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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阿羅伽倻)

백수.白水 2018. 6. 8. 20:03

 

함안서 1500년 전 아라가야 왕성 확인

  

 

 

아라가야 유적지 현장사진.

 

 

함안지역에서 1500년 전 고대 국가인 아라가야(阿羅加耶) 왕성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남도는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 대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긴급 발굴조사에서 아라가야 왕성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7일 밝혔다.

 

 

   

 

아라가야 왕성 발굴현장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인 이번 조사에서 토성과 목책, 대형건물터를 확인하는 등 아라가야 왕성의 실체가 처음으로 밝혀지게 됐다고 도는 평가했다.

 

아라가야는 대가야·금관가야와 함께 가야 중심세력을 형성했고 신라·백제·왜와 교류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에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안라’(安羅)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하나 자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은 조선시대 함안지리지인 함주지(咸州誌) 등 각종 고문헌에 가야국의 옛 도읍터로 기록되어 있다. 남문외(南門外), 대문천(大門川) 등 왕성, 왕궁 관련의 지명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그동안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몇 차례의 지표조사만 실시되었을 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최근까지도 전혀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아라가야의 토목기술과 방어체계, 생활문화를 구명할 획기적 고고학 자료가 나온 것이다.

 

발굴조사는 지난 411일 추정 왕궁지 유적 일원에서 경지 정리 중 드러난 성토 흔적을 함안군청 관계자가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경남도와 함안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관계자의 현지조사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긴급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후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 511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됐다.

 

발굴조사에서는 토성과 목책, 건물터 등 아라가야 왕성과 관련한 시설이 대거 확인됐다. 이중 토성은 전체 높이 8.5m, 상부 너비 20m~40m의 규모로 같은 시기 가야권역에서는 유례없는 대규모 성곽이다. 토성 상부에서는 2열의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진 목책이 발견됐다. 토성의 축조 및 사용 시기는 아라가야 전성기인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으로 보인다.

 

현장을 답사한 전문가들은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은 아라가야 최고지배층()의 거주공간이라며 이번에 발견된 토성은 왕궁을 보호하는 성곽인 왕성(王城)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이어 이같은 사실은 아라가야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추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토성의 정확한 범위와 왕궁지의 흔적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남도는 이번 발굴이 문헌기록과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라가야 왕성(왕궁지)의 실증적 증거가 확인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해 앞으로 가야 왕성 연구의 핵심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한경호 도지사 권한대행은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에 대한 긴급발굴조사를 통해 가야 왕성과 왕궁지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이 본격 추진되면서 올린 최고의 성과라며 도내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이 탄력을 받을 수 있는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7일 현장설명회를 개최하고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오는 11일에는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를 주민에게 알리는 공개설명회도 가진다

 

<출처: 2018.6.7. 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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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토성 나왔지만 왕성 전모 파악은 장기 과제

발굴 면적 1300불과"장기계획 세워 조사해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7일 함안 가야읍 가야리에서 개최한 발굴조사 설명회에서 공개된 토성 성벽.

 

 "아라가야 왕성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조사 지역 일대가 왕궁터로 알려진 만큼 중장기 조사가 필요합니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그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조사 성과를 7일 발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5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5m, 2040m인 성벽과 성벽 위에서 확인된 2열 나무기둥, 건물터, 구덩이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공개됐다.

 

성벽은 나뭇가지나 잎을 올리고 태운 목탄층을 만들고, 그 위에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사용해 공들여 축조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넓은 성벽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기둥 열이 나왔고, 구덩이 유구 안에서는 인근 말이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사한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를 비롯한 각종 토기가 출토됐다.

 

연구소 측은 지금까지 가야 권역에서 조사된 토성 높이가 24m였고, 성벽 축조 과정에서 목탄층이 드러난 사례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아라가야 왕성 실체를 드러낼 실마리를 찾았다고 역설했다.

 

게다가 아라가야 권역에서는 말이산 고분군 같은 무덤만 조사된 상황에서 생활유적을 발견한 이번 발굴은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7일 함안 가야읍 가야리에서 개최한 발굴조사 설명회에서

강동석(오른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토기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지난달 11일 시작해 이달 말에 종료하고, 조사 면적도 1300에 불과하다. 연구소는 건물터와 구덩이 유구 옆에 있는 미발굴 지역을 추가로 조사한다는 방침이지만,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이런 측면에서 토성과 건물터 유구만으로 아라가야 왕성 실체를 확인했다고 알리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삼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조사 지역 남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며 "저쪽에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조사 범위를 확장하면 더 좋은 유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목책 나무기둥 열의 연결 관계와 성벽 길이, 유구 분포 상황을 알려면 추가 조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번 조사 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 대부분이 사유지라는 점. 연구소는 성벽 일대가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이어서 개발이 쉽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김해 봉황동 유적처럼 연차조사를 시행하겠다는 목표를 드러냈다.

 

다만 학계에서는 문화재 당국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정과제가 된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에 매달려 눈앞의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고고학을 전공한 한 학자는 "아라가야 왕성 전모를 파악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장기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출처: 연합뉴스, 201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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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阿羅伽倻) - 두산백과 -

    

 

요약 가야 6국 가운데 한 나라로 삼국유사 기이편 5가야조에는 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혹은 아나가야(阿那加耶),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 등 다양한 이칭으로 전하지만 음운상 모두 비슷하다.

 

원래 변한 12국의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군에 비정된다.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沙內里) 널무덤군(土壙墓群)은 아라가야 초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아라가야는 4세기 말경까지 구야국(狗邪國:金官加耶)과 함께 전기 가야연맹의 양대 세력을 이루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5세기 초 고구려의 공격으로 해체되고 후기 가야연맹이 고령지역의 대가야(大加耶)를 중심으로 5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는데, 아라가야는 후기 가야연맹체의 구성원이 되어 남서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522년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고, 신라는 529년 탁기탄(啄己呑:경남 밀양)을 멸망시키자 가야 남부지역의 여러 세력들은 대가야를 불신하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때 아라가야는 백제·신라·()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통합의 움직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가야 남부제국은 신라와 백제의 영향권에 각각 편입되어 분열되어 갔는데, 남동부지역의 가야제국이 신라에 병합된 반면 아라가야를 비롯한 남서부지역의 가야제국은 자립성을 보유한 채 백제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다. 그리하여 아라가야는 540년대에 가야 남서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여 외교적으로 신라·백제와 접촉하면서 독립과 안전보장을 추구하였으나 백제의 간섭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에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 548년경 고구려·백제간의 독산성(獨山城:충남 예산) 전투를 유발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함으로써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은 다시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전락하였다. 그 뒤 신라가 550년대 전반 한강유역 쟁투에서 백제를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지역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자, 아라가야는 559년경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의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이 되었다.

 

현재 함안 일대에는 말산리(末山里) 대형고분군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후기 가야연맹 시기 아라가야의 세력 정도를 보여 준다. 한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아라가야에 설치되었던 친백제계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최근 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