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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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제주도

To Albatross. 제주도에서 봐야 할 곳

백수.白水 2015. 12. 27. 08:28

To Albatross

관심있는 곳을 우선 빨강색으로 표시해 봤으니 틈 나면 한번 살펴보셔

 

세계자연문화유산 - 제주도

라산

- 성산일출봉,

- 거문오름용암동굴계

 

세계지질공원 / 제주도

①한라산

②성산일출봉

③만장굴

④서귀포층

⑤천지연폭포

⑥대포 동해안 주상절리

⑦산방산

⑧용머리

⑨수월봉 

 

 

  • 제주의 유적과 지명

  • 한국의 최남단에 있는 서귀포시

  •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영주십이경

    제주도에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영주십이경이라고 지었다.
    제1경은 성산일출()로 성산포 일출봉에서 동해의 해돋이를 보는 풍경이다.

    제2경이 사봉낙조()로 제주시 사라봉에서 바라보는 저녁 해의 광경이다.

    제3경은 영구춘화()로 제주시 남쪽 방선문에서 봄의 철쭉꽃을 감상하는 일이다(방선문의 별칭이 영구다). 제4경이 귤림추색()으로 제주시 오현단 부근 귤 과원이 가을에 노랗게 익는 모습이다.
    제5경이 정방폭포()로 깎아지른 바위 벼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다. 마치 하늘에서 하얀 비단을 드리운 것 같다.

    제6경이 녹담만설()인데, 한라산 정상에 쌓인 눈이 이듬해 5월까지 녹지 않고, 산봉우리를 하얗게 빛내는 아름다움이다.

    제7경이 산포조어()로 옛날 산지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낚시하던 모습이다. 산지포는 지금의 제주항이다.
    제8경이 고수목장()이다. 고마장에서 말을 풀어 기르는 풍경으로, 현재의 제주시 일도동 남쪽은 수천이 넘는 우마를 방목하던 곳이다.

    제9경이 영실기암()으로 한라산 영실 오백나한의 형국을 한 기암들이다.

    제10경이 산방굴사()로 산방사에 있는 굴사 가리킨다. 산방산 중턱에 있는 굴사와 그곳의 늙은 소나무 사이로 바라보이는 남쪽 바다의 풍경이다.

    제11경이 용연야범()으로 용연에서 밤에 뱃놀이하는 흥취를 말한다.

    제12경이 서진노성(西)으로 원래 서귀진노성(西)을 줄여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서귀포구 언덕에 올라 한라산과 천지연폭포의 기암절벽과 바다의 여러 섬들을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용연과 용두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제주시를 관통해 용두암 쪽으로 흘러간 흔적이 남아 있는 제주시 용연.

    제주시 서쪽 해안 용두암에서 동쪽으로 약 200미터 지점에 있는 높이 7∼8미터의 기암계곡이다.

     

    삼성혈과 김령굴

    제주시 이도1동 1313

    먼 옛날 제주도에 사람이 없었던 시절에 양을나()ㆍ고을나()ㆍ부을나()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곳이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목사 이수동()이 둘레에 280여 자의 돌담을 쌓고, 어귀에 홍살문을 세웠다. 또 세 신인의 후예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영조 48년(1772)에 목사 양세현()이 바깥 울타리를 쌓고 그 안에 많은 소나무를 심어 제위전을 마련하였다. 세 굴은 모두 땅에 묻혀서 움푹하게 파여 있다. 1964년 6월 15일, 사적 제134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경내에는 숭보당을 비롯하여 재실 및 추모비들이 있고 숲이 울창하다.

    홍살문 밑에는 제주의 상징 중의 하나인 돌하르방이 있다. 돌하르방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를 『탐라지()』에서는 영조 30년인 1754년쯤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무암을 깎아서 만든 돌하르방은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크기는 대개 1.7미터에서 3미터쯤 되는데, 싱긋 웃는 얼굴과 입, 동공이 없이 불쑥 튀어나온 눈, 크고 널찍한 코, 보일 듯 말 듯 웃는 모습이다. 얼굴에 감투를 썼고, 두 손을 배에 나란히 모으고 서 있는 형태가 돌하르방의 전형적인 생김새다.

    삼성혈 동쪽에 삼을나, 즉 신인을 모신 삼성사라는 사당이 있다. 숙종 24년(1698) 봄에 목사 유한명()이 세웠다. 숙종 28년(1702)에 목사 이형상()이 가락천 동쪽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옮겼다. 영조 48년(1772)에는 목사 양세현()이 모홍혈에 울타리를 치고 제위전을 마련하여 희생()을 써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정조 9년(1875)에 제주 사람 양경천()의 상소에 따라 ‘삼성일사()’란 어필 사액이 내렸고, 헌종 15년(1849)에 목사 장인식()이 숭보당()을 지었다. 고종 원년(1854)에 목사 양헌수()가 제위전을 따로 마련했다. 1871년에 헐렸다가 1890년에 재실을 짓고 다시 제사를 지냈고, 1970년에 중건했다.

    김녕굴()
    구좌읍 동김녕리에 있는 김녕굴()은 김녕사 동남쪽에 있는 굴로 길이 약 700미터, 높이 13미터, 너비 10미터가량의 S자 꼴로 되었다. 예전에 아주 큰 구렁이가 살고 있어서 늘 농사를 망치고 요사스런 일을 일으키어 주민들을 몹시 괴롭혔다. 주민들은 해마다 15~16세 되는 자녀를 제물로 바쳤다. 중종 10년(1515) 봄에 제주 판관 서연()이 부임하여 군교 수십 명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예년과 같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과연 큰 구렁이가 나와서 처녀를 잡아먹으려 했다. 이에 서연이 군교와 함께 달려들어 뱀을 죽인 뒤 불태워 버려서 그런 폐단이 없어졌다. 그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서연은 그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달리했다. 그 일대 사람들은 그를 애석하게 여기고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구좌읍 동김녕리 산7번지

    만장굴()은 만쟁이굴이라고 부르는 서굴 남쪽의 큰 용암 동굴이다. 대략 7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굴은 길이가 8928미터다. 근처의 김녕사굴과 밭굴, 개우젯굴을 포함하여 13.4킬로미터에 이른다. 높이 3~20미터(보통 6미터), 너비 3~23(보통 4~5미터)미터인 이 용암동굴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이라 한다.

    굴 안 600미터 지점에 큰 거북바위가 있다. 길이 3미터에 너비 2미터, 높이 0.7미터로 모양이 천 년 묵은 큰 거북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아주 정교하며 다시 400미터 더 들어가면 높이 7미터의 용암기둥이 있다.

    이 부근의 천정에는 2층 굴 또는 5층 굴이 있으며 2800미터 더 들어가면 길이 50미터의 날개벽이 있다. 막장에는 암반이 내려앉으며 작은 분지를 이루었는데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많은 식물들이 신비하게 자라고 있다. 굴 안에 땅 지네ㆍ농발거미ㆍ굴꼬마거미ㆍ가제벌레ㆍ박쥐 들이 살고 있어서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서귀포시의 정방폭포()

    서귀2리에 있는 폭포로 높이가 23미터, 깊이 5미터, 너비는 8미터로 영주십이경의 하나로 꼽힌다. 큰 폭포가 무지개를 그리면서 바다로 떨어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폭포수가 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곳은 동양에서도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정방폭포의 벼랑에는 알 수 없는 그림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진시황 때 서불(巿)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새긴 것이라 하지만, 이 이야기가 허황되다는 말도 있다.
    서귀포시 토평동에는 소정방폭포가 있다. ‘가는무족시’라고도 부르는 이 폭포는 남서쪽에 있는 서귀동의 정방폭포에 견주어서 물줄기가 가느다랗게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매우 빼어나다.

     

     

     천지연폭포()

    서귀포시 서귀3리 서북쪽에 있다.

    높이가 22미터이고, 너비가 12미터인 이 폭포는 골짜기 양쪽에 울창한 숲과 기이한 바위가 절승을 이룬 가운데 웅장하게 쏟아진다. 밑의 못은 도랑을 이루어 서귀포항으로 이어진다. 천지연에는 무태장어가 많이 살아서 ‘제주도 무태장어 서식지’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서귀포에 있는 천제연폭포()

    서귀포시 중문동에 있다. 천제교 밑에 있는 폭포로 상ㆍ중ㆍ하의 세 폭포로 되어 있다. 제1폭포는 높이 22미터로 속과 겉의 두 겹으로 되어서 장마가 질 때는 속과 겉이 나뉜 두 개의 폭포가 되었다가 장마가 끝나면 겉 폭포는 마르고 속 폭포만 쏟아진다. 겉은 벼랑으로 가려지고, 가끔 바위틈으로 보이는 것이 더욱 신기하며 못물이 어찌나 맑고 푸른지 옥수()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천제연폭포에는 옛날에 옥황상제를 모시는 칠선녀들이 한밤중에 내려와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제2폭포와 제3폭포는 한 바탕의 거리를 두고 있다. 양쪽으로 숲이 우거져서 천연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1폭포 동쪽에 중문원()이 있어서 제주목사가 순행할 때 무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폭포 서쪽에 걸쳐 맨 줄을 타고 건너가서 화살을 주워 오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수월봉에서 바라보는 바다

    신도포구에서 바다를 벗어나면 보이는 산이 수월봉()이다. 드넓게 바라본 제주 벌판은 어머니의 치마폭을 예쁘게 모자이크라도 한 것처럼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다. 녹구물오름ㆍ녹고물오름ㆍ무니리오름이라고도 부르는 수월봉은 예로부터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던 산이다. 산 정상에는 수월정 1) 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뒤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깎아 세운 벼랑이다. 밑에는 망망한 바다가 광활하게 열려 있어 가끔씩 수평선을 넘나드는 크고 작은 배들이 나타날 땐 그 정경에 찬탄이 나온다. 당산봉과 석벽이 한눈에 보이는 수월봉 서쪽 바닷가 절벽 틈에서 솟아나는 샘을 녹고물 또는 눅구물이라고 부른다.

    수월봉은 제주의 많은 오름 중 가장 서쪽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다. 고산리 해안 쪽 바다로 돌출한 수월봉 꼭대기에 수월정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가파도와 마라도

    모슬포 남쪽 바다에 있는 섬인 가파도는 그 모양이 가파리(가오리)처럼 생겨서 가파리ㆍ가파섬ㆍ가파도라고 부른다. 둘레가 4킬로미터 남짓 되는 이 섬에 검은 소를 키우는 목장을 설치한 것은 영조 27년인 1751년 제주목사 정언유에 의해서였다.
    처음에 소 50마리를 방목했는데, 1840년에 영국 함선 1척이 와서 정박하고 소들을 약탈하고 죽이고서 동아줄로 묶어 배에 실었다. 제주 지방관이 가볍고 빠른 배를 띄워 그 사정을 알아보려 하자 영국 함선이 대포 세 발을 쏘았다. 한 알은 바다에 떨어지고 하나는 절벽에 맞고 하나는 땅 위에 떨어졌는데, 그 크기가 둥근 박과 같았다.

    1842년에 목사였던 이원조가 나라의 가축을 놓아 기르도록 하고, 주민들에게 들어가 농사를 짓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세금을 내게 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가파도는 해산물과 감저(, 고구마)가 특산물이다. 섬 부근에는 암초가 많고 바닷물의 흐름이 급하여 예로부터 자주 선박이 재난을 당했기에 항해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지나가곤 했다.

    가파도 남쪽 5리 해상에 외롭게 떠 있는 섬이 한국의 최남단에 자리를 잡은 마라도다. 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섬은 십여만 평의 땅에 몇 가구가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다.

    마라도에는 학사천이 있으나 물이 모자랄 때가 많으므로 빗물을 모아 마시고 살았다. 물이 없을 때는 섬의 높은 곳에서 큰 횃불을 올려 가파도 사람들에게 위급함을 알리기도 했다. 1910년에 등대를 설치하였는데 가파도와 마라도간의 물길이 유독 험하고 가팔라서 ‘난소()’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수많은 배들이 파선하여 어부가 많이 죽었기 때문에 ‘과부탄()’이라고 표시된 지도도 있다.

     

    마라도에 처녀당(또는 할망당)이란 신당이 있는데, 그곳에 얽힌 슬픈 전설 한 편이 전해져 온다.

    이 섬과 가파도가 외진 곳에 있는 것을 빗대어 ‘마라도에서 진 빚은 갚아도(가파도) 좋고 말아도(마라도) 좋다’는 말이 있다. 현재는 제주올레와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텔레비전 광고 덕분에 중국음식점이 여러 곳 들어서 있다.

     

      산방산의 산방굴사

     산방산은 한라산 남쪽 바닷가에 신령스럽게 우뚝 솟은 산이다. 산방산 중턱에는 산방굴사가 있다. 굴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이 굴은 고려시대의 고승 혜일()이 거처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산방굴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에 대정고을로 유배를 왔던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아왔다고만 알려져 있다. 산방굴사의 천장에서는 약수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 물은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인 산방덕이 흘리는 슬픈 사랑의 눈물이라고 한다. 산방덕에 대한 전설은 이렇다.
    남쪽 산기슭은 바다 속으로 달려 들어가 그 머리를 들어 올렸다는 연유로 칭하기를 용두라 한다. 양쪽 가장자리가 홀연히 깎여 한가운데 큰 바위가 염주처럼 두 곳으로 나누어 사이가 떨어진 방이거나 혹은 함정으로 빠지는 문과 같다. 가는 곳마다 앉을 만해서 집 건물이 정교하게 지어진 형태 같다. 산의 한쪽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바다와 접하면서 천연적인 땅굴이 있다. 과거에는 사찰이 있었던 곳과 겸하여 경치가 기이하므로 이를 영주십이경의 하나, 산방굴사(山房窟寺)라 한다.

    한편 산방산 근처 안덕면 화순리에 있는 안덕계곡은 일명 창천계곡이라고도 불린다. 조면암으로 형성된 양쪽 계곡에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계곡의 밑바닥은 매끄럽고 결이 고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로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면서 태산이 솟아났다. 그 암벽 사이를 시냇물이 굽이굽이 흘러서 치안치덕()하던 곳이라 하여 안덕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예로부터 수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산방산 자락의 용머리 해변

    안덕면 사계리와 화순리 경계에 있는 용머리는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한다. 허리와 꼬리 부분이 서로 나뉘어 떨어져 있다. 전설에는 중국의 진시황이 용머리 부분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고종달 또는 호종단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방산에 영기가 서려 있고, 그 남쪽 밑에서 용이 날 자리가 틀림없다고 여긴 그는 용의 허리와 꼬리를 끊었다. 그때 산방산이 며칠에 걸쳐 소리를 지르며 울었고, 바위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한다.

    이곳 용머리 해안에는 하멜의 기념비가 있다.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은 제주도에 표류하여 온 뒤 오랫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탈출했다. 『하멜 표류기』를 지은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서양 세계에 알렸다.

    대정읍 상모리ㆍ보성리ㆍ동일리 경계에 있는 모슬봉은 높이가 186미터다. 조선시대에 모슬악 봉수대가 있어서 동남쪽으로 송악, 서쪽으로 차귀악으로 응하였다.
    송악산은 이중으로 분화한 외륜화산()으로 알려져 지질학적으로 중요하다. 작은 외륜산 즉 작은 봉우리가 99개나 되는데, 전해오기를 100개의 봉우리 중 한 봉우리가 불을 뿜었던 것이라고 한다.

     

     성산일출봉

    문득 그리운 곳이 있다. 마음 깊숙이 자리한 고향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불쑥 그리움이 일어 찾아가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성산일출봉이다. 성산일출봉은 일명 성산성 또는 구십구봉이라고 불린다. 높이는 182미터로 영주팔경 중 한 곳이다. 삼면을 바다로 깎아 세운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봉우리가 3킬로미터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원래 숲이 무성하고 울창하다고 하여 청산()이라 불렀는데, 바닷가에 세운 성채 같은 형세로 인하여 성산()이 되었다.

    성산일출봉은 약 10만 년 전에 바닷속에서 수중 폭발한 화산체다. 뜨거운 용암이 물과 섞일 때 일어나는 폭발로 용암은 고운 화산재로 부서졌고 분화구 둘레에 원뿔형을 만들어 놓았다. 본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었는데, 1만 년 전에 땅과 섬 사이에 자갈과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가 되었다.

    성산 둘레에는 기이한 바위가 99봉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올라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그 장관이 세계의 제일이라고 하여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마치 세상의 처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성산포에서 고려 때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토성을 쌓고 적을 방위했다. 성산에 있는 돌촛대는 김통정 장군이 돌촛대를 만들어서 밤에는 불을 밝히고 적을 감시했다는 곳이다.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 그의 아내는 밤마다 돌촛대에 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였는데, 부인이 “불빛을 조금만 더 돋우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장군이 돌덩이 하나를 주워 그 위에 얹어준 뒤 불을 밝히자 그의 아내가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지지』에도 1637년 정축년에 백성들에게 성산에 살 것을 권유하여 성산 서쪽 기슭에 진해당()이라는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산의 분화구 내에 물과 토지가 없으므로 옮기지 못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이곳 성산포를 배경으로 이생진 시인이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를 지었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삼백육십오 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누구나 한 번은 가고 싶고, 가서 보면 누구나 한 번은 살아 보고 싶은 곳. 성산포는 일출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곳이다.

     

    성산봉은 제주도 동쪽에 돌출한 성산반도 끝머리에 있다. 중기 홍적세 때 분출된 화산으로, 커다란 사발 모양의 평평한 분화구가 섬 전체에 걸쳐 있다. 3면이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를 이루고, 분화구 위에 99개의 봉우리가 빙 둘러 서 있다. 그 모습이 거대한 성과 같다 하여 성산이라 하고, 해돋이가 유명하여 일출봉이라고 한다. 분화구 안에는 풀밭이 펼쳐져 커다란 원형 경기장을 방불케 한다.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ㆍ띠 등이 군락을 이룬다.

     

     벽랑국에서 삼신녀가 당도했던 연혼포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는 열누니, 예혼 또는 열온이라 부른다. 본래 정의현 좌면이었다. 예전에 고ㆍ부ㆍ양 세 신인이 이곳에서 세 신부를 맞아 혼례를 지냈으므로 예혼이라고 했던 것이 변하여 온화하고 태평한 곳이라는 뜻으로 온평리라고 바꾸었다.
    그런 연유로 온평 서북쪽에는 혼인지()라는 못이 있다. 예전에 제주 삼성혈에서 세 신인이 나와 사냥을 하면서 살다가 바다에 떠내려온 나무함에서 나온 세 공주를 만났다. 이곳에서 나이 차례대로 혼인을 하고 살림을 시작했다. 1972년 8월에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성산읍 온평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삼을나가 사냥을 하다가 ‘화성개’에서 물결에 떠다니는 궤짝을 발견했다. 궤짝을 열자 벽랑국의 세 공주가 나타나자 너무 기뻐서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고 해서 ‘화성개’ 또는 ‘쾌성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때 석양이 바닷물에 비쳐서 황금빛 노을이 출렁거렸고, 그런 연유로 이 바닷가를 ‘황루알’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흥리의 앞바다에는 영등 하르방이라는 돌하르방이 있다. 시흥리 마을에 재난이 자주 생기고, 가끔 북쪽 바다에서 난데없이 불이 날아들어 집을 덮치면 불이 나서 그 집이 망하는 일이 생겼다. 사람들이 궁리 끝에 영등 하르방을 만들어 북쪽에 세운 뒤 그 재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제주도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읍마을

    제주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가지 않으면 서운한 곳이 표선읍 성읍리에 있는 성읍민속마을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는 조선 후기까지 정의현의 현청이 있던 곳이다. 영주산을 배경으로 중산간 평지에 자리 잡은 정의현은 본래 제주도의 동도로 태종 16년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정의현의 읍성이 있어 정의골 또는 성읍 또는 진사리라고 불린 성읍리에는 천 년 이상 산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높이가 32미터, 둘레는 4.5미터인 그 둘을 합해서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했다.  정의 고을을 지켜보는 산을 영모르 또는 영주산이라 부르는데 높이가 324미터인 이 산에는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으며 아침 안개가 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영모르 남쪽에는 모자악() 또는 모지오름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다. 높이가 306미터인 이 산은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이다. 진사리에 있는 정의읍성은 ‘진사성’이라고도 부른다. 돌로 쌓은 석성으로 둘레가 2989척이며 높이는 24척이다. 세종 5년에 판관 최치렴()이 감독하여 정월 초아흐레에 시작하여 열사흘까지 나흘 만에 다 쌓았다고 한다. 당시 이 성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피눈물을 흘렸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은 세월 속에 무너졌고 현재는 성벽의 일부와 남ㆍ서문만이 복원되어 있다.

    한때는 몇 개 면을 관할하였던 정의현은 성읍민속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를 찾는 사람들의 필수 관광지가 되었다. 그중 정의 현감이 집무를 보던 정의현의 관아가 일관헌()이다. 세종 5년인 1423년에 정의 현청이 성읍리로 옮겨 오면서 정의읍성과 함께 지어졌다. 1975년에 복원되어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성읍에 있는 정의향교는 1738년(영조 14)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으며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면 소재지가 표선리가 되었지만 이곳 성읍 사람들은 지금도 표선읍을 갈 때 “촌에 간다”고 하며 정의현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있다.

    성읍리의 서북쪽에는 땅의 생김새가 배가 떠 있는 것 같은 배뚜기 산전이라는 들이 있고, 궁미 동남쪽에 있는 안보동에는 원님이 새로 올 때 맞이했다는 원님 맞는 마루가 있다.   

     

     한라산 남쪽에 솟은 송악산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송악산()은 높이가 81미터로 저벼리 또는 저별악이라고 한다. 해안에 접한 사면이 벼랑이고, 위는 평평하다. 조선시대에 송악 봉수대가 있어서 서북쪽으로 모슬악, 동북쪽으로 군산 봉수에 응하였다.
    작은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솟아 있어 아침저녁으로 천태만상을 만드는데, 때로는 신기루가 나타나기도 한다. 바다로 떨어진 절벽은 파도에 침식되어 단애를 이루며 해안 절벽에는 일본군이 만든 진지동굴이 남아 있는 근대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송악산에 오르다 보면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분나구’라는 오름이 있다. 예로부터 이곳을 말 잡은 목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곳의 지형이 험하여 말이 넘어져 죽었기 때문이다. 송악산에는 내려가기가 만만찮을 듯싶은 이 오름 외에도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펼쳐져 있다.

    북서쪽에는 여기암, 일명 장군석이 있다. 옛날 도승()이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장군과 함께 춤을 추다가 떨어져 내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송악산은 특히 이중으로 분화한 외륜화산()으로 알려져 지질학적으로 중요하다. 작은 외륜산 또한 99개나 된다.
    이곳 송악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산방산 너머 한라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가파도와 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송악산은 절벽 위에 있는 큰 오름이다. 마라도와 가파도가 한눈에 보이고 방목하는 말이 초원을 뛰어다니는 넓은 목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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