공략하였다. 666(보장왕 25) 고구려장수 막리지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에게 쫓겨 그를 입당시킨 사실과 신라에서 구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으로 요동안무대사 契芯何方을 도와 내침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 목저, 창함성을 협공 드디어 남산은 중신 등과 당영에 나가 항복함에 따라 고구려 보장왕 27(668) 921일 역사적인 최종의 치욕일(始祖 朱蒙으로부터 28)로서 705년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 설인귀는 검교 안동도호부 총독이 되었다. 648년 이때 신라무왕(30대왕)의 의도(意圖)를 책망하는 장문을 보내자 진덕여왕(38대왕)은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 토지를 모두 그대에게 주어 편안하게 하려한다는 내용에 변명서를 보내 왔으며 신라의 정당한 요구에 대변을 삼았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땅을 대부분 점령한 후 설인귀는 671(신라문무왕 11) 계림도 행군 총관으로서 신라에 내침하였으며 이어 675(문무왕 15) 신라 숙위학생 풍훈을 향도로 삼아 풍성강을 침공하였다. 연이어 나장문훈에게 대패 이듬해 문무왕 1611월 금강하류 소벌포에서 거듭 패전 후 678(문무왕 17)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무순(봉천)으로 이치함으로 나당간 무력 충돌이 종식되었으며 설인귀는 그 후 본위대 장군이 되어 평양군공에 봉해졌다 한다.   그동안 조사한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장군은 적성면 주월리 백옥봉하 오환면적오제갈지에서 가난한 집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명기한 용문은 바로 이곳인지도 모를 일이다. 설인귀는 구척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한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무건리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무건리로 호칭하였다.   또한 첫 새벽과 저녁으로 주월리 집에서 두지리를 거쳐 마제리로 호칭하였고, 설마치 계곡에서 설인귀가 가지고 놀던 집 더미 같은 공기돌 등등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이와 같은 유래를 상고해 보면 서기 612(영양왕 23)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수륙양군 11338백여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을지문덕장군이 거짓 항복하여 적장 우문술, 우중문을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 회군 할 것을 종용한 후 살수(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수나라 후군을 맹격 305천여명 중 27백만여만이 돌아가게 하였다는 지략과 무용이 뛰어난 무서운 장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45(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을지문덕 막하에서 미움을 사게 된 설인귀장군은 당태종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이를 구원하여 입당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한 그 후에도 나당 연합군을 인솔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그가 죽은 후 설마치 고개 길가에 옛날 주민들이 세운 설인귀 추모사적비가 있는 곳을 수령들이 지나갈 때 말이 가질 않아 하마하여 절을 한 후 통과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결하게 되자 감악산하 7개 부락에 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현몽하기를 호걸이 장대한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소를 하룻밤만 빌려 달라고 한 후 사라지자 이상히 생각한 소를 가진 여러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양간에 소를 보니 소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며 설마치 고개마루(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 있던 이 화신비석이 감쪽같이 감악산정(해발 675m)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설인귀 사적비 단은 높이 170cm, 두께 19cm, 넓이 70~79cm의 화강암으로 상위가 하위부분보다 약간 넓은 편이며 기단은 자연석 1장으로 4단이 형성되어 있다. 고려때에는 봄가을 조정에서 향()과 축()을 내려 제사(在紺嶽山頂一問隆香祝致祭)를 지냈다하며 감악산신으로 봉했다는 전란사와 민간 신앙조에 기술된 사실과 현종 5년 거란이 침입 당시 감악산사에서 병마와 깃발이 나부꼈다는 설 또한 고려 충렬왕 136월 그의 두 왕자에게 도만호의 관직을 주어 감악산신에게 음조를 기구한 것으로 보아 이때 산신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 적성군지 고려조에 의하면 육계토성에서 설인귀가 태어났고 이의신이 설인귀비를 발견하였다 하였으며 충렬왕 34월 감악산에 친제를 지내려다가 두지진에서 익사한 사건과 조선조 태종 116월에 산제 봉행과 연산군 62월 감악산 신당 보수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설인귀장군 추모비이며 본 고장 출신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근년에 이 비석을 군작전상 철거를 하였더니 자주 사고가 난다하여 이 자리에 다시 세우니 무사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각계각층의 학자들도 이 비석에 의아심을 품고 유적을 세밀히 조사한바 너무 오래되고 비와 풍화작용으로 글자가 보이지 않아 봉전몰자비 또는 빗뚤대왕비, 진흥왕 순수비 등 구구각색으로 논란이 많다. 이는 앞으로 좀더 연구하여야 할 숙제라 하겠다

. <파주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