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11(월)
최치원선생의 은거지로 추정되는 월계리 용연마을의 쌍계계곡을 돌아본 후 석성산성을 찾았다.
홍성 석성산성(石城山城)은 장곡면 산성리 해발255m의 산 정상을 둘러쌓은 둘레1,352m의 포곡식 산성으로 지금은 장곡산성(長谷山城)으로 부르는데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부흥군의 거점은 임존성과 주류성 두 곳이다. 임존성은 예산대흥의 봉수산으로 밝혀졌으나 주류성에 대하여는 아직 확정된바 없다. 다른 기록을 옮기며 답사사진을 올린다.
글과 사진은 앞으로 틈나는 대로 재정리하여 업그레이드 할 것이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그렇다. 허물어져 땅인지 성터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들머리였던 대현리마을
산 정상부다.
나뭇가지사이로 보이는 오서산! 오서산 중턱에 복신이 은거하다 죽임을 당했다는 쉰질바위 복신굴이 있다.
대체로 대밭이 있으면 주거의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백제 부흥운동과 석성산성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의 의자왕과 왕자, 대신 및 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이 지역을 통치하려 하였다.
이 때, 복신(福信)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유민들은 당나라의 통치에 반대하며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개략을 삼국사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왕의 종자(從子, 조카) 복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군사를 일으키고,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으니, 서북부의 여러 성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복신은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도독 유인원(劉仁願)이 있는 도성(都城, 부여 사비성)을 포위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 때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군사와 신라 군사가 유인원을 구하러 옴에 따라 복신은 도성의 포위를 풀고, 웅진강 가에 진을 쳤다가 대흥(大興)의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났다.
그 후 도침과 복신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 ․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칭하고 많은 무리를 불러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얼마 후,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는데, 부여풍은 능히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그 후 복신이 권세를 휘둘렀으므로, 부여풍과는 시기하고 반목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라 칭하고 굴 속에 누워있으면서 부여풍이 위문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알고 먼저 친히 믿는 사람을 거느리고 굴로 가서 복신을 살해하였다.
부여풍은 고구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육군과 수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해 오던 중 백강(白江)에서 부여풍을 돕기 위해 온 일본군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부여풍은 어디로인지 사라졌고, 왕자 부여충승(夫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군과 함께 항복하였다. 그 때 지수신(遲受信)은 홀로 항복하지 않고 임존성으로 가서 항거하다가 고구려로 몸을 피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복신과 도침,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군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모아 처음에는 큰 세력을 형성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하였다. 그러나 지도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 반목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말았다.
백제 부흥군이 거점으로 삼았던 주류성이 지금의 어디인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금강 하류 지역으로 보는 견해 : 이병도는 충남 한산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일본인 津田左右吉은 한산 지방, 池內宏은 서천군 길산천 부근의 구릉이라 하였음.
②전북 지방으로 보는 견해 : 일본인 今西龍은 전북 부안의 금암산성(金巖山城)이라고 하였음.
③충남 연기군 전의 지역으로 보는 견해 : 김재붕은 연기군 전의의 두졸성(豆卒城)과 소류성(疎留城)이라고 하였음.
④충남 홍성으로 보는 견해 : 김정호와 박성흥은 충남 홍성 지역에 있는 성이라고 하였음.
①은 주류성을 한산의 건지산성으로 보는 이병도의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최근 충청매장문화연구원의 건지산성 조사보고서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 보고서는 건지산성의 축조 방법, 발굴된 유물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산성은 “고려 시대에 축성되어 이어져 오다가 조선 시대에 폐성(廢城)된 것으로 믿어진다.”고 하여 건지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위의 여러 견해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④이다.
19세기 말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홍주목 조에서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唐)이 지심주(支潯州)라고 고쳤다.”고 하고, 공주목 조에서는 “왕(문무왕)이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들에게 함께 두릉윤성(豆陵尹城, 지금의 定山), 주류성(周留城, 지금의 洪州)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고 하여 주류성은 지금의 홍성임을 밝혀 놓았다.
19세기 말에 김정호가 이런 견해를 발표하였는데도, 그 뒤에 ①, ②, ③의 견해가 나온 것은 이에 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때문이라 하겠다. 최근에 박성흥은 문헌 기록과 현지답사 결과를 바탕으로 김정호의 기록이 옳음을 확인하고, 주류성은 대흥의 임존성과 가까이 있는 홍성의 석성산성이고, 주류성과 관련이 깊은 백강(白江)은 당진 해안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홍성 석성산성의 건물지 발굴조사를 한 상명대학교 박물관 조사팀 역시 주류성은 홍성의 석성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석성산성은 백제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양산성(驪陽山城)이라고도 한다. 홍성군 장곡면과 청양군 비봉면의 경계지에 위치한 장곡면 산성리의 양성중학교 뒤편으로 표고 약 240m에 달하는 산이 있는데, 여양산성은 이 산 정상 부의 두 봉우리를 포함하는 포곡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200m에 달하는 대규모의 석축(石築) 산성이다. 이 산성에 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 기록을 보면, 지금의 홍성인 홍주목의 남쪽 37리 지점에 여양현이 있고, 그곳에 여양산성이 있다고 한다. 여양현은 백제 때는 사시량현, 신라 때는 신량으로 결성군의 속현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여양산성의 축조 시기는 백제 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
석성산성에 관해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석성산성의 성벽은 표고 240m의 산 정상부분 남쪽과 북쪽의 높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는 포곡식의 형태로, 대부분 석축으로 쌓았다. 성의 최고봉에 달하는 남쪽 봉우리에서 동쪽 벽과 북쪽의 높은 봉우리까지는 암벽과 가파른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북쪽 벽과 서쪽 벽은 자연석의 석재를 막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석축의 대부분은 거의 붕괴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는데, 서쪽과 북쪽의 일부분에는 1m 내외의 성벽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성 안에는 동쪽에 형성된 계곡 부분에 평탄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고, 현재에도 우물지가 1개소가 남아 있어 건물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문지(門址)는 지형상 동쪽과 서쪽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성 안에 있는 건물 터에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기와에 ‘사시랑(沙尸良)’, ‘사라범초(沙羅凡草)’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 기와가 백제 말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출처: 최운식(한국교원대학교 교수)의“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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