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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본가터. 신사임당의 친정살이와 친영제(親迎制)

백수.白水 2019. 1. 8. 22:08

파주연천지역에서 10여년 사는 동안 율곡의 유적지인 화석정과 자운서원을 몇 차례 둘러보았으나 그의 본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니 궁금증은 여전하다.


 파주 화석정(花石亭) http://blog.daum.net/ybm0913/831 2012.01.13

 율곡선생유적지(자운서원, 묘역, 율곡기념관)http://blog.daum.net/ybm0913/832  2012.01.14





율곡(栗谷) 이이의 생가(生家)는 강릉의 오죽헌이고, 본가(本家)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다.


그의 아호 율곡은 여기서 나온 것인데 본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여태껏 고증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율곡리 515번지(3리 안말), 525번지(2), 575번지(3)가 거론되는데 이중에서 화석정(花石亭) 바로 아래에 있는 515번지가 가장 유력시된다고 한다.





율곡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조상들은 외가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맏이인 경우에는 거의가 그렇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결혼제도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의 혼인풍습에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여자 집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곧 처가살이와,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올리고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친영제(親迎制)가 있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고구려시대에는 장인의 집 뒤에 서옥(婿屋)이라는 사위의 집을 지어 놓고 10여 년 가까이 신랑을 거기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에 와서는 장인 집에 머무는 기간을 3년으로 줄였고, 조선 때에는 대략1년으로 줄었다.

조선초부터 유교적인 친영제가 정책적으로 권장되었으며, 성리학적 윤리가 정착된 17C 이후에는 남귀여가혼이 소멸되고 친영제가 정착하였다.

이에 따라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강화되었으며, 적장자 상속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광복 후엔 3일로 줄어들었고, 지금은 하루로 줄었으니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다녀와 신부의 친정집에 가서 하룻밤을 머문 뒤에야 신랑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부부관계는 여성중심이었다.

며느리가 힘든 시집살이를 한 것은 시어머니가 강했기 때문으로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시킨 것은 시어머니였지 시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사임당의 친정살이와 친영제

[출처] 신사임당의 친정살이와 친영제(한국 여성사 편지, 책과 함께 어린이)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 유학자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해.

신사임당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시도 잘 짓는 여성이었단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정도로 유명해.

풀벌레나 꽃들을 얼마나 섬세하게 그렸는지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보면서 감탄하곤 하지.

신사임당이 살 때만 해도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경우가 드물었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여성들도 결혼하면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모두가 잠잘 때 남 몰래 책을 읽거나 글을 썼대.

그러니 그림을 그리기는 더 힘들었겠지?

그런데 신사임당은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신사임당은 열아홉 살에 서울 사람인 이원수와 결혼했어.

그런데 결혼한 뒤에도 거의 20년 동안 강릉에 있는 친정에서 살았단다.

율곡 이이도 서울이 아닌 강릉에서 태어났어.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딸을 너무 아껴서 서울로 보내지 않았다는 말도 있어.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고 해도 사대부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딸을 데리고 있지는 않았겠지.

사실 그때까지도 우리 결혼 풍습은 여전히 처가살이였단다.

신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은 자신의 본가와 처가를 왔다 갔다 했어.

신사임당만 특별하게 친정에서 지낸 것이 아니라는 얘기야.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강릉에 사는 이사온의 외동딸과 결혼했어.

결혼한 뒤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 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시댁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지.

그런데 강릉 사는 친정어머니가 아팠단다.

이씨 부인은 자식이라고는 오로지 자기 하나인데 늙고 병든 어머니를 홀로 살게 할 수 없다며 '각자 자신의 부모를 모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남편에게 제안을 했어.

그래서 이 씨 부인은 강릉에 살고, 남편 신명화는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살게 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딸 다섯은 모두 강릉에서 자랐지.


더 흥미로운 것은 신사임당의 부모뿐만 아니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그랬다는 사실이야.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 이사온도 결혼한 뒤 처가에서 딸을 낳고 살았지.

그러니까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란 집은 외할머니 때부터 살았던 곳이야.

신사임당도 결혼 뒤 곧바로 시댁이 있는 서울로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면서 자식들을 낳고 기르는 게 자연스러웠을 거야.

신사임당이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지 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친정에서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지.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외손자인 율곡 이이에게 서울에 있는 집 한 채와 토지를 주어 자신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단다.


그런데 조선 초기 정도전 같은 성리학자는 '처가살이 결혼' 때문에 여성들이 교만하다고 하면서 송나라 결혼 제도인 '친영제'를 따라야 한다고 했어.

'처가살이 결혼'은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하고 신혼살림도 하는 거잖아.

'친영제'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하고 사는 것을 말해.

조선 4대 왕인 세종은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숙순 옹주를 친영제에 따라 결혼시켰단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결혼 풍습이 쉽게 바뀌지 않았어.

조선 중기까지도 사람들은 처가살이 결혼 풍습을 지켰기 때문에 재산 상속이나 제사 지내는 방식도 고려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


백성들이 새 제도를 따르지 않자 13대 왕인 명종 때에 대신들은 처가살이 풍습과 친영제를 섞은 새로운 결혼 풍습을 생각해 냈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결혼식을 치르고 며칠 신부 집에 머물렀다가 신부와 함께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결혼과 같아.

그래도 여전히 결혼식을 신부 집에서 하고 신부는 그대로 자기 집에 머물며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한두 해 지나서야 아이와 함께 시집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어.

신랑은 자기 집과 신부 집을 오가며 살았고.

일거리가 많고 바쁜 농사철은 자기 집에 가서 일하다가 일거리가 적을 때는 신부 집에 와서 지내지.

이를 '해묵이'라고 하는데 몇 십 년 전까지도 이런 풍습에 따라 결혼하는 곳이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