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날 전부터 촛불을 켜두고 산다.
촛불의 온기를 빌어 따뜻하고자 했던 천막생활이 끝난지 오래지만,
굴러다니는 초를 붙잡아 머리맡에 두다가 심지를 돋궈 불을 켠 것이다.
산소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조용히 잡아먹고 홀로 타오르는 품새가 나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까. 티벳 고산지대나 네팔, 부탄 같은 같은 곳은 산소 없다고 숨막혀 죽은 이 없다는데 말이다.
지구상 행복의 조건은 산소가 아니다.
하여튼 촛불을 켜두고 살다가 어느 때 촛불 하나가 넘어졌고 일으켜 세워 다시 불을 붙였는데,
넘어져 피 같은 촛농을 쏟았으니 얼마나 바삐 주변을 녹였겠는가.
그 시간이 한참 지나고 보니 넘어져 다시 일어난 이는 아직 청춘처럼 꽂꽃하고,
사고 없이 불꽃 같이 잘 늙은 이는 쪼그라져 버려질 날이 머지 않았다.
둘의 키 차이야 손가락 두어 마디도 안 되지만,
살다가 넘어져 다시 일어난 이와 한 번도 넘어진 일 없이 살다 잘 늙은 이는 저렇게 모양이 다르다 해도,
먼저 늙어 쪼그라진 이는 넘어진 이가 힘 받는 중에도 끊임없이 촛불의 소임을 다했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불 밝힌 이도 혼신을 다 해 저만큼 녹았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먼저 늙고 나중에 늙는 차이는 먼저 죽고 나중에 죽는 차이처럼 아둔한 산술에 분 불과하다.
못 된 자가 징역갔다고 환호할 일이 아니다.
나쁜 자를 징치했다고 우쭐할 일이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허리 삐끗하듯 발목 삐끗하여 부정에 마음 쏠리다 진리를 거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중생이니까.
중생심은 이 모든 마음을 포괄하는 것이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중생심도 얻기 어렵다.
중생심을 떠나면 아귀※ 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귀에게 제 아무리 금빛 설법을 한들 들을 귀가 있겠는가.
아귀를 풀면 '내 귀'인데 내 귀는 '네 귀'가 아니다. 듣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때는 진리가 허허바다를 표류하기 마련이다.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과 뜨겁고 뜨겁지 않음과 맵고 맵지 않음과 진실과 거짓 사이는 이렇게 눈 뜨고 감는 시간처럼 깜빡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그들은 전쟁을 몇 번 했고 그대가 잠깐 조는 사이에 거짓말은 수미산을 넘었다.
징키스칸도 나폴레옹도 모르는 일이다.
힐러리도 모르고 문재인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2016. 11.12일 여공스님>
※ 아귀(餓鬼): 염치없이 먹을 것을 탐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성질이 사납고 탐욕스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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