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정도(定都)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비류와 온조는 ······ 남행하여 ······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 강 남쪽의 땅이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혀 있어서, 하늘이 내린 험준함과 지리적 이점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떠나 그곳에 머물렀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들로 보좌토록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니, 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백제 제21대 임금 개로왕 21년(475) 9월,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의 공격을 받아 왕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죽음과 8천 명의 포로를 남긴 채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져간 하남위례성은 이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묻혀졌다. 그리하여 한성백제의 수도로 하남위례성을 처음 소개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조차 그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듯 「지리지」에서 하남위례성을 지명을 알 수 없는 곳, 미상지명(未詳地名)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위 도면의 초록색 부분이 현재 남아 있는 성벽부분이고 주황색 음영 들어간 부분이 2017년 이전까지 조사된 부분이다. 2017년에는 삼표 레미콘 부지가 추가 되었다.
이른바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 500년 동안의 도읍으로서 백제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어디일까? 그동안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는 대체로 네 곳, 천안 위례성, 하남시 춘궁리 일대, 서울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꼽혀왔다.
잊혀진 고도(古都)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를 언급한 사람으로 먼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을 들 수 있다. 그는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에서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혹은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직산은 현재의 충남 천안의 직산면 일대를 가리키는데, 일연은 이곳을 하남위례성으로 판단한 근거는 전혀 제시한 바 없다. 아무튼 이를 근거로 최근에도 천안의 위례산성이 하남위례성임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단 여기는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한수, 곧 한강 유역과 너무 멀고 위례산성 또한 고고학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성으로 확인되었다.
하남위례성의 확실한 위치를 찾으려고 본격적으로 시도한 사람은 조선 후기의 다산 정약용이었다. 실학자답게 다방면에 많은 관심과 깊고 너른 지식을 가졌던 그는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하남위례성에 상대되는 하북위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과는 달리 하북위례성이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며, 온조왕 14년(B.C. 5) 한강 이남으로 천도한 곳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면서 그 위치를 지금의 하남시 춘궁리 일대로 비정하였다.
근대 학문이 시작된 뒤에도 고(故) 이병도 박사가 다산의 관점을 지지하였고, 현재도 적지 않은 한국 고대사학자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다산 이래 학계 일부에서 하남위례성터로 지목해온 하남시 춘궁리 일대, 구체적으로는 춘궁동과 초일동, 광암동에 걸쳐 있는 이성산성을 1999년까지 모두 일곱 차례 발굴한 결과 그러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신라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출토된 반면 백제의 흔적은 도무지 찾을 수 없어 현재는 신라가 진흥왕 이후 한강 일대를 점령하면서 쌓은 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어서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떠오른 곳이 몽촌토성이다. 1975년 한 학자가 백제 관련 학술회의에서 이곳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한 뒤로부터 세간의 주목이 쏠렸다.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즈음하여 공원으로 조성되기에 앞서 9개 기관으로 조직된 공동발굴단의 6차에 걸친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3세기 말엽부터 5세기 후반에 이르는 백제 토기와 고구려 토기, 동전무늬가 있는 중국 서진(西晉)시대(265~316)의 도기, 육조시대의 자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발굴을 주도한 학자들은 몽촌토성이 “현재까지 한강 유역 일대에서 조사된 성곽 유적으로만 보는 한 한성백제시대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 출토된 중국 도자기와 백제 토기들이 한성백제시대와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과, “고구려 토기는 475년 무렵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과 몽촌토성 장악 이후의 산물”로 해석한 결과였다. 이후 많은 학자가 이를 받아들여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는 학계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풍납토성의 출현으로 상황이 완연히 달라진 것이다. 1997년,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제까지의 여러 가정을 반증, 극복하는 엄청난 유물과 유적을 쏟아내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판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925년,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가 휩쓸고 간 뒤 풍납토성에서는 갖가지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초두(靑銅鐎斗 다리가 셋이고 자루가 있는 쟁개비), 금귀걸이, 과대금구(銙帶金具 허리띠장식), 유리옥, 4등분한 원형무늬가 있는 수막새 등 비록 사람에 의한 조직적인 발굴이 아니라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준 대홍수가 작은 보상처럼 안긴 발견이었지만 이 유물들은 한결같이 화려하고 비중이 컸다. 이들의 등장으로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학자들이 차례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풍납토성의 옛 모습: 성의 완벽한 원형은 찾아보기 힘드나 그나마 남아 있는 성벽만으로도 풍납토성이 한강변에 자리한 거대한 평지성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일본인 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었다. 1934년 그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사람이 오랫동안 사학계의 원로로 군림한 이병도 박사였다. 그는 1939년 『진단학보』 제10호에서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는 백제의 방어용 성인 ‘사성’(蛇城)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그 근거로 ‘풍납’(風納)이라는 지명은 우리말 ‘바람드리’의 한자명이며 그것은 ‘사성’을 뜻하는 ‘배암드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와(轉訛)한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은 우리 학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권위와 더불어 차츰 통설로 굳어지면서 풍납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은 긴 겨울잠에 빠져들었다.
변화의 단초가 열린 것은 1964년이었다. 그해 서울대학교의 김원룡 교수가 전면적인 발굴은 아니지만 최초로 풍납토성 안의 유물 포함층 8군데를 시굴조사하였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몇 가지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풍납토성의 축조와 성격을 “초축(初築)을 1세기경으로 보고 475년 공주 천도까지 전후 약 5세기의 유적”으로 추정했다.
둘째, 이 성은 “단순한 방위를 위한 군용 건축물이 아니라 다수 주민의 거주지”였으며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 읍성”이라고 보았다.
셋째, 이 성에 살았던 백제인들이 적어도 서기 200년쯤에는 기와집에 거주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1997년 이후 실시된 풍납토성 발굴 결과와 거의 흡사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내디뎌 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생각하면 당시 풍납토성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지만, 매우 아쉽게도 결과는 그 반대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된 성벽을 제외한 성 안팎의 모든 곳이 서울의 급팽창과 더불어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대규모 인구밀집 지역으로 변모하고 만 것이다.
1997년 1월 풍납토성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우리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새해 연휴에도 선문대학교 학술조사단은 현장에서 풍납토성의 지표조사와 실측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때 풍납동 일대에서는 아파트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시공회사에서는 높은 가리개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조사단을 이끌고 있던 이형구 교수가 1월 4일 공사장 내부 조사를 위해 차단을 뚫고 공사장에 잠입하여 목도한 것은 흩어져 있는 백제 토기 파편들이었다. 아울러 지하층에 다량의 백제 토기 파편이 박혀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 출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서 토목공사나 건설공사가 이루어질 때 공사의 지연이나 중단을 염려하여 유물 출토 사실을 쉬쉬하며 덮어버리는 일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었다.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이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보하였다. 이에 따라 즉각적인 현장 검증이 이루어지고, 뒤이어 긴급 구제발굴이 진행되었다. 발굴 결과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당국에서는 토성 안쪽에서 건축 행위를 하고자 할 때는 공사에 앞서 문화재 조사를 반드시 실시할 것과 건설에 따른 터파기 공사에는 전문가가 입회할 것을 강제하는 행정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풍납지구 긴급발굴조사단’을 조직해 잇달아 예상되는 건축공사에 대비하였다.
이후 풍납토성 안에서는 1999년 동쪽 성벽 두 곳을 10m 폭으로 갈라보는 발굴과 1999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풍납1동 136번지 일대 100여 평, 이른바 경당지구 발굴을 비롯해 수차례의 발굴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습된 유물은 그 양도 엄청났으며, 이를 통해 풍납토성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풍납토성 발굴조사 광경: 1997년 아파트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 중 수없이 많은 유물이 출토되자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 긴급 구제 발굴을 하였다. 이후에도 풍납동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이 긴 직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서벽은 이미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 강물의 침식으로 사라져 원형을 잃어버렸지만 직선에 가까운 짧은 북벽과 남벽이 남아 있고 일부 현존하는 동벽은 밖으로 배가 부른 형태로 남북의 벽보다 훨씬 긴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변의 평지에 세운 성벽은 나무와 판자로 틀을 만든 다음 거기에 흙을 붓고 다져서 켜켜이 쌓아올리는 이른바 판축 기법으로 쌓았는데, 전체 길이 3,470m, 지하 9m쯤에 위치하는 하부 폭 40m 남짓, 높이는 대략 9~15m 안팎의 사다리꼴 단면을 띠고 있다. 성벽을 포함한 성 내부의 면적은 22만 6천 평에 달해 이웃한 몽촌토성의 두 배에 가깝다. 성벽 밖으로는 방어용 시설인 해자(垓字)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규모로만 보자면 삼국 이전의 평지성 가운데 최대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만한 규모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한 계산에 의하면 이 정도의 성벽을 쌓으려면 8톤 트럭 20만 대 분량, 그러니까 150만 톤 이상의 흙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아서 그렇지 실은 수백만 톤의 흙이 쓰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공구와 장비가 발달하지 않은 때이니 연인원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대규모의 노동력 동원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가진 고대국가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풍납토성은 성벽의 구조와 규모만으로도 왕도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강을 낀 평지에 성을 이룩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 제후의 성이나 한(漢)나라 때의 왕성이 모두 판축토성이었다는 점 또한 풍납토성이 왕성일 개연성이 높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현재 풍납토성 내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옛 흔적이라고는 일부만 남아 있는 성벽밖에 없다. 왼쪽은 동북 모서리 성벽이고 오른쪽은 서남 모서리의 성벽이다. 지하철 5·8호선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풍납토성의 동북쪽 지역을 볼 수 있으며, 지하철 8호선 강동구청역 4번 출구로 나오면 풍납토성 남서쪽 지역을 돌아볼 수 있다. 주차장은 따로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풍납토성의 발굴에서 드러난 유적과 유물은 한결같이 왕성의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 예로 1,000여 평의 경당지구에서는 건물터 따위의 유적지 190여 곳, 각종 토기와 기와, 전돌, 초석을 비롯한 500상자 분량의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몽촌토성 전체 발굴 유물과 맞먹는 정도다. 이처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진 경우는 국내에서 경주 말고는 달리 없다고 한다. 이만큼 유물의 집중도가 높다는 것은 그곳이 과거 인구밀집 지역, 곧 큰 도시였음을 의미한다.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들이 수두룩하다. 고위 관직명으로 추정되는 ‘대부’(大夫)라 새겨진 토기 조각은 한성백제시대 통치체제의 일단을 암시한다. 여기에서는 10여 개의 말머리뼈도 나왔는데, 학자들은 그것을 왕이 제사드릴 때 제물로 바쳤던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呂’자형의 대형 건물터도 확인되었는데, 일반 주거지가 아님은 분명하며 “모종의 생산 공간이나 성스러운 신전을 비롯한 특수 기능을 수행한” 곳이거나 왕궁의 부속건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이 나오고 있다. 비단 경당지구뿐 아니라 풍납토성 발굴지라면 어디서나 어김없이 출토되는 기와와 전돌은 이 유물의 주인공들이 바닥에 전돌을 깔고 지붕은 기와로 덮은 건물을 사용했음을 나타내는데, 고대사회에서 궁궐이나 관청 따위 주요 공공건물 이외에는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음은 상식에 속한다. 다시 말해 전돌과 기와의 존재 역시 풍납토성이 도성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명 토기: 출토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 백제의 관직명인 ‘대부’(大夫)가 새겨진 토기로, 이로 미루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중요한 유적지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러면 풍납토성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우선 수차례 이루어진 발굴에서 출토된 갖가지 토기들을 분석한 결과 늦어도 3세기 이전에는 성의 축조가 끝났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성벽에서 나온 목재와 목탄과 토기, 집자리에서 수습된 목탄 따위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검사한 결과 기원 전후를 중심연대로 하여 빠르면 기원전 2세기,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는 풍납토성의 축조가 완료되었을 것이라 한다.
요컨대 풍납토성은 전체 면적의 아주 작은 일부분밖에 발굴하지 않은 이제까지의 결과만으로도 『삼국사기』에서 온조왕이 기원전 18년에 도읍으로 정했다는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고대사 학자들은 초기 백제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전설이나 신화의 수준으로 이해하면서 이 시기를 잘해야 성읍국가 단계 또는 소국이나 소국연맹 정도로 설정해왔고, 3세기 중후반인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이나 4세기 중후반인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만일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으로 밝혀진다면 이와 같은 고대사 인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료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성을 의심받아온 『삼국사기』의 초기 백제 기록을 재인식해야 함은 물론, 한성시대 백제의 위상과 성격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설사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아닐지라도 이런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늦어도 2세기에 이미 이만한 성을 이룩한 국가라면 그야말로 당당한 권력과 위상을 지닌 고대국가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고대사 인식의 새로운 잣대, 풍납토성의 중요성과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그러면 풍납토성은 그 중요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을까? 강북에서 천호대교를 건너 강남으로 향하다보면 다리가 끝날 즈음 길 오른편으로 마치 제방을 쌓은 강 언덕처럼 잔디가 입혀진 둔덕이 동쪽을 향해 뻗어가다 휘우듬히 남쪽으로 꺾이면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풍납토성의 북쪽과 동쪽 성벽의 일부이다. 또 올림픽대교를 건너 강남으로 들어서면 길 왼편으로 그 위에 큰키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둑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것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납토성의 전부다. 성벽 바깥쪽은 물론이려니와 안쪽도 온갖 빌딩과 고층 아파트, 연립주택과 상가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성 전체의 모양새를 가늠해볼 도리가 없다.
외양이 이러하니 유물과 유적이 매장된 지하인들 온전할 리 없다. 풍납토성의 경우 유물의 매장층은 거의 지하 2~5m 구간이므로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이미 유적층이 파괴된 것이 틀림없으며, 건축 행위에 앞선 사전 발굴을 통해 간신히 유물을 수습한 곳도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유적지는 속속 들어서는 아파트의 지하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풍납토성 내부의 파괴는 시간에 비례하여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사적 지정에서 제외된 성벽 안쪽은 일반주거지로 분류돼 있어 고층 아파트 재개발 허가신청이 줄을 잇고 있는데 이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을 보호할 근본 대책으로 토성 내부도 사적으로 지정하는 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주민들의 생존권과 재산권 보호와 맞물려 있는 까닭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설령 주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막대한 보상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0년 5월에는 아파트 신축이 불투명해짐을 우려한 재건축조합원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경당지구 유적을 크게 훼손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이 사건은 풍납토성의 보존이 그리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백제라는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처럼 풍납토성이 다가왔다. 우리의 역사의식과 문화역량을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도 외로이 저만의 시간 속을 흐르면서, 강을 따라 흐르는 새로운 시간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풍납토성이 우리를 향해 묻고 있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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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서쪽 성벽 실체 드러났다…"성벽 최소 31m 이상"
TBS TV 동영상보기▶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R&seq_800=10305480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서쪽 성벽 발굴과정에서 성 외벽 구간이 처음 확인됐습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제11호) 서(西)성벽 복원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에서 외벽 구간을 추가로 확인했다고 오늘 (16일) 밝혔다.
한강변에 인접한 몽촌토성 서성벽은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으로만 추정됐습니다.
그러나 연구소가 주도하는 학술 발굴조사에서 지난해 10월 서성벽 잔존 성벽과 문지(門址·출입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됐습니다.
지난 10월에는 풍납토성 나들목 일대에서 서성벽 구간 일부가 추가로 발견되는 등 초기 백제 왕성의 전체 형태와 구조를 알려주는 조사결과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연구소는 이번 조사를 통해 성벽 잔존 폭이 31m 이상인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동(東)성벽 폭이 43m(해자 포함시 59m)에 이르는 점을 고려하면, 한강이 있는 성 바깥쪽으로 하부조사를 더 진행시 성벽 길이도 더 길 것이란 추산입니다.
서성벽 내벽 첫 절개조사에서는 석축 방식이 확인됐습니다.
중심 토루(土壘·흙을 다져 쌓아 올린 성벽) 안쪽으로 재료를 달리해 두 차례 흙을 덧붙여 쌓아 내벽을 구축하고, 가장자리는 석축(최대 폭 5.8m, 잔존 높이 2.6m)으로 마감했습니다.
석축은 내벽 가장자리를 '┚'자형 계단식으로 자르고 바닥 부분은 기초부를 성토한 다음 깬돌을 역호상(逆鎬狀·거꾸로 된 띠 모양)으로 쌓고, 그 위로 강돌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깬돌과 강돌을 번갈아 쌓아 올리는 수법은 석축 정면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석축 쌓기 방식은 이번 조사에서 최초로 확인됐습니다.
연구소는 "이번 조사는 서성벽 내·외벽 확인, 서문지 규모와 구조, 성벽과 문지 연결관계 등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라면서 "이번 성과를 토대로 중장기적 학술조사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연구소는 오는 18일 오후 3시에 풍납동 310번지에서 발굴현장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출처: MBN,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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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링크 ☞ https://namu.wiki/w/%ED%92%8D%EB%82%A9%ED%86%A0%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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