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살며 사랑하며/고향마을. 조상. 집안 등

정충대의 (精忠大義)

백수.白水 2015. 11. 22. 15:10

-. 우리 梁氏의 시조인 양을나(良乙那)

탁라국왕(乇羅國王, 후에 탐라국, 지금의 제주도)으로 단군과 동시대(BC 2,333)의 인물이다.

 

-. 후손 양탕(良宕)

내물왕19(374) 신라에 입조하여 梁氏를 사성(賜姓)받다.

 

-. 후손 양우량(梁友諒)

경덕왕16(757)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니 제주와 남원의 양관(兩貫)이 됨.

 

-. 후손 양능양(梁能讓

병부공파(兵部公派) 파조(派祖). 고려 성종(981-997)때 병부낭중(兵部郎中) 동궁내 시강학사(東宮內 侍講學士)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중광재(重光齋)에 위패를 모셨고, 묘는 실전되어 중광재 위쪽에 단()을 묻고 신도비 세움 (병부공110세까지)

 

 

-. 병부공 11세 양송조(梁松操)

밀직공파(密直公派) 파조(派祖).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事)

금산군 남일면 마장리 삼태곡(三台谷)에 삼태사(三台祠)를 세워 위패를 모셨고, 묘는 실전되어 정충사(精忠祠) 윗산에 을 묻고 사세제단비(四世祭壇碑; 병부공 1013세 까지)를 세움.

 

삼태사(三台祠)에는 밀직공파(密直公派) 파조(派祖)이신 병부공11세 송조(松操)할아버지의 위패로부터 그 후손들의 위패를 지금까지 계속 대를 이어 모시고 있음(현재133)

 

 

-. 병부공 18세 양 제(梁 濟, 1,5501,593)

무과급제 후 내금위 선무랑으로 임금을 호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선조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신의주로 파천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진주로 직행하였다. 호남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과 김해병사 이종인, 의병장 고종후 등을 찾아가 합심 협력하여 진주성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때마침 내린 폭우로 서쪽 성벽이 허물어져 수만의 왜적이 쳐들어오니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에 은 향년44세로 남강에서 자결하였다. 영조 때 통덕랑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진주 창렬사에 위패를 모셨으며 진주시에서 해마다 제향을 지내고 있다.

1936년 사림(士林)과 자손이 협력하여 정충사(精忠祠)를 짓고 이듬해인 1937년에 정충대의(精忠大義) 비를 세웠다.

 

돌아가신 家兄(병부공32世, 容模)께서는 남원양씨 밀직공파대종회 초대회장으로서

종중재산을 찾아서 취득보전하고, 史料를 모아 책을 내고 파보를 중간하였으며,

사당을 짓고 제단을 세우는 등 종사의 기틀을 잡아 놓으셨다

 

새가 자라서 둥지를 떠나듯 자손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고향마을에서 선산을 지키며 조상을 섬기는 사람은 몇 명되지 않는다.

8촌인 海愚(해우) 행식 형님, 일찍이 부산수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원양어선 선장으로 수산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후 귀촌을 해서 宗中일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 형님이 이렇게 시를 잘 쓰시는 줄 몰랐다.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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