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7(토)
백마강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에 고용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울면
계백장군 삼척 검은 님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며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닮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꿈꾸는 백마강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짖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역사유적은 본래의 고적뿐만 아니라 세월 따라 후대의 것들이 옛 자리에 더해지면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는 것이다. 공주에서 내려오는 금강은 부소산을 크게 감돌아 흐르는데, 일반적으로 백제 사비성일대 대략 사십 여리의 구간을 백마강(白馬江)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강(白江) 사하(泗河) 백촌강(白村江)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백마강일대는 사비백제(538∼660)의 심장부로 강 남안의 부소산일대에는 삼천궁녀의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落花巖)이 있고, 백제 때의 부소산성·왕궁유적·군창지(軍倉址)와 함께 고란사(皐蘭寺) 등 후대에 들어선 유적들이 전해지고 있다.
낙화암과 고란사는 부소산성북쪽 백마강변에 위치한다. 부소산(성)의 정문인 부소산문을 지나 좌우측 어느 길을 선택하든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부소산(106m)정상에는 사자루가 있고, 그 아래에 있는 낙화암의 높이는 60m정도 된다.
절벽아래에 송시열의 글씨로 전해지는 落花巖(낙화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하자 궁녀들이 화를 피하고자 큰 바위에 올라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망한다는 것은 곤 허물어져 다 잃고 없어진다는 말이다.
개인이나 기업의 파산만해도 끔찍한 일이거늘 온 나라 거덜이 난 망국의 통절함을 어찌하리오.
삼천궁녀는 낙화유수(落花流水)로 스러져 강물처럼 흘러갔으리라.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수덕사가 더욱 유명해졌다면 망국의 통한을 절절히 토해내는 노래‘백마강’과‘꿈꾸는 백마강’으로 인해 백마강.. 낙화암.. 고란사 계백장군 등 백제멸망의 역사가 마치 현실인 것처럼 후세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들었다.
이 노래는 사비성이 함락되자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태자와 왕자들, 여러 신하와 백성 12,807명의 백성들, 삼천궁녀는 물론, 나라를 잃어버린 모든 백제유민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이 아니겠는가...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늦가을 낙화암과 고란사 애수의 산길을 걸었다.
낙화암의 정상부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백화정(百花亭). 1929년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이곳은 부여외곽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낮은 산들이 어울려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강 건너 정면 중앙은 왕흥사지(王興寺址)
왕흥사(王興寺)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삼국시대 절터로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왕흥사는 600년 백제 법왕 혹은 무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창왕 청동사리함 명문」에 의거하여 그 창건시기를 위덕왕 때인 577년(위덕왕 24)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이 30명을 출가시켜 왕흥사 승려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물가에 있었던 이 절은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법왕은 자주 배를 타고 이 절에 들러 향불을 올렸다.
또 절 앞 언덕에는 10여 명이 앉을 만한 바위가 있는데, 백제왕이 절에 가서 예불 드리려고 할 때에는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으며, 그때마다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자온대(自溫臺)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왕실의 비호 아래 대찰의 면모를 유지하였으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멸망 전에 이 절의 승려들은 큰 배 같은 것이 물을 따라서 절의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며, 660년(의자왕 20)의 멸망 후 이 절을 기점으로 해서 항거하던 백제 잔병이 무열왕에 의하여 7일 만에 700명이 사살되면서 절도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폐허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었으나, 1934년에 ‘王興(왕흥)’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수습됨으로써 사지(寺址)임이 밝혀졌다.
폐사지에는 백제시대의 초석과 판석이 남아 있으며, 깨진 기와 조각들이 곳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상하로 단을 이룬 건물지에는 높이 1.5m의 석축이 아직도 10여 개 정도 드러나 있고, 강당이 있던 자리로 보이는 북쪽의 건물지에도 방형 초석과 건물 기단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금당(金堂)과 목탑 자리에는 민가가 건립되어 있어서 주위에 흩어진 초석 이외에는 별다른 유구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많은 백제의 연화문 와당이 출토된 바 있다. 또한, 절터 앞에는 ‘쇠대박이’라고 불리는 논이 있다. 쇳대는 쇠로 된 당간(幢竿)을 뜻하고, 쇳대박이는 철당간(鐵幢竿)이 세워져 있던 장소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낙화암에서 강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고란사(皐蘭寺)가 나오는데, 내려다보이는 절의 규모는 작지만 백마강·낙화암절벽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고 한마디로 참 고즈넉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란사아래 강변의 선착장과 유람선도 아름다운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고란사(皐蘭寺)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란초(皐蘭草) <이미지 네이버블로그에서 끌어옴>
皐(고= 언덕 고, 못 고): 언덕, 못, 늪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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