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위를 에워 흙을 채웠고, 돋운 앞마당에 마루난간(데크)을 놓을 생각이다.
엊그저께(22일, 금요일) 앞마당에 옹벽을 치려고 했으나 일할 사람 중 한사람이 감기몸살로 올라오지 못한다하여 어쩔 수없이 뻐그러지고 말았다. 혹여 장마가 닥치면 어쩌나 걱정은 되지만 앞으로는 조바심내지 않고 되는대로 상황에 맞춰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잘되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온전하게 쉬자.
아내를 미장원에 내려주고 나는 추사고택을 향했다. 집에서 26km의 적당한 거리, 삽교평야지대인 덕산온천과 고덕을 거쳐 추사고택에 이르는 주변풍경이 참으로 싱그럽고 윤택하다.
연결 ☞ http://blog.daum.net/ybm0913/4244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2016. 1. 28일)
잠깐 가볍게 둘러볼 심산이었는데... 두어시간으로는 부족하여 기념관과 화암사는 다음에 보기로 했다.
추사체의 다양성(전홍규, 2008년도)
井자 원형으로 다양한 추사체를 음양각하였고, 상단은 추사의 부모님과 본인의 한글편지글씨를 새겼다.
추사와 인보(권창륜, 2008년)
추사의 인보(印譜) 200과 중 12과를 음양각하였고, 전면은 史野(사야)를 돌출시켰다.
추사체험관 입구
추사고택(秋史古宅)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서울의 저택인 월성위궁은 김정희가 관직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고,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으로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예산의 고택은 18세기중엽(1,700년대)에 건립된 53칸 규모의 양반대갓집으로 지금은 1976년에 일부만 복원된 면적 304㎡ 가량이며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집 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고택은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이고 사랑채는 남향이다.
안채는 6칸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협문·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된 이른바 대갓집 형태이다.
안방 및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의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 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 잡은 ㄱ자형의 집으로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관념이었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지붕은 긴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에 이어붙인 지붕이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있고, 거기서 100m쯤 가면 김정희묘(문화재자료 188)가 있다. 방마다 모사품이기는 하나 선생의 유묵이 걸려 있다.
백송(白松)
김한신(金漢藎:1720∼1758)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증조부로 1720년(숙종 46) 영의정 김흥경(金興慶:1677∼1750)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시호는 정효공(貞孝公)이다. 13세 때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그뒤 오위도총부 도총관, 제용감제조 등을 지냈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다. 김한신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우아한 품격의 소나무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아름다운 공원을 이룬다.
화순옹주(和順翁主) 정려문(旌閭門)
*旌 = 기 깃발 정. 閭 = 마을(里門) 려.
旌門(정문)이나 정려문(旌閭門)은 출입을 위한 문이 아니라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상징적인 건물로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항간에서는 홍살문이라고도 부른다.
정(旌)이란 원래 깃발로 먼 곳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여기에는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旌閭記)를 모시는데 이에 따라 정려각(旌閭閣) 또는 효자각(孝子閣)이라고도 부른다.
정려기(문구) : 열녀 수록대부 월성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정효공 김한신 배 화순옹주지문
백송공원(白松公園)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1,844년 완당의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개인소장)
자연 속으로(박수광, 2008년)
글의 내용을 가능한 살려서 삶과 달 나무와 솔바람에 나부끼는 옷고름, 달에 비춰진 거문고를 넣어서 구상제작.
명월성삼우(明月成三友, 박은실, 2008년)
청풍, 명월, 작가가 벗을 이루어 한산에 머물러 자연과 함께한다는 추사의 조화로운 전신의 글을 산과 인간의 어울림으로 표현하였다.
사유의 꽃(김석우, 2008년)
茗(명) 禪(선)은 여일하다고 말한 추사의 인간본질에 대한 심연한 사유로 향함을 올곧은 직입의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위는 석여공(釋如空, 여공스님)의 와편각(瓦片刻)작품 명선(茗禪)이다.
여기서 茗은 ‘차의 싹 명’자로 “차의 근본(씨앗, 마음의 차)”을 뜻하고 禪은 ‘선 선’자로 ‘선’ 또는 ‘좌선’을 말한다. 따라서 茗禪(명선)이란 “차를 마시고 禪(선)에 든다.”는 말이다. 禪茶一如(선다일여, 선과 차는 한결같다), 茶禪一如(다선일여), 茶禪一味(다선일미, 차와 선은 한 맛이다), 禪茶一味(선다일미)는 모두 한 가지 말이다.
2014. 3. 8일 김포 월곶의 묘적사에서 스님이 새의 날개깃으로 만든 붓으로 써서 내게 건네주셨다.
글씨는 그림(상형문자)에서 시작됐다. 따라서 ‘글씨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라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禪자에 난꽃 두 송이가 피었다.
명상(천종권, 2008년)
추사를 모티브로 선비가 차 한잔을 투각하여 연출하였으며 마천석, 화강석, 상주석을 적절히 사용하여 연출하였다.
추사선생을 생각하다.(민형기, 2008년)
추사선생과 사서루(賜書樓: 책을 하사 받은 집)을 연계하여 그의 학문적 세계를 되짚어 보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소통을 표현한 조형물.
솔잎의 향기(이태근, 2008년)
작지만 부드럽고 여유로우며, 낮으나 소박하고 포근함이 있는 우리네 산을 노래하는 듯한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하였다)
역경속에 난을 쓰다.(이행균, 2008년)
추사는 난을 그리지 않고 쓴다고 했다.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세계관이다. 나그네 같은 삶과 관조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추사고택(秋史古宅)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서울의 저택인 월성위궁은 김정희가 관직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고,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으로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예산의 고택은 18세기중엽(1,700년대)에 건립된 53칸 규모의 양반대갓집으로 지금은 1976년에 일부만 복원된 면적 304㎡ 가량이며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집 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고택은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이고 사랑채는 남향이다.
안채는 6칸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협문·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된 이른바 대갓집 형태이다.
안방 및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의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 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 잡은 ㄱ자형의 집으로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관념이었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지붕은 긴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에 이어붙인 지붕이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있고, 거기서 100m쯤 가면 김정희묘(문화재자료 188)가 있다. 방마다 모사품이기는 하나 선생의 유묵이 걸려 있다.
고택입구
반송
사랑채(舍廊-)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대청쪽으로 난 문은 들어열개 문으로서 위로 활짝 열 수 있어 개방적이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구조이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 화재로 불타버렸다.
안채
안채는 ㅁ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6칸 대청은 흔치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주택구조로서, 왕실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영당(影堂)
예산 용궁리 백송(禮山 龍宮里 白松)
천연기념물 제106호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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