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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내리는 임진강 화석정(花石亭)의 만추(晩秋)

백수.白水 2015. 11. 19. 09:28

 

2015.11.18 (수)

진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날,

아침에 출근하듯 서울로 나가 知己之友와 둘이서 날궂이를 하고 다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길,

불현듯 빗속임진강풍경을 보고 싶은 생각에 花石亭으로 핸들을 꺾었다.

 

한탄강과 임진강의 현무암주상절리를 만들어낸 용암은 27만 년 전에 강원도 평강에서 분출하여

한탄강과 임진강의 옛 물길을 타고 115km나 떨어진 이곳 화석정 앞까지 흘러 내려와서 멈췄다.

화석정 아래는 임진강에서 현무암절벽이 나타나는 마지막 지점인 것이다.

임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높은 벼랑 화석정에서 보는 임진강과 언저리일대의 전망은 사시사철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학자 야은 길재가 살던 곳으로 율곡의 6대조인 이명신이 물려받아 정자를 지었다고 하니 지나간 세월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을까...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을 가던 선조임금이 한밤중에  강을 건너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한국동란 때의 격전장이었으며 지금은 접경지역이 되어 저 강을 자유로이 건너지 못한다.

 

그러나 강물은 유장한 세월의 애환을 씻김하며 오늘도 유유히 흘러 내린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 )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잡는 등불이 호화찬란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임진강을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고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그 시절을 증명해주고 있어 쓸쓸하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포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使) 황홍헌()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고, 이밖에도 서기정, 권남, 정철, 송시열 등 많은 문인들이 여기서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 14년(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 이후방()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 현판이 걸려 있다.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 숲 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임진강 상류쪽

 

 

 

임진강 하류쪽

 

 

래소정(來蘇亭)에서 바라 본 임진강 8

 

 

 

 

임진강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詩 『래소정어(來蘇亭於)』

 

우리에게 알려진 임진강 팔경의 출처는 래소정어(來蘇亭於)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금의 문산읍 장산리 임진강변에 위치했던 정자(亭子) 래소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한 시이다.

래소정은 임진나루 남쪽에 있던 정자로 조선시대 영의정 관직을 지낸 거창부원군 신승선(愼承善)이 건립한 정자이다.

조선 숙종때 문신인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 선생이 래소정에 올라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읊으니 이것이 임진강 팔경의 유래가 된 래소정 팔경시(來蘇亭 八景詩) 이다.

 

래소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팔경은 1. 화석정의 봄(花石亭春) 2. 장암의 낚시(長岩垂釣) 3. 송암의 맑은 구름(松巖淡雲) 4. 장포의 가랑비(長浦細雨) 5. 동파역의 달(東坡驛月) 6. 적벽 뱃놀이(赤壁仙遊) 7. 동원의 눈(桐園雪) 8. 진사의 새벽 종(津寺曉鍾)을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풍광은 지금 대부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흔적만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제1경 花石亭春 (화석정춘; 화석정의 봄)

 

 

花石亭前花事新 (화석종전화사신) 화석정에 만발한 꽃을

獨來昑賞有閒人 (독래금상유한인) 홀로 감상하는 나그네  

幽旁擧世無相識 (유방거세무상식)  율곡의 명성을 알지못했던 그가

惜先生去後春 (석선생거후춘)   애석타 탄식한들 선생이 가신뒤 봄이라네

 

화석정은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임진강변에 위치한 정자다. 1443(세종 25) 율곡 이이 선생의 5대조부인 강평공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세운 후 율곡 선생이 국사의 여가가 날때마다 이 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 곳에서 보냈다 한다. 정자에는 율곡 선생이 8세때 이 곳에 올라 지은 화석정 8세시가 걸려 있다.

화석정에 올라 만발한 꽂을 감상하며 율곡 선생의 큰 뜻을 되새기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제2경 場岩垂釣(장암수조; 장암의 낚시)

 

 

垂釣春灣百尺臺 (수조춘만백척대) 백척난간에서 봄강에 낚시 드리고

得魚將欲沽深盃 (득어장욕고심배) 고기를 낚는다면 크게 술 한번 사려했는데

傍人不解吾心事 (방인불해오심사) 곁에 있는 사람 내마음 몰라주고

漫道桐江物色來 (만도동강물색래) 를 떠난 동강(桐江)에 물색만 오네

 

장암(場岩)마당바위 로 지금의 문산읍 장산리 임진강변 절벽위에 매우 평평한 바위가 있었는데 그 넓이가 매우 넓어 사람들이 마당바위 곧 장암(場岩)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구술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경의선 철로를 가설하면서 마당바위를 모두 쪼개갔다고 하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제3경 松巖靑雲 (송암청운; 송암의 맑은 구름)

 

 

何處淡雲點點浮 (하처담운점점부) 정처없는 뭉게구름 점점 떠오르듯

遠山如畵恰盈頭 (원산여화흡영두) 그림같은 먼 산이 숱 없는 머리같네

橫遮望眼知多意 (횡차망안지다의) 비스듬히 바라보니 생각도 많다.

恐惹騷人弔古愁 (공야소인조고수) 옛 시름에 이르는 것을 소란하게 할까 두렵네

 

은 특정 지명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래소정 인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려 있던 곳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4경 長浦細雨 (장포세우: 장포의 가랑비)

 

 

長洲細雨晴霏霏 (장주세우청비비) 장개의 가랑비 맑았다 흐렸다

白鷺橫分草色飛 (백로횡분초색비) 백로가 가로 날으니 풀빛이 나는 듯

漁子不愁風浪起 (어자불수풍랑기) 어부는 풍랑을 근심치 않고

倚船遙喚綠蓑衣 (의선요환녹사의) 배에 기대어 녹사의(綠蓑衣, 도롱이)를 부르네

 

장포(長浦)는 긴 포구라는 이름으로 파평면 두포리 구간의 임진강 개펄로 추정된다. 지명유래를 보면 지금의 파평면 두포리 앞 임진강을 장깨(장개)라 하여 긴 개펄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곳에 성담수 선생이 몽구정을 세웠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5경 東坡玩月(동파완월 : 동파역의 달)

 

 

東坡古驛月當樓 (동파고역월당루) 동파역루에 달이 비치니

處處人家簾上鉤 (처처인가렴상구) 집집마다 처마 위 낚싯대로다.

一點奎星看不遠 (일점규성간불원) 한 점 규성(奎星)은 멀리 뵈지 않거늘

今宵應入廣漢遊 (금소응입광한유) 오늘밤엔 들러 광한유(廣漢遊)하리

 

규성(奎星)은 별이름이며, 동파(東坡)는 현재 임진강 북안의 진동면 동파리를 말한다. 동파리에는 조선시대 임진강 남안의 임진나루에서 건너 북안의 동파나루에 닿는 곳인데 임진왜란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때에도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나루에 당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시에서 동파역(東坡驛)이라 함은 동파나루를 건너 위치했던 역원(驛院)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위치는 화석정에서 임진강 너머로 보이는 곳이 동파가 된다.

 

 

제6경 赤壁泛舟(적벽범주 : 적벽의 뱃놀이)

 

 

赤壁磯頭更泛舟 (적벽기두경범주) 적벽 머리에 다시 배 띄웠나니

蘇仙去後尙風流 (소선거후상풍류) 소선(蘇仙) 가신 후 풍류는 남았도다

波殘月白皆良夜 (파잔월백개양야) 부서지는 파도 밝은 달 모두 좋은 밤

不必黃岡壬戌秋 (불필황강임술추) 황강(黃岡)이 필요없는 임술년 가을일세

 

황강(黃岡)은 중국 호북성 황강현, 소식(蘇軾)이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하고 이곳에 거실을 마련 하였다 한다. 적벽(赤壁)은 임진강의 전 구간에 걸쳐 형성된 현무암 절벽을 말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적벽은 아마도 화석정 아래에 펼쳐진 율곡리 적벽 구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7경 桐園暮雪 (동원모설: 동원의 저녁눈)

 

 

桐園暮雪白皚皚 (동원모설백애애 동원의 저물녘 눈이 희디흰데

望裏平坡霽色開 (망리평파제색개) 언덕위 바라보니 날씨 개어가네

入夜江扉終不掩 (입야강비종불엄) 밤이 되어도 강가 사릿문 열렸나니

剡溪疑有子猷來 (섬계의유자유래) 섬계(剡溪)에서 자유(子猷)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리

 

섬계(剡溪)는 중국 절강성 조아강(曹娥江)의 상류, ()나라 왕자 유()가 눈오는 밤에 재규(載逵)를 방문한 고사에서 유래. 동원(桐園)오동나무 정원이란 뜻으로 현재 장산리 마을에 느티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동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말하는 동원은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리에 주막거리가 있었는데 주막거리 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았다 하며 이 곳의 자연마을명이 동자원동(桐子院洞)이라 유래되고 있어 래소정에서 강건너로 보이는 이 곳의 풍광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8경 津寺曉鐘 (진사효종: 진사의 새벽종)

 

 

 

津頭寺隔白雲層 (진두사격백운층 나루머리에 절이 서니 흰구름이 층(層)이 되고

半夜鳴鍾有老僧 (반야명종유노승밤중에 종 울리매 노승이 있음이라

不是姑蘇城外泊 (불시고소성외박) 내 고소성(姑蘇城) 밖에 머문 것 아닌데

寒天落月又漁燈 (한천낙월우어등) 한천(寒天)에 지는 달과 어등(漁燈)을 보누나

 

고소성(姑蘇城)은 중국 강소현 고소산에 있는 성()이며, 진사(津寺)는 임진나루 인근에 있던 사찰로 보여지는데 문헌 기록에 임진나루 인근인 율곡리 산중턱에 사지(寺址) 기록이 있어 이 사찰이 아닌가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