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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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海美邑城) 소요(逍遙).

백수.白水 2016. 8. 27. 18:02

 

2016.08.26.(금)

 

한 달여 계속되던 폭염 끝에 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 긴팔과 긴 바지로 갈아 입어야할 정도로 날이 써늘해졌다.

밤이 되니 춥다. 창을 모두 지그리고 전기장판의 불을 올리고 잤다.

여름에서 가을이 서서히가 온 것이 아니라 단박에 왔다.

단박에 가을이 왔으니 여름은 이제 완전히 물러간 것인가?

 

단박이라는 말 때문에 생뚱맞게도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논쟁을 생각한다.

지눌은 깨달음을 얻더라도 지속적인 수행으로 그 경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돈오점수를 주장하였고

성철은 단박에 깨쳐서 경지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고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다.

  이에 돈오 속에 점수가 있을 수 있고 점수 속에도 돈오의 깨달음이 있다고

균형감을 강조하는 주장(아래 - 원불교대사전)이 있다.

 

즉 완전히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깨달은 성인은 그전의 수행과 깨달음을 계속 실천하므로

돈오 속에는 점수의 과정이 있게 되는 것이며

깨닫고 나서 계속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단계를 밟는다 해도

그 속에는 깨달음이 찰나 찰나의 연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가을 속에서 여름이 가끔씩 파란을 일으키며 서서히 깊어 갈 것이다.

 

 

혹시 돌이 많아서 독고개... 아니면 옛날 이곳에서 독을 만들었거나 팔았던 옹기점이 있지 않았을까?

 

 

 

 

 

 

 

 

 

 

 

읍성(邑城)이라고 하면

 

흔히 지금의 행정구역편제인 읍()을 연상하면서 그 옛날 어느 시절에

해미, 동래, 낙안, 경주... 등의 지역에 읍이 있었을까(?) 의아스럽게 생각하게 되는데...

읍성은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구별되는 성으로

지방(고을)의 관부(官府)와 민간거주지역을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이란?

 

 

()은 고을, 마을, 도읍(都邑), 도성(都城), 나라, 봉지(封地), 영지(領地) 등의 의미를 지닌다.

를 글자의 좌측에 쓰면 언덕 부()가 되고, 글자의 우측에 쓰면 고을 읍()이 된다.

 

+ (꼬리 파, 뱀 파. 병부 절)의 합자로 (둘러쌀 위, 둘레 위)는 영토 나라를 나타내며

(꼬리 파, 뱀 파)는 병부 절(=)의 변형으로 보인다.

 

(=, 병부절)는 병부(兵符: 나무패)나 신표(信標: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서로 주고받는 물건)를 의미한다.

 

 邑(영토) + (諸侯에게 내린 天子符節)...

 서울國都를 뜻하는데 뜻이 변하여 마을고을의 뜻이 되었다(설문해자)

 

는 한자 구성상 으로 쓰일 때에는 우부방이라고 한다.

 

봉건시대에 황제가 제후에게 봉지를 주고 그 증거로 병부를 준다는 의미의 글자로

 제후가 다스릴 지역고을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邑城)

 

지방 군현에 읍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규모는 작지만 도성과 형식은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종묘와 사직을 갖추면 도성이고 그렇지 않으면 읍성이라고 하였다.

읍성이 언제부터 지어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고려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성종 때에는 330개의 행정구역 중 190개가 읍성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에는 읍성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동래읍성, 수원 화성, 홍주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남도석성, 경주읍성, 진주읍성 정도가 남아있다.

 

 

 

 

 

 

 

 

 

해미읍성은 잠양루(東門) 지성루(西門) 鎭南門(南門) 등의 문이 있고 북문(北門)은 암문(暗門; 비밀출입구)으로 되어있다. 진남문은 성의 정문으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뒤에서 봤을 때 요지부동이라서 처음엔 마네킹인줄 알았다.

 

 

성 안쪽에서 봤을 때 문루아래 받침돌 중앙에 皇明弘治四年 辛亥造(황명홍치4년 신해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를 의미하는데 1491(성종 22)에 진남문이 重修(중수) 되었음을 의미한다.

 

 

 

 

 

해미읍성(海美邑城)

 

해미(海美)는 조선 태종 7(1406)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두 현을 병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태종16(1416)에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옮기기 위한 대상지로 정하고, 1417(태종17)부터 1421(세종 3)까지 축성을 완료하였다.

 

그 후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을 두고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 지휘하였고 1651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하면서 충청병마절도사로서의 역할이 끝나게 된다.

 

이후 충청도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고 영장(營將)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면서 읍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성내면적이 약6만평쯤 된다.

 

 

 

 

 

 

진남문 門樓(문루)와 북

 

 

진남루에서 서쪽방향에 배를 내밀고 있는 저곳이 옹성(甕城)으로 망루역할을 한다.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의지해 넓은 평야를 둘러싼 성으로 시야가 툭 트여 시원스럽다.

 

 

 

 

 

 

 

 

 

 

전통주막집을 재현해 놓았다.

 

 

 

 

 

 

진남문(남문)에서 지성루(서문)쪽으로 시작해 성을 한 바퀴 돌고 있는 중이다.

 

 

 

 

집 잔디밭에 요런 그네의자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만들 때 참고하려고 여러 방향에서 사진 몇 장 찍었다.

 

 

 

 

 

 

 

 

지성루(서문)

 

 

 

 

 

 

 

 

지성루 1층 문 천장의 무늬

 

 

 

 

 

 

 

 

노란색 상사화

 

 

암문

 

 

암문 성벽 위에서 보는 성 밖의 풍경

 

 

 

 

소나무숲길

 

 

 

 

 

 

 

 

북쪽 성벽 밖 풍경

 

 

 

 

 

 

동문인 잠양루

 

 

 

 

 

 

 

 

 

 

 

 

 

 

재현된 조선시대의 부농, 말단관리인 서리, 상인의 집 등 민속가옥들

 

 

 

 

 

 

 

 

 

 

 

 

 

 

 

 

 

 

 

 

 

베틀이다.

 

 

 

 

 

 

옛날 시골에서 우리 집도 이렇게 멍석을 말아서 매달아 놓았는데...

 

 

목화

 

 

 

 

모형이 아니라 동네 할머니들이 실제로 다듬이질을 한다.

 

 

 

 

 

 

 

 

 

 

 

 

 

 

 

 

호서좌영 앞에 서있는 수령400년의 느티나무로 높이 16m에 둘레가 472cm에 이른다.

 

 

동헌(東軒)

 

 

 

 

동헌부속사()와 책실()

 

 

 

 

내아(內衙)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건물이다.

 

 

 

 

내아(內衙)에서 올려다 본 동헌과 부속건물

 

 

 

 

 

 

멀리 천수만의 물길이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 본 동헌

 

 

옥사

 

 

 

 

해미읍성과 천주교

 

천주교는 우리나라에 약200년 전인 조선후기에 전래되어 초기에는 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연구되었으며 후에 종교화 되면서 천주교박해가 시작되었다.

 

조선후기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 - 1836)은 당시 천주교의 교인이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으로 열흘간 귀양을 왔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1868년 오페르트도굴사건 (독일의 상인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균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한 사건)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13개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지역의 교민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처: 서산시문화시설사업소>

 

 

 

 

 

 

 

 

 

 

 

 

 

 

 

뒷간(변소)

 

옥사(獄舍) 앞의 회화나무(콩과 낙엽교목). 충청도사투리로 호야나무라 하는데 이 이름이 고유명사처럼 불린다. 수령300년 이상으로 추정하며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단박에 가을이 찾아온 첫날

푸른 하늘은 높고 가을바람이 얼마나 청량하던지

드넓은 잔디밭을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며 쾌적함을 만끽했다.

조선시대의 건축물과 근세의 유물유적을 보면서 추억에 젖기도 하고...

 

이곳은 입장료가 없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전통문화공연을 한다.

가족끼리, 아니면 혼자서라도 천천히 여유롭게 소요(逍遙)하기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