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직속의 군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 범죄임을 밝힌
재일교포 역사학자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 출간된다.
▶본보 2010년 1월 11일자 A3면 참조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긴박했던 조선의 운명]
①일제 군부, 국모를 시해하다
일본 여류사학자 김문자(金文子·60) 씨가 일본 군부 자료를 분석해 쓴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태학사)이 10일경 국내에 소개된다.
일본에서 2009년 2월 출간된 책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가 입수해 국내 출간하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은 일왕의 지휘를 받는 대본영의 육군 수뇌부인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 육군대신 등이었고
이들의 계획에 따라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조선공사로 부임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김 씨는 명성황후에게 처음 칼을 휘둘러 치명상을 입힌 인물로 일본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를 지목했다.
김 씨는 미우라가 공사로 서울에 부임한 이후 일본공사관과 도쿄 외무성 및 대본영과 주고받은 통신기록과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외교문서 등을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김 씨는 일본 나라여대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1979년부터 같은 대학 사학과에서 연구하고 있는 재일교포 2세다.
지금까지 명성황후 시해는 당시 공사였던 미우라 주도로
일본 낭인과 장사치들이 저질렀다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 씨의 연구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에는 처음부터 대본영이 깊숙이 개입했다.
대본영은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압력을 넣어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를 사건 한 달 전에 조선 공사에 취임시켰다.
이후 미우라는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지휘권을 직접 요청할 정도로 대본영과 긴밀하게 교신하며 움직였다.
결국 미우라는 조선공사로 부임한 지 한 달, 군 지휘권을 획득한 지 사흘 만에 명성황후 시해를 감행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군부가 이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인 직접 이유는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한
장거리 통신시설로 전쟁 수행에 핵심적이었던 전신선(電信線)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김 씨는 분석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서로전신(의주∼서울), 남로전신(서울∼부산), 북로전신(서울∼원산)이 있었고
이를 통해서만 조선과 대륙 침략을 노리는 일본군에게 실시간으로 전문(電文)을 전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개전 이틀 전인 1894년 7월 23일 새벽에도 일본은 경복궁에 난입해
전신시설의 총괄권을 가진 고종을 감금하고 경복궁 바로 앞의 조선전보총국을 장악했다.
일본군이 7개월여 만에 청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전신시설의 장악 덕분이었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전개될 무력 충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신선 확보가 결정적이었는데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전신선 확보와 일본군의 주둔을 극구 막았던 것이다.
김 씨는 일본 군부가 시해의 주체를 감추기 위해 시해를 10월 8일 오전 4시에 끝내기로 했지만 입궐을 강요받은
흥선대원군이 1시간 이상 망설인 데다 서대문에서 합류하기로 한 일본 수비대가 길을 잃어 오전 6시 무렵에야
만행을 저지르게 돼 일본인들이 시해의 주체라는 사실을 감추는 데는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대원군이 미우라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종래 이에 대한 증거로 제시됐던 것들은 날조됐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태진 교수는 "김 씨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 왕비 시해는 (일본의) 명백한 국가 범죄다.
근대 한일관계사의 틀을 바꿔 놓을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연구"라고 추천사에서 평가했다.
<동아일보 2011. 6. 6일>
日 "전신망 장악 위해 왕비를 쳐라"
배후 조종한日 육군참모차장(왼쪽), 미우라 공사는주범 아닌 從犯
일왕 직속 군부 대륙 침략에 사활… 軍출신 公使에 지시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김문자 지음|김승일 옮김|태학사|432쪽|2만원
"재일교포 2세인 나는 자라면서 일본식 이름을 강요받는 굴욕의 생활사를 겪었다.
아픔을 갖고 역사를 읽으며 분노를 갖고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의 말 치고는 뜻밖이었다.
저자가 출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메일로 되물었다.
―역사에 감정이 담기면 객관성이 흐려지지 않나?
"한국인이 한국 근대사를 아무 감정도 없이 읽거나 쓴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하다.
나는 일본 사료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도록 분노를 느낀다.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그 사료의 의미조차 모르는 게 틀림없다. 역사 연구의 객관성?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객관성이란 엄밀한 자료 비판, 논증의 합리성으로 뒷받침되는 검증 과정의 문제다.
사료를 근거로 하는 역사 연구에서 객관성은 기본 아닌가."
책은 저자 말대로 '아픔과 분노'를 머금었으되 시종 '엄밀한 자료와 논증'으로 무장돼 있다.
무엇이 그를 아프고 분노하게 했나. 116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른바 '조선 국모 시해' 사건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도를 찬 무리가 경복궁으로 난입했다. 고종은 정원 쪽 응접실로 나와 앞을 막아 섰다.
침입자들은 왕을 밀치고 곧장 나아갔다. 왕비가 숨어있던 장안당 쪽이었다.
일본인 사관(士官)은 막아 서는 궁내대신 이경직을 향해 권총을 쐈다.
이경직은 안간힘으로 왕비 곁으로 가려다 칼까지 맞고 나가떨어졌다.
왕비는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궁녀 세 명이 정원으로 끌려나와 칼에 베었다.
그중에 왕비도 있었다. 위를 향한 채 쓰러진 왕비는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자객들은 들고 있던 사진을 맞춰봤다.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중에 시신은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나이 45세였다.
당시 일본인 영사조차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없는 흉악'이라 부른 이 폭거는 날이 밝으면서 윤곽이 드러났다.
일본전권공사인 미우라 고로의 지시에 의한 일본인 무리의 범행이었다고, 외국 주재원들은 수군댔다.
관련자들은 일본으로 소환됐다. 하지만 종국엔 다 풀려났다. 사건은 적어도 형사 법정에 관한 한 그걸로 종결이었다.
저자가 '재수사'에 나선 것은 이 지점부터다.
'미우라 공사 주도의 왕비 시해' 그게 전부일까. 관련인들을 다시 역사의 법정으로 불러낸다.
단서는 미우라의 사건 전후 행적. 당시 조선 공사와 도쿄 외무성, 군 수뇌부인 대본영(大本營) 간에 오간
통신 기록과 기밀 문서 등이 증거로 제출된다.
드러나는 '실체'는 알려진 것 이상이다. 미우라는 주범이 아니라 종범(從犯)이었다.
배후는 일왕 직속 군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 그 정점에 육군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대장 등이 있었다.
이들이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를 조선공사에 앉혔고,
그의 지휘하에 일본 장교 8명이 극우 당원들과 함께 쿠데타를 위장한 만행을 저질렀다. 저자의 결론이다.
범행 동기까지 밝혀낸다. 바로 대륙 침략을 위한 전신망(電信網) 확보였다.
당시 한반도에는 의주~부산 종단 전신이 깔려 있었다.
일본군으로서는 바다 건너 대군을 파견하고 지휘하기 위해서는 통신축이 필수였다.
청일전쟁에 낙승한 것도 개전 이틀 전 경복궁 침입 사건을 통해 궁 앞 조선정보총국을 장악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3국(러시아·프랑스·독일) 간섭으로 기득권이 위협받자 친러파인 왕비 제거에 나섰다.
'전신선 조선 반환'을 주장한 전임 공사가 경질되고 미우라가 부임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할 때 해야 한다." 시해 사건을 보고받은 일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명성황후보다 정확히 100년 뒤 오사카에서 나고 자랐다. 나라여자대학에서 동양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후기에서 '7년간이나 사학과 조수직으로 일하면서
하나의 당당한 연구자가 되지 못한 채 퇴직한 낙제생 연구자'라고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추천사는 그의 성과를 이렇게 평했다. "근대 한일관계사의 틀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다.
반가움을 넘어 전율을 느낀다." 국내 대표적인 명성황후 연구자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의 말이다
명성황후 저자 김문자 이메일 인터뷰
오사카에서 자라 나라여자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석사학위를 딴 후 7년간 사학과 조수직을 전전했다.
자녀 교육과 병간호에 매달리다 다시 대학 사무보조원 자리를 얻어 뒤늦게 연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만의 결실이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2009년 일본에서 먼저 출간)이다.
다음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 전문.
―명성황후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
“명성황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책 ‘민비암살’을 보면서였다.
특히 권두에 실린 ‘민비 사진’이 마음을 잡아 끌었다. 실물 사진이 보고 싶었다.
쓰노다 씨의 책에 소개된 ‘영상이 말하는 한일병합사’에 적힌 사진의 소장처, 이와테현(岩手縣) 미즈사와시(水澤市)의 사이토 마코토(齊?實) 기념관에 전화까지 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진이 없다고 했다. 원전(原典)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해 사건 배후로 일본 군 수뇌부를 지목했는데.
“100년 전 일본인을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하다 보니 이상한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다들 가와카미 소로쿠(당시 군 수뇌부인 육군 참모차장)와 연결됐다.
군으로서는 청일전쟁 이후에도 전신선을 관할하에 둬야 했다. 당시 조선의 항일투쟁도 전신선 절단을 겨냥했다.
일본으로서는 전신선을 수비하는 군대 주둔이 필수였다.
당시 전신선을 수비하던 일본군은 수비병들이며,
이들이 전쟁 종결 후 귀국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비군을 새롭게 파견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전신선의 조선반환론’을 주장하다가 경질됐다.
후임이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였다.
미우라는 외무대신 허가 없이 대본영과 통신을 시작하고 왕비 시해를 준비해 갔다.
미우라는 왕비 살해 목표는 달성했지만 일본인의 소행임을 숨기는 데는 실패했다.
대원군이 일본의 환궁 재촉에 버티며 시간을 끈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원군이 일본측과 공모해 황후를 살해했다는 주장은 날조된 것이다.”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이었다고 보나?
“기록을 보면 기억력이 대단히 좋고 총명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우라조차도 ‘여성으로서는 실로 드문 재능 있는 호방한 사람’으로 회상했다.
미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하는 차원의 문제는 차치하고, 당시 일본의 정치가와 군인들이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해서 일본에 대항하려고 한 ‘러시아당 두목’이라고 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왕비만 제거하면 국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게 가능할 거라 오판했다.
결국 왕비에 대한 과대평가와 국왕에 대한 과소평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평가가 오산이었음은 그 후 고종이 일본에 대해 악착같이 저항한 역사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앞으로 명성황후나 고종에 대한 평가는 사료를 토대로 검토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쪽 사료 발굴에 기대하고 있다.”
―남은 연구 과제는?
“왕비 암살자 손에 있던 사진이 언제 누구에 의해 촬영되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 암살자 손에 건네졌는가 해명돼야 한다.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을 꼭 찾아내야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사건 연루자들 중에 책에 소개된 사람은 극히 일부다.
중요 인물이었지만 제대로 취급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들 대부분이 다시 조선에 돌아와 훗날 침략 전쟁의 악역을 맡았다.
앞으로는 러일전쟁기까지 시야를 넓혀 이들의 모략이 어떤 궤적을 보였는지 명확히 밝힐 생각이다.”
―재일교포 2세로서 각별한 사연이 있다고 했는데.
“부친은 한일합방 이듬해에 태어나 10대에 일본에 건너왔다. 합방이 없었으면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겪은 굴욕적인 생활사가 내게도 있다. 해방 후에도 창씨개명에 의한 이름을 계속 써야 했다.
출신 내용까지 숨겨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을 가지고 역사를 읽으며 분노를 갖고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감정이 담기면 객관성이 흐려지지 않나?
“한국인이 한국 근대의 역사를 어떤 감정도 없이 읽거나 쓴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본 사료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분노를 느낀다.
만일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료가 갖는 의미조차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 사람은 역사 연구를 한다고도 볼 수 없다. 역사 연구의 객관성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연구의 객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자료 비판,
논증의 합리성 등에 의해 논의되는 것이며 반드시 거치게 마련인 검증 과정이다.
사료를 근거로 하는 역사 연구가 객관성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기본이다.
비판에 견디지 못하는 주장은 어찌됐건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들이 경험한 굴욕적인 생활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내가 한국식 본명을 대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서부터였다. 그때까지는 일본식으로 통칭되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것은 지금도 많은 재일동포들에게서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강요받았던 이름을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사용하고
태어난 곳을 감추며 살아왔다는 것은 ‘굴욕의 생활사’라 할 수 있다.”
―지금 모국인 한국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욘 사마(배용준) 현상이 일어난 이래 한국을 보는 일본인의 눈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 여파로 내 눈도 확 트이는 느낌을 받고 있다. 100년 전 한국인도 필시 이처럼 멋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 하루 일과와 취미는?
“일주일에 3일 근무한다. 그 외 날에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연구한다.
주부라서 가사일도 한다. 취미는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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