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 03(토)
간간히 원효깨달음길로 연결되는 사찰과 옛 절터를 돌아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코스인 당진안국사지 - 영랑사 - 영탑사를 찾아 나섰다.
내포지역에서 유적답사나 산행을 할 때는 가급적 행정경계를 의식하지 말고, 옛 시절 이지역이 대중국 교역과 문화교류의 통로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생각이 자유롭고,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가야산협곡으로 드나들던 길이었다.
원효깨달음길을 쭈욱 이어 걸었던 것은 아니다.
높은 절은 걸어서 갔지만 대부분 자동차로 절 주차장까지 올라다녔다.
안국사는 서해고속도로 서산IC에서 가깝고, 가야산보원사지에서 직선거리로 9km, 자동차로 12km의 근거리에 위치한다.
천년고찰이라 해도 조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찰은 거의 없다.
목조건물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오랜 세월 흥망성쇠의 과정 속에서 멸실과 중창이 반복되다보니 근세에 새로 조성된 전각이 많아 유구한 역사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사무소를 지나서 원당골로 계속 오르면 왼쪽으로 조그마한 저수지(원당지)가 나오고, 더 올라가면 양갓집한옥 같은 기와집이 나타나며, 그 위 석축위로 석탑·미륵석물입상·커다란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비지식이 없기에 석탑이 서있는 이곳을 안국사지로 알았으나 집에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본전이 있던 안국사지는 이곳석불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올라간 곳에 1,000여 평의 옛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현장에 자세한 안내판이 없으니 대부분의 방문자들이 헷갈릴 듯,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볼 것이다.
안국사(安國寺)라는 이름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던 호국사찰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불입상, 석탑, 매향암각이 모여 있는 이곳은 ‘당진안국사 석불입상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석불과 석탑의 고색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고려중기 때 만들어졌을 거라 하니 그 시절 이 석불 앞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옛님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매향(埋香)은 향나무를 묻는 행위로 향나무를 갯벌에 묻었다가 말려 침향(沈香)을 만드는 작업이다.
향나무를 그대로 말려서 태우면 그을음이 생기지만 침향은 그을음이 없어 귀하고 강철처럼 단단하여 불상을 만들기도 한단다.
매향행위는 고려 말 조선 초 주로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왕조교체기의 혼란으로 피폐해진 삶과 왜구의 잦은 노략질에 시달리던 바닷가 민중들이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며 미래불인 미륵불의 출현을 갈망했던 증거이기도하다.
내우외환의 불안감이 밀려오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경제상황이 이렇게 나빠지는데...
망국의 세월을 살아낸 선조들의 고달팠던 모습을 저 석불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불교는 백제시대 한반도에 들어와 융성한 종교로 내포가 그 중심이 되었다. 해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불교가 처음 도착하여 융성한 곳이 가야산이며 이곳에 보원사와 가야사라는 큰 절들이 들어서 계를 내리고 강의를 하여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였으며 한반도 내륙과 일본으로 전파한 산실이 되었다. 지금도 가야산에는 100여개의 옛 절터가 남아있다......
일체유심조를 곱씹으며 원효대사의 깨달음 흔적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절과 절, 옛 절터와 옛 절터를 연결하는 길을 조성했다. 예산의 수덕사, 서산의 천장암, 일락사, 개심사, 홍성의 용봉사, 당진의 영랑사 등 현존하는 사찰과 가야산의 옛 절터인 원효암터, 가야사지,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당진안국사지를 연결해 놓았다. 성찰을 통한 마음의 치유와 깨달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내포문화숲길, 홈피에서>』
안국사지(安國寺址)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원당골의 은봉산(안국산) 중턱에 있는 절터이다. 안국사지석불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채석장을 끼고 올라가면 1,000여 평의 터가 남아있다. 안국사터의 앞면에는 돌로 쌓은 축대가 있고, 터 안에 장대석과 주춧돌 3개가 남아 있다. 이 주춧돌들은 양각형태로 잘 다듬어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터 한쪽으로는 작은 옹달샘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부속건물이 있었음직한 터에 기와조각이 흩어져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미현조에 ‘안국산에 안국사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찰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백제 말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번창한 대사찰이라고도 하고,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가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일으켜 세웠고, 그 후 다시 폐사되었다고 한다.
안국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지점에 ‘안국사지 석불입상(보물 제100호)’과 ‘안국사지 석탑(보물 제101호)’이 서 있고, 그 뒤로 배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에 명문이 새겨진 ‘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충청남도기념물 제163호)’이 있다.
이 한옥 기와집이 요사채로 쓰이는 건물이다. 후원에 바위 같은 돌덩이를 많이 배치하여 우람하고 특히 장독대가 아름답다.
당진 안국사지 석탑(唐津安國寺址石塔)
보물 제101호. 높이 3m. 받침돌은 단층으로 구성되었다. 자연석처럼 보이는 2장의 길고 큰 돌이 땅 위에 있다. 이 돌은 하대석(下臺石)으로 보이는데, 윗면에는 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면석 역시 자연석처럼 보이는 1장의 돌로, 모서리 기둥이나 가운데 기둥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덮개돌은 2장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있고 윗면에는 굄이 있지만, 그 표현은 매우 형식적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았는데, 현재 1층 몸돌과 1~4층의 지붕돌만 남아 있다. 1층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여러 조각이 새겨져 있다. 곧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이 1구씩 배치되었지만, 나머지 1면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사방불(四方佛)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지 못하였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은 편으로, 처마 전체가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밑면 받침은 4단인데, 추녀 끝에서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추녀 끝의 반전(反轉)은 특히 심해 보인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이 석탑은 받침 부분의 구조가 매우 간략하지만, 특이하게도 1층 몸돌의 3면에 여래상이 조각되어 있다. 단층의 받침돌, 지붕돌 밑면의 심한 반전, 여래상의 조각 양식 등에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현재의 규모로 보아, 원래는 몸돌과 지붕돌을 5층으로 올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진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唐津安國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안국사(安國寺) 터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보물 제100호.
높이는 본존불(491㎝), 좌협시보살(355㎝), 우협시보살(170㎝).
본존은 5m에 가까운 큰 불상으로 얼굴과 신체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넓적한 얼굴에는 반원형으로 길게 그려진 눈썹,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눈, 납작한 코, 앞으로 내밀어 오므린 작은 입술 등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관 위에는 사각형의 보개(寶蓋)가 얹혀 있으나, 너무 커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귀는 길어 어깨까지 닿아 있고 좁은 어깨 폭은 그대로 발끝까지 이어져, 불신(佛身)이라기보다는 장대석(長臺石)을 깎아 세운 것 같다. 몸에 붙여 처리된 두 팔은 지나치게 길고 빈약하며 수법 또한 치졸하다. 오른손은 팔을 굽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 앞에 놓아 장지를 꼬부려 엄지에 붙인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의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표현한 것 같다.
두 협시보살 또한 본존불과 같은 양식을 보여준다.
오른쪽 보살왼쪽 보살은 머리가 결실되어 있다.오른쪽 보살은 머리에 높고 둥근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몸에 비하여 큰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술 등이 묘사되어 있고 턱은 둥글게 마무리되었다. 보발(寶髮)이 양어깨에 늘어졌고, 짧은 목 밑으로 두 줄의 목걸이를 걸치고 있다. 드러난 상체에는 천의(天衣)가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있다. 두 손은 본존과 같이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손바닥을 펴서 배 부근에 대고 있다.
왼쪽 보살은 머리 부분이 결실되었으나, 신체의 조각 수법이 오른쪽 보살과 거의 같다. 다만 두 손의 위치가 바뀌어서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허리 아래에는 옷 주름이 얕게 선각되었다.
이와 같이 괴체화(塊體化)된 불상의 형태는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던 양식으로서 익산 고도리 석불여래입상(益山古都里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6호)이나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忠州彌勒里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6호)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극도로 형식화되고 제작 기술이 쇠퇴한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삼존불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진안국사지 매향암각(唐津安國寺址 埋香岩刻)
커다란 자연석 통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으로 바위의 규모는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이다.
이 바위는 배처럼 생겼다 하여 배바위 또는 고래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라고도 불리고, 베틀에 딸린 북과 닮았다 하여 북바위라고도 불린다. 배바위 왼편에 ‘경오이월일(庚午二月日)’로 시작되는 명문, 오른편에 ‘경술시월일(庚戌十月日)’로 시작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각 명문의 조성시기는 서로 다르다.
배바위의 암각명문은 매향(埋香;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하여 향을 땅에 묻는 일)과 관련된 고려말·조선초의 기록이다. 전국에서 발견된 여러 매향관련 명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라 할 수 있으며, 안국사지 및 주변지역의 역사와 매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두산백과>
현판은 없고 문을 열어 보니 안에 불상을 모셨다.
건물터였던 듯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수행공간으로 쓰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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