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성은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산30-2, 산33와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 산2, 산4번지의 경계지점에 있다. 파주시에서는 ‘파주 아미성’이라 하고, 연천군은 ‘연천 아미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늘목리는 古來로 적성현(積城縣) 지역이었고, 적성현이 적성군으로 개편되었던 시절에는 적성군 남면지역이었는데, 1963년 행정구역개편 때 전곡읍으로 편입된 것이다. 늘목리에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積東초등학교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적성 아미성」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할듯하다.
최근의 조사에서는 이 성이 칠중성을 보조하는 보조성으로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피력되었다.鄕土史料集에서는 이 지역에서 구전되어 오고 있는 축성설화와 연결시켜 이 성의 명칭을 종전의 阿未가 아닌 老姑城(노고성)으로 命名되어야 할 것임을 제안하였다.
삼국시대로부터 北에서 내려온 군사들의 남하통로는, 개성방면에서 장단을 거쳐 호로고루가 있는 호로하나 또 칠중성이 있는 칠중하를 건너 ①감악산西路(371지방도)인 설마천협곡을 넘는 길과 ②감악산 東路(375지방도)인 간파천협곡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이 길목을 지키기 위해서 백제는 설마천계곡의 입구에 七重城을 쌓았고, 간파천협곡의 初入 양쪽에 아미성과 수철성을 쌓았다. 칠중성은 여러 차례 답사했으나 아미성의 위치를 찾기 힘들어 여태 미뤄왔는데 두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오늘 아미성에 올랐다. 서너 건의 답사기가 올라와 있는데 간파로에서 城의 東壁面인 깎아지른 절벽으로 올라갔다고 나온다. 엊그저께 간파천계곡으로 찾아가서 90도에 가까운 直壁을 올려다봤으나 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진입로를 찾아 오르려고 사방으로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되돌아오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암리에서 블루벨리농장을 하시는 이문호 사장님이 생각나서 오늘아침에 전화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간파로 쪽은 너무 험준해서 오르기가 힘들고 자기네 농장에서 올라가야한단다. 이런 경우를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거 아니겠는가.
10시쯤 농장에 도착해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는 바로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그곳 어디쯤에 있을듯하여 이리저리오르내리며 살펴보았지만 성터가 보이지 않는다. 답답해서 농장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는다.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물을 막고 퍼내는 거다. 농장까지 한참을 내려와서 자세하게 설명을 듣고, 다시 올라가서 찾았다. 덕분에 4시간동안 제대로 체력단련을 하고 말았다
.
앞으로 아미성을 오르실 분들은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145-1번지 ‘수우원농원(T031)957-9154)으로 찾아가시면 사장님이 아주 친절하게 안내를 할 것이다.
수우원(樹友園) 편마암계곡 /아미성으로 오르는 길 ☞ http://blog.daum.net/ybm0913/2585
동두천이나 양주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375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감악산과 마차산 사이를 지나 전곡이나 적성쪽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성은 이 도로가 37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 적암리에 못미쳐서 좌측에 있다. 한편 적성쪽에서 오면 어유지리를 거쳐 전곡으로 가는 37번 국도와 375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거리의 우측산 정상부에 있다. 어유지리 쪽의 삼거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375번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두 개의 산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좌측의 해발 397m 높이의 산 정상에는 수철성이 위치하며, 우측에는 아미성(260m)이 위치하고 있다. 아미성은 감악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줄기가 말단부에 형성된 해발 260m의 봉우리 정상부에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감악산의 줄기와 동쪽으로 마차산 줄기의 사이에 좁고 평탄한 협곡을 이루고 있어 감악산 서로보다 평탄한 교통로를 이루고 있으며, 아미성은 이 교통로를 통제하기 매우 양호한 지점에 있다. 특히 정상부에서는 남쪽방면으로의 시계가 매우 양호해서 계곡을 따라 공격해 오는 적을 제어하기 매우 용이한 지점이다. 아미성은 阿未城, 阿彌城, 峩眉城, 老姑城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지역주민들 사이에서는 ‘할미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城의 초축에 대한 문헌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조선초기 世宗實錄의 地理志를 제외한 이후의 대부분의 지리지에서는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다. 즉 조선 중기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미성은 현동쪽 18리지점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는 1937척’이라 하였다. 東國輿地志에는 성의 명칭만 ’阿未城’에서 ’阿彌城’으로 글자만 바뀌었을 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輿地圖書에서는 성의 둘레가 당시의 地尺으로 1,215尺 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京畿誌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성은 북동-남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으로서 동쪽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반면 서쪽과북쪽부분은 대체로 무너진 상태이다. 전체 둘레는 290m 정도이다. 조선시대의 지지자료에는 아미성의 둘레를 1,937척 또는 1,215척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290m를 1,937척으로 환산하면 1척의 길이가 14.9cm밖에 되지 않으며, 1215척으로 환산하더라도 23.8cm 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성곽둘레를 기록한 척도가 포백척이나 영조척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감안할 때 오차의 폭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차에 대해서는 추후 산성의 위치비정 문제와 함께 심도깊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산 정상부에는 곳곳에 석벽이 노출되어 있어 자연 성벽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동남쪽부분에는 높이 670cm에 폭 10m 정도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성돌은 화강암을 치석하여 장방형으로 만든 것으로 크기는 40×15cm, 30×15cm, 25×10cm, 30×17cm로 높이에 비해서 폭이 넓은 성돌을 사용하였으며, 면석이 떨어져나간 지점에도 뾰족한 견치석 뒤채움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정교하게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층과 윗층의 돌들은 대략 1/2-1/3 정도 물리게 하였으며, 퇴물림쌓기를 하지는 않고 자연스럽게 경사가 이루어지도록 축성하였다. 전체적으로 거의 비슷한 크기의 성돌을 활용하여 쌓았다. 성의 서쪽부분은 성벽이 대부분 붕괴되어 약 10m 정도 폭으로 성돌이 쌓여 있다. 성의 안쪽에는 참호가 구축되어 있다. 성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동북쪽은 역시 참호가 구축되면서 성의 유구가 상당부분 훼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부에는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평탄지가 여러곳 조성되어 있으며, 특히 서의 남서쪽 부분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있고, 이곳에 구축된 참호 속에서는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 당초문을 양각하거나 음각한 수키와와 격자문을 타날한 회색이나 적갈색의 연질와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성의 정상부분과 동쪽부분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승문이 타날된 고구려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성내에서는 약간의 토기편과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유물이 발견되는 곳은 성의 동북쪽과 서남쪽의 참호부근이다. 성의 서남쪽에서 발견되는 와편은 단판고판으로 찍은 태선격자문와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수키와의 등에는 음각또는 양각을 하여 찍은 당초문와가 발견된다. 와의 태토는 니질에 가깝고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측면 절단부는 2차 정면을 하여 고구려와로 추정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고구려와에서 보이는것처럼 암키와의 경우 내면에 모골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표면의 문양도 장판고판으로 찍은 승문이나 거치문 등이 아닌 단판고판에 의한 태선격자문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문양은 신라계의 와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반면 동북쪽 성벽기단부 외곽에서 주로 발견되는 와편들은 역시 니질에 적갈색을 띠고 있지만 표면에는 승문이 찍혀 있고, 내면에는 폭 1.9cm 내외의 모골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이것들은 임진강변의 호로고루나 무등리보루 등에서 출토되는 고구려와와 거의 같으며, 내면에는 마포흔 위에 횡방향의 승문이 타날되어 있는 것이 있다. 또한 성내에서는 동북쪽 정상부주변에서 약간의 고구려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고구려토기편은 니질태토에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표면은 마연을 하여 반들거린다. 아미성은 368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수철성과 마주보고 있며, 이곳에서면 특히 간파리쪽의 정황이 잘 관측된다. 현재 성내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고구려와편, 및 신라계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보루가 먼저 구축된 이후 신라가 장악하여 현존하는 성벽의모습대로 개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 성은 둘레가 약 290m 정도에 지나지 않고 해발고도도 260m에 달하는 산정상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미성과 대응하고 있는 수철성의 내부에서 와편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미성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성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되는 고구려토기편과 고구려와편들은 고구려군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다시말해 임진강을 건너온 고구려군은 서울지역으로 진출함에 있어 길이 험준한 감악산 서로를 택하지 않고, 감악산 동로를 주로 이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자료가 될 것이다. <심광주 |토지박물관 학예실장>
동벽(東壁) / 아래사진들수직 벽으로 매우 험하고, 원형이 제일 잘 보존되어 있다
.
90도에 가까운 직벽으로 성벽위에 서면 오금이 저린다. 성벽 아래로 보이는 곳이 간파천 협곡이다. 간파천이 남쪽(사진 오른쪽)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리고, 375번 지방도로가 나란히 달린다. 정면 아래가 통일산업의 공장이고 건너편 산에 수철성이 있다
.
오른쪽으로 집이 여러 채 보이는 동네가 ‘늘목리 보건진료소’가 있는 전곡읍 간파리 송산마을이다
.
남벽(南壁) / 아래사진들
길이가 짧고 가파르다
남벽아래, 적암리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적암리계곡
바위덩이를 삼킨 나무가 결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뿌리 채 뽑혀 죽어 넘어져 버렸다.
서벽(西壁) / 아래사진들경사가 완만하고 길다. 성돌은 현재 우리軍의 참호교통로를 만드는데 쓰였다
.
적암리 마을, 멀리 임진강이 보인다
.
북벽(北壁) / 아래사진들
길이가 아주 짧다
유적조사당시 사진들 / 아래사진들
수우원 이문호사장 제공
'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천 수철성 오르는 길 (0) | 2014.01.15 |
---|---|
[1] 격랑의 동아시아… 통일과 미래 전략, 고구려에 있다 (0) | 2014.01.14 |
편마암계곡/수우원(樹友園) /아미성으로 오르는 길 (0) | 2014.01.12 |
미수괘암(眉叟 卦巖)! 卦巖이 아니라 卦嵒이다 (0) | 2014.01.11 |
원당리 현무암주상절리 (0) | 2014.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