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있는 몽촌토성은 야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든 한성백제시대의 중요한 성곽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제297호인 몽촌토성은 일반적으로 토성이라 부르지만 사실 순수한 토성은 아니다. 남한산에서 뻗어내린 최고 높이 44.8m인 타원형의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이른바 판축 기법을 이용해 입자가 곱고 잘 들러붙는 점토를 5~10㎝ 두께로 차곡차곡 올려쌓은 산성이자 토성인 것이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면을 깎고 다듬어서 급경사를 만들고 그 경사면에 목책을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도록 하였다. 성벽 밖으로는 방어용 물길인 해자를 둘렀으며, 성벽 바로 안쪽의 네 지점에는 주위보다 3~5m 정도 높게 토단을 마련하여 망루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축조된 성곽은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평면 형태가 정연하지 못하지만 단순화시키면 마름모꼴에 가깝다. 규모는 면적이 13만 6천여 평, 성벽 전체 길이가 2,285m에 달하는 큰 성으로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이 730m, 동서로 가장 긴 곳이 540m이며, 그 평균은 남북이 약 540m에 동서가 약 400m이다. 또한 성의 동북쪽 밖으로는 270m 가량 이어지는 외성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지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현재의 지표면을 기준으로 할 때 10~13m 정도이다. 그렇지만 성벽의 바닥이 지금의 지면보다 2~4m쯤 지하에 있고, 그동안 풍화에 의해 깎여나간 것까지 감안한다면 원래 높이는 13~18m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위한 체육시설 건립 예정지로 확정되면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6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어 몽촌토성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물은 토제품, 옥제품, 석제품, 금속제품, 목제품, 골제품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주종을 이루는 것은 토기로서, 다양한 형태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토기 또한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고구려 토기의 존재는 몽촌토성이 한성백제 멸망 후 한동안 고구려에 의해 점령,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중국 서진의 것으로 판단되는 흑갈색 유약을 입힌 동전무늬 도기 조각인데, 이는 몽촌토성이 만들어진 시기를 3세기 중후반 무렵이나 그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유적으로는 반지하의 움집터 12곳, 주춧돌을 사용한 지상 건물터, 조선시대의 온돌 건물터, 연못터, 곡물이나 기타 음식물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깊이 파서 만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의 옛 모습: 1985년 88올림픽 체육시설을 짓기 시작하던 때의 모습으로 당시만 해도 공사장 뒤쪽의 몽촌토성은 마치 한적한 시골의 나지막한 야산처럼 보였다.
이제까지 몽촌토성을 한성백제시대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가 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있어왔으나 몽촌토성이 발굴됨으로써 이런 주장은 다소 후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발굴에 참여한 학자조차 “출토 유물이나 내부 시설에 있어 현재까지 거의 전지역이 발굴조사된 몽촌토성에서는 최고 지배세력이 거주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되고 확인된 유물이나 유적이 초기 백제사를 규명하는 데 소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지만,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터나 관청터, 혹은 최고 지배층이 사용했을 만한 유물이 아님도 분명하므로 유물이나 유적만으로 본다면 사실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 아니라면 과연 이 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발굴 뒤에도 여전히 이곳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이도 있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蛇城)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백제의 도성이 함락될 때의 남성(南城)으로 간주하는 학자도 있는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그러니 고대사에 밝지 않은 우리로서야 교통정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듯하고, 지금으로서는 아쉽지만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나 그 규모와 축조 방법, 내부 시설물, 출토 유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백제 초기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성곽”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와 운명을 같이했던 듯하다. 고구려에 의해 한성백제가 무너진 뒤 이곳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는지 발굴 과정에서 삼국시대 후기나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유물 유구는 보이지 않다가 조선시대의 흔적이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국경선이 백제와 달랐던 고구려, 신라, 고려에게는 이곳의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옛 성에 기대어 사람들은 또 새로운 삶을 일구었다. 세조의 정변을 도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람(權覽)이 이곳에 지은 무진정(無盡亭)에 부친 서거정(徐巨正)의 기문이 남아 있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 ‘몽촌대감’으로 불렸던 김종수(金鍾秀)에 얽힌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오기도 하며, 또 그의 할아버지로 숙종 때 우의정에 올랐던 충헌공 김구(金構)의 묘와 신도비(神道碑)는 지금도 성안에 건재하다. 성 안팎에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도 성명 석 자조차 남길 일 없던 민초들의 삶은 또 그것대로 일동내, 큰말, 몽촌, 잣나무골 하는 마을 이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유물이나 유적은 거기에 담긴 역사적 사실이나 가치에 못지않게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몽촌토성으로서는 다행이고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가뭇없이 사라지거나 초라한 모습으로 남은 다른 백제 유적과 달리 편안하고 넉넉하고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토성 내부의 높고 낮은 구릉에는 잔디와 나무가 심어져 있어 마치 골프장처럼 보인다. 토성 안 구릉을 따라가다 남쪽으로 눈길을 주면 멀리 남한산이 보인다.
거대한 올림픽 기념 조형물인 평화의 문을 오른편으로 끼고 길을 따라가면 올림픽파크 호텔 못미처 곰말다리가 나선다. 다리 아래 양쪽으로는 옛날 몽촌토성의 해자가 호수로 변해 띠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가면 양쪽에 성벽과 자연 해자였던 성내천을 거느리고 북문터에 이르게 되고, 오른편으로 휘도는 길을 따라가면 남문터에 다다른다. 그대로 성벽에 난 비탈길을 따라 왼쪽 봉우리에 오르면 성안은 물론 멀리 남한산, 북한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해자터: 곰말다리 앞에서 본 모습이다. 옛 해자터가 지금은 넓은 호수로 변했다.
길은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성을 한 바퀴 돈다. 완만하게 경사진 왼편으로 길을 택하여 내려가면 성벽 바깥으로 굵은 통나무가 일렬로 늘어선 것들이 내려다보인다. 성벽의 방어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세웠던 목책을 일부 복원한 것이다. 위에서 보면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아래쪽 산책로에서 보면 충분히 방어에 보탬이 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시설물이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1992년 문을 연 몽촌역사관에 닿는다. 역사관에는 진품은 아니지만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유물의 일부와 움집터, 저장구덩이 등을 축소 복원해놓았을 뿐 아니라, 한강 유역을 포함하여 대표적인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어서 부족하나마 백제 문화 이해에 도움을 준다.
몽촌토성의 목책: 몽촌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바깥에 세웠던 목책의 흔적이 발굴 당시 발견되었다. 그중 일부를 복원한 것으로 토성 안에서 가장 성벽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관을 나와 다시 성벽 위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목책이 설치된 지점을 지나 성벽이 끊긴다. 동문터다. 길을 건너 능선을 오르면 무슨 우주선 같은 회색빛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발굴조사 때 드러난 움집터를 원형대로 보호하기 위해 세운 시설물이다. 의도는 이해하겠지만 디자인은 아무래도 지금의 몽촌토성과도, 그 옛날 초기 백제의 움집터와도 너무나 동떨어져 보인다.
백제 초기 움집터: 성 내부에는 땅을 30㎝ 가량 파고 만든 움집터가 모두 12기 확인되었다. 그중 현재 원형대로 보존한 제3·4호 움집터의 전경이다.
능선 하나를 넘어 더 남쪽으로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제법 굵게 자란 소나무가 숲을 이룬 야트막한 언덕으로 향하면 바로 김구의 묘소이다. 네 마리의 주작을 귀퉁이에 새긴 특이한 지붕돌을 머리에 인 신도비가 눈길을 끈다. 묘소를 내려와 남쪽으로 향하면 길은 남문터 가까이에 세운 올림픽 기념미술관으로 이어지는데, 눈길 닿는 곳마다 자리잡은 현대의 조각물들이 우리를 다시 현실세계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미술관을 지나 성벽 아래 길로 접어들면 처음 성을 들어서던 그 자리에 서게 된다.
토성 내부에는 백제시대 사람들의 흔적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람들의 흔적도 여럿 있다. 그중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헌공 김구의 묘와 신도비로, 네 마리의 주작을 새긴 화려한 지붕돌을 이고 있는 신도비가 특히 눈길을 끈다.
몽촌-꿈말, 그것이 아스라이 사라진 백제의 꿈인지 아니면 우리네 삶의 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몽촌토성을 거닐다보면 20세기 서울의 역사를 상징하는 88올림픽 기념공원과 2천 년 고도의 백제 유적의 행복한 만남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진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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