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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묘 / 고양시 대자동

백수.白水 2015. 11. 3. 09:32

일반국도1호선(목포-신의주)가운데 남한에서 접근 가능한 최북단종점은 문산읍에 속하는 임진각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주로(서울-의주)가 중국과의 사신 왕래(한성과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이용되는 주요도로였기 때문에 연행로(燕行路)라고도 하였다그리고 지금은 연신내역에서 판문점까지의 구간을 통일로라고 하는데, 나는 서울의 은평구나 서대문으로 나올 때 주로 이 통일로를 이용하고 있다.

 

통일로를 왕래할 때 통일로IC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지점인 고양시 관산동에서 필리핀참전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늘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참전비보다도 교차로에 세워진 최영장군묘라는 표지판이었다.

 

왜 최영장군의 묘가 이곳에 있을까?

장군의 출생지 혹은 고향이 이곳일까,

아니면 이성계세력으로부터 피살된 지역이 이곳일까?

적어도 귀촌 후 8년여 동안이나 이 앞을 수없이 오가면서 지우지 못하던 궁금증이었다.

어제,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20년 지기와 일영에서 점심을 먹고 귀가하던 길,

드디어 필리핀참전기념비 앞 교차로에서 최영장군묘로 과감하게 핸들을 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영장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1)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2)경기도 고양시 3)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등 의견이 분분하나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이 가장유력하다.

 

그리고 최영장군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성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혀 투옥이 되었으며, 이후 경기도 고봉(高峰: 고양), 마산, 충주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개경으로 소환된 뒤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따라서 최영장군과 묘지가 있는 이지역과의 연고를 살펴보자면, 첫째는 이곳 고양지역이 그의 유배지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왕에 그의 아버지의 묘가 이곳에 있었기에 처형된 후 그 아래에 묘를 쓸 수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 - 통일로 - 필리핀참전기념비 앞 교차로 우회전 - 대자동회전교차로에서 좌회전 - 주차장 - 최영장군묘.

필리핀참전기념비 앞 교차로에서 주차장까지 1.5km쯤 되고, 주차장에서 묘소까지 600m의 오솔길이다.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 최영(, 1316~1388)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고집했고 원∙명 교체기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키워낸 새로운 무장세력 이성계와 불화한 탓에 결국 그토록 지키고자 하였던 고려 왕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고려 말 환란을 해결하며, 동분서주한 해결사

최영은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도운 철원 최씨(동주 최씨라고도 함) 가문으로 그의 5대조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최영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그가 무인으로서 첫발을 디딘 것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 당시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 호군()으로 출세하였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의 시종했던 공을 들어,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된 이후 그 방자함이 도를 넘어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자였다. 안팎으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는 고려왕실의 해결사로서의 최영의 일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은 원나라의 원군 요청에 따라 중국으로 출정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는 원∙명 교체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려의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기 위한 공민왕의 뜻이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든 최영은 밀직부사 유인우의 휘하에서 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데 일조하였다. 이 쌍성총관부의 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인이었지만 쌍성총관부 지역의 원나라 관리로 있다가 공민왕 시기 고려조정과 그 뜻을 같이하여 쌍성총관부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낸 대표적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이키∙쓰시마∙기타큐슈∙세토나이카이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최영은 삼남지역 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백수 최만호( )라는 별명을 얻으며 왜구들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렸던 삼남 지역 백성의 신망도 얻었다. 또 북쪽에서 침입한 홍건적을물리치기도 하였다.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중국 본토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일어난 농민 반란세력으로 이즈음 원나라 군대에 밀려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홍건적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한때는 홍건적이었다. 최영은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국외 세력의 외침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항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한때 최영은 신돈의 모략으로 6년간 유배 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신돈 실각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 무대로 진출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왜구들을 격파하여 왕실과 백성들로 신망을 얻었다. 이렇듯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환란에 최영은 동분서주하며 고려왕실과 국가의 보호자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노린 야심 찬 요동정벌

고려의 명실상부한 명장으로 우뚝 선 최영은 내정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특히 공민왕이 죽고 이인임 등이 축출되고 나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위태로운 운명의 우왕을 보호한 것이 바로 최영이었다. 최영은 그의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내고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고려에까지 미쳤다. 1368년 주원장이 화남을 통일하고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국한 한족의 나라 명은 이미 그 세가 다한 원나라를 압박하면서 북벌을 개시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몽골인들은 중국 본토 지배를 포기하고 북쪽 몽골 지역으로 물러났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로, 명나라는 이 지역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이다.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할 때 전투를 치른 경험도 있었던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했다. 최영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최영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 잇단 외침을 잘 막아내 민심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시기가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인 점과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남쪽에 왜구가 들끓을 것에 대한 우려,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최영의 요동 정벌론에 맞섰다.

고려왕실의 운명을 바꾼 위화도 회군 그리고 최영의 실각

최영의 보호를 받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전을 내준 것과 진배없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이상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의사를 고려조정에 아뢰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 회군 사건이다.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하였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옮겨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 되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풀이 나지 않는 무덤의 주인공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 말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경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새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다. 외적을 막고 고려왕실을 보호하며 청렴하기까지 했던 최영은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나서 존경하는 선배 무장이었고 싸움터에서는 전우이며 그를 장군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과 다름없는 최영을 결국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무덤에는 내내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해 현재는 무성하다.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자리 잡은 최영장군의 인기

고려 말기 명장인 최영의 전 국가적 인기는 고려가 멸망한 후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변모하였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무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 최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민초는 최영을 장군신으로 다시 부활시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영장군’ 신은 조선시대부터 한반도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숭배받는 신이 되었고, 지금도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부산 자성대에 있는 사당에서 '최영장군제'가 열리고 있고 전국 곳곳에 최영장군을 모시는 굿당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글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 네이버캐스트>

 

 

 

 

널찍널찍한 돌계단을 올라가며 헤아려보니 모두 111개의 계단이다.

 

 

 

2015. 3. 22일 최영장군묘 인근 야산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했었다고....

이날 화재 진압에는 산림청 헬기 8, 소방차 15, 진화차 4대에 소방대원 270여명, 고양시 공무원 1050여명, 군인 200여명, 진화대원 80여명 등 총 1600여명의 인력이 투입되어  4시간여만인 오후 5시쯤 모두 꺼졌다고 한다. 피해면적은 야산 3.3ha이며 인명 피해는 없었고 다행히 최영장군묘는 화재를 면했다.

 

 

 

 

 

 

 

 

 

 

최영장군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대자산 기슭에 있으며, 197595일에 경기도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의 형태는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으로 2단의 호석(護石)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양식의 방형묘(方形墓)이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차례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후대에 세워진 묘비와 충혼비가 있고 봉분의 좌측 후편에 원래의 묘비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쪽으로 좌우의 망주석1쌍 중 문인석은 1970년에 새로 제작된 것이며, 곡장(曲墻)이 추가되었다.

이 묘역의 윗 편에는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역이 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8%81>

 

 

 

 

 

최영장군 사당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으며 최영장군의 위패를 봉인하고 있다.

노은리는 최영이 출생한 곳으로 원래의 사당은 노은리 삼봉산정에 있었으나 어느 때인가 철거되었다.

이후 1995년 말 삼봉산 중턱에 사당을 재건하였으며 2007년 진입로 포장과 자연석 계단을 설치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사당 건물에는 기봉사(奇峰祠)’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내부에는 최영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홍성군에서는 1995년 제 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거행한 것을 비롯하여 2007년에도 대제를 올려 장군의 충의와 공덕을 기리고 있다.

 

 

 

 

최영장군 묘비

 

高麗盡忠奮佐命安社功臣判密直事大將軍門下侍中贊成事

(고려진충분좌명안사공신판밀직사대장군문하시중찬성사)

고려의 진충분좌명안사공신이며 판밀직사대장군이자 문하시중 겸 찬성사이고

 

六道都巡察使鐵元府院君謚武愍東州崔公諱瑩之墓

(육도도순찰사철원부원군익무민동주최공휘 영지묘)

육도도순찰사인 철원부원군 무민공 동주 최씨 휘 영의 묘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祔左

(삼한국대부인문화유씨부좌)

삼한대부인 문화유씨와 합장함

 

묘비 후면에 “18대손인 영태가 비를 세우고 종19대 손인 종이품 가의대부 규근이 글을 쓰다.

무진 시월이라고 적혀 있다.

 

 

 

 

최영 장군 충혼비는 1970년 대한민국 국방대학원과 문화공보처에서 세운 것이다.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로 기단부는 1단이다

 

 

 

 

 

 

묘비는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최영장군 아버지 묘비에 최영장군의 친필을 볼 수 있다. 친필의 증거는 비석 뒷면 맨 왼쪽 아래 '영(瑩) 입(立) 석(石)'이란 글자 때문이다. 즉 '최영이 비석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http://blog.naver.com/bae3790/220344222588>

 

 

 

 

 

 

 

 

 

 

 

 

최영장군의 출생지에 관한 기록 (천문과 역사 그리고 진실...katnani.egloos.com)

최영장군의 출생지에 관한 기록을 찾음 (http://katnani.egloos.com/2543809)

 

이전에(2007.6.12) "최영장군의 출생지는 철원"이라는 제 글에서 최영장군의 출생지를 강원도 철원이라 주장하였습니다만 오늘, 새로운 明文기록을 찾았기에 그 자료를 올립니다.

지난 저의 추정이 잘못되었던 같습니다. 철원은 최영의 본관이어서 해당 지역의 인물란에 기록되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적인 최영장군의 출생지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으로 보입니다.

金洞之文赤洞之武 - 처음 보는 문장입니다만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군요.

이 말의 출처는, 이수광의 지봉선생문집 입니다.

아래, 최영장군의 출생지를 구체적으로 명기한 기록을 발췌하였습니다.

 

 

芝峯先生集卷之十三 - 이수광(1563-1628)

 

洪陽錄 洪陽洪州別名起戊申正月止己酉四月

題洪陽雜錄

襟帶山河氣象雄地靈從昔說玆洪堂空學士雙梅月祠掩將軍大樹風千古人才金赤洞一時名宦鄭蘇公欲題新句傳遺躅却愧凝毫思未工李詹號雙梅堂崔瑩有祠皆本州人而世傳金洞之文赤洞之武故云鄭湖陰蘇陽谷曾任是州者也

 

=> 여기에 의하면 최영은 洪州 출생임, 洪州는 충남 홍성

 

 

疎齋集卷之十四 - 이이명(1658-1722)

 

崔將軍遺墟碑

 

閔尙書鎭厚謂余曰世傳洪州赤洞有前朝崔瑩將軍之遺墟吾先人嘗按湖節經過而悲之伐石欲樹碑而未果今洪人望不肖以繼成之諸武將亦聞風而相其役願公書其事于石余聞將軍世家東原亦嘗寓居于洪歟按輿地誌洪之三峰山中峰有崔瑩廟又諺傳廟多威靈過而慢者輒有災州人歲時以旗纛迎神而祀之凡立廟多近於其人之所嘗居然則赤洞之爲將軍遺墟無疑而雄魂必樂玆土如遊子之悲故鄕往往洩其不平之氣以驚動人也赤洞 今謂之火洞閔尙書之先公卽國舅文貞公維重以淸明才識見重於世而尤以表章前古名臣爲己任遺墟之石意不在於識古跡而已也盖將軍早以武勇事恭愍歷禑昌出入將相嘗從元丞相脫脫力戰於江淮之間名滿中國驅紅賊復京國泛海征耽羅掃除金鏞崔濡之亂與倭寇大戰于鴻山焚船于西海又禦之于昇天浦敵愾捍難之績多載舊史國人倚之鄰敵懾之屹然爲國長城者五十年身死而國隨亡其風姿魁偉膂力絶人臨陣對敵神氣安閒矢石交前而無怖色或橫槊賦詩射獵爲樂而紀律 甚嚴三軍股栗是以大小百餘戰所向有功威風壯烈近古未嘗有也至今氓俗聞將軍之名莫不悚然畏之爲人剛直無私世守淸白死時誓天曰我生無貪慾墓必不生草其墓在高陽大慈山果不生草世謂之赤墳然將軍不學昧於大義又不識天命人心之所在助昏主攻遼界我聖祖苦爭而不得乃仗義回軍因衆怒而誅之時年七十三臨刑辭色不變死之日都民罷市過屍者下馬遠近聞之流涕諫大夫尹紹宗論將軍曰功盖一國罪滿天下世或以爲名言而其後本朝贈將軍諡武愍豈聖祖深察 其專心所事死而不悔之忠歟嗟乎惜哉

 

疎齋集卷之十四

 

=> 여기에 의하면 洪州赤洞에 최영장군의 옛집이 있다.

洪州赤洞里成三問의 출생지[성삼문의 外家]이기도 하다. 홍주 적동리는 충청남도 홍성군 洪北面

 

 

잡지명 개벽 제46

 

발행년월일 19240401

기사제목 엄벙이 忠淸南道를 보고, 公州-天安-牙山-禮山-唐津-瑞山-舊泰安-洪城-江景-燕岐-大田

 

百戰古地 洪城郡

 

...洪州는 자래 인물이 배출하야 소위 金谷之文赤洞之武稱言하더니(高麗崔瑩生於赤洞, 李朝成三問亦生於此, 赤洞卽今之火洞(등골) 金谷卽今之金洞) 시대 변천의 결과인지 근일에는 별로 활동의 인물이 하고 청년은 대개 杏村花巷에 타락한 자가 하며 東門 외 중요 시가지는 전부 외인의 하고 古色이 창연한 東門만 의연이 殘雲落照 중에 하얏다...

 

고려시대 赤洞 = 조선시대 金谷 = 현대의 충북 홍성군 홍북면 魯恩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