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는 크게 아래쪽의 중랑천이나 왕숙천 등 한강의 지류 유역과 위쪽의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유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맨 위쪽에는 한탄강의 명칭이 유래된 大灘이 표시되어 있다. 수도인 한양 주변인만큼 陵墓와 書院 등이 즐비하게 있는 고을이었다. 양주시[楊州市]
경기도의 동북 내륙부에 위치한 시이다. 양주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 문종 때 서울이 될 만한 역사적 배경과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하여 '양주'라 부르게 되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양주시는 삼국 시대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백제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 매성군 또는 창화군으로 불렀으며, 다시 백제 땅으로 환원되는 등 삼국의 각축전에 따라 그 변화가 심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757년)에는 내소군에, 고려 태조때에는 견주에 속하였다. 그리고 조선 1397년(태조 6)에는 치소(治所)를 양주시 주내면 고읍리로 정하고 양주라 칭하였으며, 1466년(세조 2)에 양주목으로 승격하였다.양주는 『팔도군현지도』에 의하면 읍치가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위쪽의 불곡산(470m)에 있었다.
양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색의 시에 "깎아지른 듯한 세 개의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책에 기록된 권우(權遇)의 풍양현 시에 "나귀를 타니 야취(野趣)가 많아, 천천히 저녁 빛 속에 걷는다. 역로(驛路)에는 모래와 먼지가 어둡고, 고을 성에는 수목이 울창하다. 산은 화악과 연이어서 많고, 물은 한수에 들어가서 길다. 이곳이 뽕나무 뿌리에 알맞아서 칠경 초당(草堂) 짓기로 기약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양주는 "세 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고 논이 10분의 3이 좀 넘는다. 양주도호부 동쪽 도혈리에 도기소가 있고, 남쪽에 나라의 말을 놓아먹이는 목장과 동남쪽에 봉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양주는 "농업과 누에치는 일을 주업으로 하며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한다.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장사와 수공업도 즐겨 종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양주 목장에 다녀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양주 땅에 속하는 지금의 행정구역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 전곡읍 · 청산면, 고양시 덕양구 (일부), 서울특별시 은평구 (일부), 도봉구 · 강북구 · 노원구 · 중랑구 일대 등이다.
『해동지도』에 양주는 조선 태조릉인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광릉(光陵) · 현릉(顯陵) 등 많은 능묘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성(漢城)의 동대문에서 지방으로 가는 모든 길은 양주를 지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양주의 행정구역 변화를 살펴보면 1832년에 양주군으로 지정되어 그 체제를 유지하다가 1980년에 남양주군이 분리되어 나가고 2003년에 양주시로 승격되었다.양주시의 행정지명은 양주동, 회천동, 백석읍, 광적면, 남면, 은현면, 장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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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관아 앞에 있는 음식점
동헌 매헌당(東軒 梅軒堂)
양주별산놀이 전시관 및 공연장
양주관아지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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