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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광개토왕비 해석, 실마리 찾나

백수.白水 2021. 12. 3. 16:44
최연식 동국대 교수 ‘신묘년조’에 도전적 해석.
왜·백제·신라 전란 지목한 32자 글자 부분 사라진 글자 부분 고대 소국 ‘반파’로 해석.
왜가 신묘년 반파로 건너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 해석
 

1884년 사코 중위가 일본에 가져간 광개토왕비의 탁본. 학계에서 ‘쌍구가목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흐릿한 원래 탁본의 글자윤곽을 좀더 잘보이도록 자의적으로 덧칠했다.  주황색 선 안의 구절이 논란이 된 ‘신묘년조’의 일부다. 

 
압록강 너머 중국 지안 옛 국내성터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재위 391~412)의 비가 올해로 1606년째 서 있다.
아들 장수왕이 414년 세운 고구려 문화유산의 대명사다. 높이 6m를 넘는 판석에 1775자의 예서체 한자들로 왕의 치적을 새긴 이 거대 비석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강건했던 나라의 역사와 품격을 드러낸다.

광개토왕비는 드높은 위상과 달리 국내 학계에선 한국 고대사의 가장 큰 고민 덩어리처럼 인식된다. 일본 학계가 처음 비석 명문을 판독해 연구를 시작한 탓이 크다. 1883년 일본 장교가 비를 확인한 뒤 탁본을 입수해 학자들이 명문을 판독했다.  그때부터 왕의 백제 정벌 업적을 새긴 본문 앞 한 구절(전치문)의 해석내용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9번째 행의 이른바 ‘신묘년조’로, 영락 6년(396) 왕이 벌인 백제 정벌을 배경으로 앞선 신묘년(391) 일어난 왜, 백제, 신라의 전란을 지목한 내용이다.

원문(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은 32자에 불과한데, 지금껏 확고한 해독의 전범이 세워진 바 없다.

 

19세기말 먼저 판독한 일본학자들은 ‘왜가 바다 건너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 신민 삼았다’고 풀이했다.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확고한 물증으로 선전한 것이다. 이 구절이 뒤에 나오는 백제 정벌 명분을 제시하려고 배치된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 해석문에서 백제의 잘못이 안 보이는 허점은 묻어버렸다.

 

반면, 20세기초 연구를 시작한 정인보 등 국내 학자들은 고구려를 주어 삼았다. ‘왜가 신묘년에 오자 (고구려가) 건너가 격파하고 백제는 신라를 침략했다’ 등으로 풀었으나, 문법에 안맞고 부자연스런 해석이란 지적을 받았다.

 

70년대 일제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되면서 초기 탁본 재조명 바람이 일었으나, 해석상 진전은 미흡했고, 식민사관, 민족사관이 작용한 근대기 해석의 대립이 130년 이상 고착되면서, 비는 역사적 진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1889년 제작된 광개토왕릉비 원석 탁본(미즈타니본). 주황색 선 안은 논란이 된 ‘신묘년조’의 일부. 역사비평사 제공
 
옛 문헌과 문자 판독의 실력자인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신묘년조’에 도전적인 재해석을 내놓은 건 늪 같은 연구의 교착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그는 20일 열리는 한국목간학회 발표회(공주대)에서 ‘영락 6년 고구려의 백제 침공 배경과 역사적 의미’란 논고를 낸다. 한문의 정통 문법구조를 바탕으로 훑어보니 ‘신묘년조’의 기존 해석들은 그동안 몰랐던 결정적 모순을 지녔음을 확인했다는 게 핵심이다. 다른 명문들엔 없는 해석방식을 신묘년조에만 무리하게 적용했고, 뒤에 이어지는 백제 정벌 기사 명분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백제의 과실이 없거나 모호한 한계도 한결같이 갖고 있더라는 비판이다.논고를 보면, 신묘년조를 제외한 비문의 다른 명문들은 모두 한문 문장 전형인 4자+6자 구조다. 반면, 신묘년조 기존 해석문들은 ‘來渡…’ ‘…新羅’ 등 핵심부 10자를 아예 하나의 구절로 합치거나, 3자+7자 또는 5자+5자 구절로 나누는 등 한결같이 4자+6자 구조에서 벗어난 변격으로 자르고 이어붙였다. 이에 최 교수는 다른 명문처럼 4+6자 구조에 따라 신묘년조 구절을 갈라서 해석해보니 ‘而倭以辛卯年(이왜이신묘년), 來渡□破(래도□파), 百殘□□新羅(백잔□□신라)’로 나누어지면서, 새로운 풀이의 지평이 열렸다. ‘건너와 깨뜨리다’란 동사로 그동안 해석되면서, 그 주어가 왜인지 고구려인지 100년 이상 논쟁해온 ‘來渡□破’가 특히 그러했다. 4자의 문장구성에서 ‘깰 파’(破)자는 동사가 아니라 ‘건너오다’란 겹동사 來渡(래도)의 목적어로 볼 수 있게 됐다. ‘□破’(□파)를 두 글자 지명으로 본다면, ‘~파’가 들어가는 고대 한반도 지명들 중엔 반파(伴跛, 叛波)가 유일한 사례가 된다고 최 교수는 짚었다.
 
 
최 교수가 `반'자로 판독한 ~渡O~의 O자.
 
반파는 4~6세기 한반도 남부에 있던 정치체다. 백제, 신라와 경쟁했고 가야, 왜와는 가깝게 교류한 소국으로 <일본서기> 등 중국, 일본 사서에도 기록이 보인다.실제로 비 탁본 중 상태가 좋다는 경희대 혜정박물관 소장본을 검토한 결과 신묘년조의 ‘…□破’의 □부분에서 중간 부위의 ‘-’획과 그 아래의 ㄱ획, 글자 왼쪽의 삼수변 획 ‘氵’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이런 획들이 들어가는 글자는 ‘沜’(반:泮의 이체자) 이외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 沜(=泮)이라면 ‘□破’는 반파란 지명이나 국명을 표기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추론을 전제하면, 신묘년조 구절은 ‘왜가 신묘년 반파로 건너오자 백제가 그들과 함께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로 풀이할 수 있다. 뒤에 나오는 백제 정벌 배경도 구체적 설명이 가능해진다.
 
중국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의 현재 모습.
반파를 두고 고고역사학계는 경상도 고령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의 다른 명칭이라고 대체로 추정해왔다. 이에 대해 그는 ‘반파=대가야설’은 6세기 자료를 기반으로 하지만, 비문에서 판독된 반파는 4세기 세력이어서 지역기반, 정체가 다를 수 있다면서 논의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관건은 판독한 새 글자가 정말 ‘沜’(반)자일까 하는 점이다. 고광의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은 “탁본 표면 상태나 글자체의 구도로 볼 때 신묘년조에서 삼수변 붙은 ‘沜’(반)자가 판독될 여지를 얼마나 인정할지가 학계 논의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견해가 아닌 가설과 문제 제기”라고 밝힌 최 교수의 발표가 광개토왕비의 블랙홀을 벗어날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신문 /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 등록 :2019-04-16 수정 :2020-12-27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90164.html#csidx968ba41ac3d39bf83d30cdb8b7667e1 

 

 

 

 

광개토태왕비 ‘신묘년조’ 새 해석 나왔다

입력2021.12.02. 오후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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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동아시아 고대사(史)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광개토태왕비 ‘신묘년조(辛卯年條)’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 신묘년조는 광개토태왕비에 신묘년(辛卯年·391) 이래 있었던 일을 기록한 기사(記事)로, 소위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라고 흔히 해석된다. 과거 일제는 신묘년조를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임나(任那)일본부’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아, 한반도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측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태왕비의 존재가 1875년 전후에 다시 알려진 이래 한·중·일 여러 학자들은 다양한 해독안을 제시하면서 논쟁을 벌여왔고 이러한 논쟁은 지금까지 지속 중이다. 1884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사코 가케아키(酒勾景信) 중위가 광개토태왕비 탁본을 처음 일본에 가져온 이후 비문 변조설도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중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였던 신묘년조 기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이 거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터였다.

하지만 ‘신묘년조’ 기사에서 지금까지 ‘해(海)’로 해석해온 글자가 실상은 ‘횟수’ 등을 뜻하는 ‘매(每)’이고 백잔(백제)과 신라 사이에 들어가는 두 글자는 ‘동강(東降·동쪽을 강복시키다)’이었다는 해석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이 경우 신묘년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왜가 신묘년 이래 건너올 때마다 매번 깨뜨렸는데, 백잔이 동쪽의 신라 변경을 강복(降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신묘년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사람은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이다. 박광민 연구위원은 1994년 임기중 동국대 교수가 중국 베이징대에서 발굴한 청(淸)말의 금석학자 반조음(潘祖蔭)본 ‘원석(原石)탁본’을 비롯, 여러 종의 탁본과 고대 금석문 자료들을 한 글자씩 대조하면서 신묘년조를 재해석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10월까지 총 3편의 논문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신묘년조에 관한 해석이 들어간 3편의 논문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

지난 11 22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자택 겸 연구실인 ‘낙송재(洛誦齋)’에서 만난 박광민 연구위원은 “2013년 광개토태왕비를 처음 찾았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게 됐고, 지난해 1월부터 각종 탁본과 자료들을 대비하며 한 글자씩 새롭게 해석하게 됐다”고 밝혔다.
 
“래도해파 아닌 래도매파”

그에 따르면, 가장 논란이 되는 신묘년조의 소위 ‘해(海)’에 관한 주장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사실 여러 종류의 탁본들만 놓고 보면, 여기에 쓰인 글자가 ‘해(海)’인지 ‘매(每)’인지, 아니면 제3의 글자인지 육안으로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사(泗)’ 또는 ‘인(因)’으로 읽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해당 글자 바로 앞에 적혀 별다른 이견이 없는 ‘도(渡)’를 근거로 ‘도해(바다를 건너다)’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박 연구위원은 “자형(字形)과 글자의 비례, 문맥을 놓고 보면 ‘해’보다는 ‘매’에 가까워 보인다”라고 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왜를 매번 파한 ‘매파(每破)’의 주체는 ‘고구려’라고 단언했다. 깨뜨린 주체는 비록 생략돼 있지만, “광개토태왕비는 1면부터 4면까지 한 줄당 41자에 맞춰서 기록했고 글자수를 맞추기 위해서 글자를 생략한 경우도 몇 군데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래도매파(來渡每破)’ 다음에 이어지는 ‘백잔’과 ‘라이위신민(羅以爲臣民)’ 사이에 있는 두 글자는 ‘동강(東降)’으로 해석했다. ‘라(羅)’ 바로 앞의 글자도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지만, 문맥상 신라를 뜻하는 ‘신(新)’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신라’ 앞의 두 글자는 아예 비면이 떨어져나가 판독이 불가능해 ‘추독(推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연구위원은 해당 대목을 ‘동쪽을 무너뜨리다’는 뜻의 ‘동강(東降)’으로 봤다. 해당 글자를 ‘동강(東降)’으로 읽으면 “백잔(백제)이 동쪽의 신라 변경을 강복(降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신묘년 이래 기존 조공질서를 어지럽힌 행위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본 것이 기존 해석과 가장 큰 차이다. 대만의 부사년(傅斯年·전 국립대만대 교장)본과 중국의 탁공 초균덕(初均德)이 쓰던 필사저본에도 ‘동(東)’으로 기록한 자료가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신묘년조’ 다음에 등장하는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정벌하는 구절은 문맥상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기존 해석은 광개토태왕이 신묘년(391)에서 6년이나 지난 병신년(丙申年·396)에 큰 잘못이 없는 백제를 왜 대대적으로 토벌하느냐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박 연구위원은 “병신년 기사를 포함한 앞뒤 문맥으로 헤아려 ‘동강’으로 읽었다”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면, 광개토태왕은 백제가 아닌 왜를 토벌해야 앞뒤 정황이 맞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광개토태왕비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까닭은, 글자 크기가 가로세로 10~12㎝가량 된다지만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멸이 심해 읽어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다. 현재 쓰는 한자와 자형도 많이 다르고, 현대문과 달리 마침표, 쉼표 같은 문장부호나 띄어쓰기도 일절 없다. 박 연구위원 역시 “한문은 끊어 읽기에 따라 전혀 내용이 달라진다”고 밝혔다. 높이가 6m가 넘는 거석(巨石) 위의 한정된 공간에 한 줄당 41자에 맞춰 압축적으로 새긴 터라, 축약과 생략 등이 있을 수밖에 없어 해석상 어려움이 따른다.

 
“위변조설 가능성은 낮아”

다만 박 연구위원은 1972년 재일사학자인 이진희 교수가 제기한 위변조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석회를 발라 몇 글자를 바꾼 것은 맞으나 악의적으로 왜곡변조했다기보다는 깨끗한 탁본을 얻기 위해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겨넣다가 잘못 새겨넣은 글자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당시 34세의 젊은 군인인 사코 중위가 전문가들조차 판독 정리에 5년이나 걸린 광개토태왕비를 보자마자 해독해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코 중위는 원석탁본을 일본으로 구해왔을 뿐이고, 일본 학자들이 비문을 해독하며 쌍구가묵(雙鉤加墨)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쌍구가묵은 글자의 윤곽을 먼저 그린 뒤 주위를 먹으로 채워넣는 탁본법이다.

박광민 연구위원은 “광개토태왕비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잘못 읽었던 글자도 여러 군데 찾아 바로잡았다”며 “광개토태왕비 해독, 신라와 고구려군의 대마도 정벌, 낙랑과 대방의 요서 존재설, 고구려 평양의 요동 존재설 등에 관해 논의가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 이동훈 기자 / 2021.12.02.]