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한성(漢城)백제시대(BC18년 ~ AD475년)

백수.白水 2019. 2. 19. 17:27



백제(百濟)의 역사


백제(百濟)는 기원전18년 건국 후 서기660년까지 37명의 왕이 재위하며 678년의 역사를 이어간 왕국으로 일반적으로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로 나뉜다.

 




 

 1. 한성(漢城)백제시대(BC18~ AD475)

  

백제의 첫도읍지는 위례성(慰禮城)으로 풍납토성·몽촌토성·아차산성·석촌동고분군·방이동백제고분군·가락동고분군 등의 유적이 있으며, 특히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중심지였던 하남위례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유적지로 보고 있다.


4759월 도읍지인 한성(漢城, 위례성)이 고구려 장수왕의 고구려군에 함락되고 개로왕(21, 재위455-475)이 살해되니, 문주왕(22, 재위 475-477)은 다음 달인 10월에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다.

 

 

 2. 웅진(熊津)백제시대(475~ 538)


왕성인 웅진성(지금의 공산성)은 금강이 수운교통과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공산성은 산성으로서 견고하였다.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5명의 왕이 약 63년간 재위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귀족세력에 피살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었으나, 무령왕(25, 재위 501~523)이 즉위하면서 국력을 점차 회복하여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일부를 회복하게 되었다.

 

26대 성왕(재위 523~554)은 중앙의 행정조직을 22부로 재정비하고, 지방의 행정 및 군사조직을 방군성(方郡城) 체제로 전환하는 등 대대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특히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김으로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웅진백제는 64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지만 공산성·송산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백제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으며, 특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3. 사비(泗沘)백제시대(AD 538~ AD 660)


성왕(26, 재위 523~554)538년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백제라는 국호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부여지역은 금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넓은 평야가 있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금강을 통하여 남부지역 및 가야지역으로의 진출과 서해를 통한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한층 용이하였다.

 

왕성은 부소산성을 배후산성으로 하고, 부여를 둘러싸는 나성을 축조하여 이중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었으며, 22부사의 중앙 관부와 5방의 지방 통치조직을 완비하였다.

대내외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시킨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고구려가 점유한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에 나서기도 했으나 554년 신라와의 전쟁 중에 적에게 붙잡혀 사망하였다.

 

무왕(30, 600~641)은 왕권을 회복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여 재위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왕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익산에 왕궁성을 조성하고, 대규모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31대 의자왕(31, 641~660)은 즉위 이듬 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켰고 이후에도 신라의 서부지역에 대한 공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서기660712일 나당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자 항복하고 의자왕과 태자, 여러 왕자들, 다수의 고위직 관료, 그리고 백성 12,807명은 당의 수도로 보내졌고, 백제지역에는 당에서 5개의 통치조직을 두게 됨으로서 고대왕국은 678년 만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