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온 글

퇴수기에서도 차가 우러난다.

백수.白水 2016. 11. 4. 19:36


홀로 있는 것은 좋다.

분별에 시비걸리지 않고 허리 굽은 나무처럼 비틀려 사는 것도 좋다.

멀리 간 자식 걱정하듯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어찌 어버이 뿐이겠는가.

말도 어눌하고 걷는 것도 굼뜨고 눈꼽 낀 눈으로 아침을 맞이해도 날마다 새 아침이다.

어제 아침이 그러했고 오늘 아침도 그러했으니 내일 아침도 그러하리.

저녁이면 차 한 잔에 침잠하여 아침에 얻은 해를 뜨겁게 녹이고 있으니 내일 얻을 해는 내일 걱정하라.

행복하시라 행복하시라.



 

 

퇴수기* 에서도 차가 우러난다.

세상 등진 늙은 중이 진리다.

바보는 일찌기 스승이고 묵은지라야 게미* 있다.

즐거운 이에게 단풍은 더욱 붉고 벙어리에게 자식은 더욱 사랑스럽다.

어눌한 입으로 그대를 위무한다.

돌아가 편히 누우시라.

긴 꿈꾸시라.

별 아직 총총하지 않은가.

눈으로 가슴으로 별이 쏟아지거든 일어나 차나 한 잔 하시라.

새벽을 뜸들이시라.

그 때 해가 떠오른다.

잘 품어 녹여내시라.

남긴다고 저축될 해가 아니다.

마음은 쓸수록 선한 종자가 되느니 악업종자와 싸워 이기려면 부처종자가 제일 아닌가.

장작개비 뜨겁게 불타오를 때 마음을 다비하라.

불땀 사그라질 때는 설령 장작더미 위로 걸어 들어가더라도 다비되기 쉽지 않다.

덜 탄 뼈마디 어쩔 것이며 다 하지 못한 말은 어찌 전할 것인가.

곤두선 사랑은 누구에게 전수한단 말인가.

타오르다 불 꺼지면 누구라도 등 돌린다.

부디 마음 안의 다비장 없애지 마시라.

타오르는 불꽃이라야 언 손이고 가슴이고 눈물겹게 녹여줄 것 아닌가.

그래, 늘상 다비하는 사람이라야 스스로 방광* 하는 법 터득하거늘


 

<2016.11.03. 금산 진악산아래 여공스님>



*퇴수기(退水器): 개수통(改水筒)이라고도 하는데, 찻잔을 씻은 물이나 차 찌꺼기 등을 담는 그릇이다.

*게미: 씹을수록 고소한 맛, 그 음식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맛의 전라도 방언.

*방광(放光): 부처가 빛을 냄.



'옮겨 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끼를 사야겠다고.  (0) 2016.11.14
어떻게 할 것인가.  (0) 2016.11.12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   (0) 2016.04.18
어떤 친구의 술에 대한 후회와 굳은 결심  (0) 2016.03.30
무더위와 강더위  (0) 2015.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